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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 너머에 있는 '이상향'을 향해 지금, 여기에서 잘 살기
  • 나랑 | 본 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
삶의 돋보기

쉼 너머에 있는 ‘이상향’을 향해
지금, 여기에서 잘 살기

나랑 | 본 상담소 부설 열림터 활동가

쉼에 관한 글을 제안 받는 순간, 옆의 동료가 “딱이네, 딱이야” 한다. 정말 그런가? 생각해 보니 작년에 제주도에만 세 번 갔었고 봄에는 지리산 둘레길, 가을에는 7박 8일로 해남 미황사 참선 수행 프로그램을 다녀왔다. 남들이 뭐라던 휴가를 왕창 붙여 쓰며 철마다 제주 바다에 인사를 건네고 친구들에게 염장질로 귤 한 박스씩 보내는 나는 쉼의 달인인가? 흠…… 뭐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말하는 ‘쉼’이 아니었다. ‘일’과 대비되는 개념으로서의 쉼,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재충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본주의와 도시의 속도가 버겁기만 한 한 여자가 도시 속에서 낑낑대며 살아가기 위한 고군분투였다. 그렇게 한꺼번에 숨을 들이마셔 폐를 힘껏 부풀려 놓아야 그 힘으로 도시 안에서 쉼 쉬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스스로가 안쓰럽다.

난 쉬고 와서 일을 더 열심히 하기는커녕 쉬고 오면 늘 완전히 떠나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다. 한 번 다녀올 때마다 나의 마음과 일상은 들썩들썩, 며칠씩 정신을 못 차렸다. 미황사에 다녀와서는 매일 부도전까지 거닐던 산책이 그리워 한동안 마음을 앓았고 <산책과 자본주의>라는 책을 사서 읽기도 했다. 제주도에 다녀오면 귀촌한 언니들의 블로그를 찾아 어깨가 저릴 때까지 스크롤을 내리며 침을 흘리고, 빈 종이에 연도를 매겨가며 내가 몇 살에 내려갈 수 있는지를 점검하기 일쑤였다. 마흔 다섯에 제주도로 내려가겠다는 인생 계획은 제주도에 다녀올 때마다 점점 1년씩 앞당겨져 “도대체 지금 당장 내려가지 못하는 이유는 뭐니?”라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수차례. 그러다가 또 지금은 운동도 해야 하고 돈도 벌어야 하고 내려가서 먹고 살 궁리도 해야 하고. 아, 지난 2년 동안 이 널뛰기를 도대체 몇 번 반복한 걸까. 몇 년 후에 내려가자고 마음을 먹어도 늘 성에 차지 않는 이 공허함은 무엇일까.

운동의 쳇바퀴, 쉼이 필요하다

나에겐 이 도시의 속도도 그리고 운동의 속도도 버겁다. 단체에서 활동을 한다지만 자본주의에 저항하려면 자본주의의 속도를 뒤쫓아 갈 수밖에 없고(앞서 간 적은 없다), 그러다보면 가랑이가 찢어지는 것은 다른 직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내 페이스가 아닌 항상 쫓기면서 일하는 것만 같은 압박감 때문에 깊은 쉼은 늘 목마르다. 일에 온전히 몰입하기 힘든 단체 사무실의 분위기와 자발적 야근과 안 하면 안 될 것 같은 SNS 속에서 탈출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다. 또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 혹시 눈을 감고 아무 데나 돌팔매질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멈추어 서서 전망과 대안을 상상할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작 깊은 쉼을 쉬려면 걸리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최소한 몇 달은 놀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하는데 비혼으로 자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이 여자는 마음 푹 놓고 인생의 한 국면을 놀아버리기엔 불안한 구석이 너무 많다.

