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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자취 남기기 - 기록을 좋아하세요?
  • 조윤주 | 본 상담소 회원
삶의 돋보기

삶의 자취 남기기
기록을 좋아하세요?

조윤주 | 본 상담소 회원

당신은 ‘기록’을 자주하는 편인가? 오랜 기간 동안 손으로 일기를 써본 적이 있다거나 그동안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차곡차곡 앨범에 끼워본 적이 있는지? 관람한 영화나 공연의 티켓 혹은 특별한 물건을 사고 난 뒤 생긴 영수증을 다이어리에 붙여본 적이 있나? 소설책에서 읽은 인상 깊은 구절을 노트에 정성스럽게 기록해 본 적은? 여행지에 가서 생긴 각종 팸플릿과 엽서, 사진을 딱풀이나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 보관하는 스크랩북을 만들어 본 적은?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쓴 각종 지출 목록을 가계부에 하나, 하나 적어 내려가며 ‘다음 주부턴 돈을 더 아껴 써야지……’라고 굳은 다짐을 해본 적은? 이 중 단 한 개라도 실행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무척이나 반가울 것 같다. 서로의 노트나 다이어리 등을 꺼내 보여주는 순간, 처음 만난 사이라도 ‘서먹함’ 따위는 금방 벗어던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든다.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컴퓨터, 소셜 네트워킹 서비스(SNS)가 대세인, 그러니까 모든 기록과 소통이 ‘가상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시대에 아직도 굳건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수하며, ‘물리적 기록’을 이어나가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큰 기쁨이니까.

참고로 난 위에서 언급한 질문에 해당하는 것들을 모두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다. 소위 말하는 ‘기록과 스크랩의 중독자’. 물론 이제 더 이상 스크랩을 하지 않거나 ‘아날로그’ 형식을 ‘디지털’ 형식의 기록으로 바꾼 것도 많다. 예를 들면, 일기 쓰기와 사진 앨범 만들기는 이제 ‘블로그’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만 하고 있다. 한때 즐겨했던 신문 스크랩도 더 이상 이전 방식을 유지하지 않는다. 얇은 신문 종이라도 쌓이고 쌓이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피와 무게가 증가하니까. 작년 3월, 5년 만에 대대적으로 방을 정리하면서 쇼핑백 2개를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신문 뭉치들을 버렸다. 그때 ‘앞으로 신문 스크랩은 더 이상 못 하겠다’라는 자체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이젠 관심 가는 기사의 URL을 복사해 엑셀 파일에 붙여넣는 것으로 스크랩을 대신한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파일을 열어 해당 기사의 URL을 클릭. ‘아날로그 기록 중독자’의 굴욕이라면 굴욕이지만, 솔직히 매우 편리한 것도 사실.

다이어리에 붙인 티켓과 영수증 손글씨로 빼곡한 다이어리 지면 스크랩과 그림이 담긴 노트 지면 스크랩북 작품집 지면

이처럼 점점 세상의 흐름에 맞춰가고 있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면 ‘종이 다이어리 쓰기’. 스마트폰이 보편화되면서 물리적 형태의 다이어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각종 모바일 플랫폼을 통해 다이어리나 노트 어플리케이션을 다운받아 활용하면 스케줄과 잡다한 메모들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는 사실도. 하지만 난 여전히 종이 다이어리를 이용한다. 그리고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도 계속 ‘종이 다이어리’를 쓸 예정이다. 스마트폰 다이어리 앱에 비해 효율성이 떨어질지는 모르나 ‘살아 움직이는 삶’을 포획하는 데 있어 종이 다이어리만큼 좋은 수단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다이어리를 쓸 때마다 스마트폰 화면을 터치할 때에는 발견할 수 없었던 섬세한 감정들을 느낀다. 좋아하는 뮤지션의 부음 기사, 친구가 준 복숭아차의 티백 포장지, 일본인 사진가의 작품집 속 종이 태그 등을 가위로 반듯하게 잘라 풀로 붙이는 행위에서 ‘추모’와 ‘애정’, ‘감동’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은 내면의 의식을 발견하는 것처럼. 머릿속 생각들을 연필로 흘려 쓸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차분해지고, 분노와 미움의 감정이 분쇄되는 것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가위로 자르고, 풀로 붙이라고? 컴퓨터, 스마트폰 다 놔두고 연필을 잡으라고? 그렇게 귀찮은 짓을 일부러 왜? 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익힌 기록의 방식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이 아니지 않는가? 내면의 언어를 밖으로 표현할 때 사용했던 첫 도구들은 기계가 아닌 연필과 크레파스, 종이와 풀이었으니까.

러시아어 동시통역사이자 유명한 수필가인 요네하라 마리는 ‘디즈니랜드가 무서운 이유’ 라는 칼럼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디즈니랜드 방문객은 놀이 시설에 준비된 공간으로 들어가면 끝이다. 자기 발로 걷는 것조차 하지 않고, 손을 써 무언가를 조작하지도 않는다. 그저 준비된 기구에 타서 정해진 공간을 이동하고, 놀이 시설이 내는 음향 효과나 시각적 반응을 오로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요컨대 인간이 가진 수많은 능동적인 힘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중략) 내 등골에 전율이 흐른 이유는 이 디즈니랜드의 무시무시한 풍경이 지금 우리가 사는 소비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 많은 것을 기계에 의존하며 살고 있지 않은지, 편리하게 산다는 미명하에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을 스스로 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요즘이다. 온몸은커녕, ‘열 손가락’ 근육을 온전히 다 사용하는 경우도 별로 없으니까.

자본주의 사회의 수동성과 소비지향성에 대한 비판은 접어둔 채 다시 ‘기록하는 즐거움’으로 넘어가겠다. 앞에서 ‘기록’을 즐겨하는 친구를 만나면 매우 기쁠 것 같다고 했는데, 그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일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때 떠오른 두 사람이 있었다. 스크랩과 기록의 대가로 훗날 스크랩북이 책으로 정식 출간된 루시 몽고메리와 박정희 할머니. 그들의 개인 작품집이라고 할 수 있는 『빨강머리 앤 이미지북』과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 일기』를 보면서 처음에는 입이 쩍 벌어졌고, 조금 더 지나서는 가슴이 저릿해졌다. 스크랩북의 시각적 아름다움도 아름다움이었지만, 삶의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빠지지 않고 기록해 온 인간적 노력이 감동 그 자체였기 때문. 저 두 분의 작품을 본 이후부터 난 물리적 기록을 지속하는 사람