그런데다가 미쳐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미약하지만 내가 도울 수 있는 사람, 도와야 할 사람들이 너무 많고, 또 조직이 나에게 부여하는 과제와 책임이 있다. 오늘 한 일은 내일 할 일을 만들어낸다. 이것들을 놓지 못하기에 차라리 그냥 굵고 짧게 일하고 훌쩍 떠나버릴까 충동이 이는 것일까. 나만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하고 있는 운동에 조금 속도를 늦춰볼 것을, 판을 완전히 새롭게 짜 볼 것을 제안하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기엔 단체가 가진 역사와 전통과 위상이 있기에 급격한 변화를 제안하기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이상향을 꿈꾸기에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

어찌 보면 나의 공허함은 채워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그래, 나는 아주 아주 깊은 ‘쉼’, ‘쉼 너머의 쉼’을 원한다. 도시의 쉼, 숨 막히는 지옥철의 쉼, 창조성이 거세된 장시간 노동의 쉼, 노동착취의 쉼, 그리하여 결국, 자본주의의 쉼. 도시의 속도에서, 그 사이클에서 빠져나가는 것, 그리하여 다시 일상 자체가 재조직되는 것.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각자가 하루에 2~3시간씩 사회적 노동을 한 뒤에 시를 쓰거나 산책하거나 음악을 듣거나 사랑을 나누는 등 말 그대로 모두들의 자유로운 자기실현을 담보할 개인의 자기실현에 몰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일상의 묘사를 마르크스의 저작에서 발견하면서 나는 이상향을 꿈꾸기 시작했고 그것이 내 운동의 출발점이었으니까.

이상향에 대한 갈망은 자연스럽게 자연에 대한 희구로 이어진 것 같다. 자연 속에 있는 것을 좋아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천천히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자연이 가진 그 자체의 완전함과 경계 없음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소로우처럼 숲 속에 들어가 통나무 집 한 채 짓고 살면서 “삶이 아닌 모든 것들을 때려 엎고 삶의 골수만을 파먹기를”, 인생의 어느 한 국면은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바람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음악소리가 아닌 새 소리를 들으며 자연과 또 자신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SNS가 없어도 외롭지 않을 수 있는 든든한 연결감. 나의 ‘역할’이 아닌 그냥 나, 내가 달고 있는 모든 계급장을 떼어도 그대로 나일 수 있는 존재감. 제주의 오름을 천천히 걷다보면, 내가 무엇을 소유했는가, 무엇을 성취했는가와 상관없이 뜨겁게 차오르는 그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송악산 벤치 위에 누워 듣는 파도 소리는 살아있음의 감사함과 겸손함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자연은 나에게 또 하나의 이상향이 되었다.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기

혼란인지도 모르고 뿌연 안개 속을 정처 없이 걸었던 지난 2년, 널뛰기를 반복한 끝에 요즘은 내면이 조금씩 질서를 찾아가고 있다. 하나 깨달은 것이 있다면,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지금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그걸 의식하든 못하든 다 이유가 있고, 그건 결국 나의 욕망이라는 사실이다. 하기에 현재 삶의 불편함을 감수하며 ‘지금, 여기’에서 잘 살아가는 것 또한 나의 욕망에 책임지는 자세라는 것이다.

당장 현실에서 완전히 벗어나 이상향으로 갈 수는 없지만, 내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나의 삶의 균형을 맞춰보려는 시도들을 조금씩 하고 있다. 일에만 올인하지 않으려 하고, 창조하는 즐거움, 배워가는 재미를 만나고, 더 자주 자연을 찾고, 수행하는 일상을 살아보려 한다. 그리고 결코 빠른 시일 내에 찾아오지 않을 그 이상향을 향해 다리를 놓는 나의 운동을 귀하게 여기며, 이 세상에 잘 쓰이자고 다짐해 본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솔직하고 구체적인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지만, 그것이 가장 높은 차원의 정직성이라고 믿어본다. 이거 이거 너무 교과서적인 답인가? 하하하~

그나저나 이제 곧 봄이 옵니다. 제주도는 4월이 가장 아름다운데, 누구 저랑 청보리 군중의 집회 보러 가실 분 없나요?

나랑 여성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제주도, 기타, 밴드, 초기불교, 명상, 글쓰기, 자전거, 등산. 그리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전천후라는 신념. 그런데 이걸 다 하면서 살려면 더 바빠진다는 딜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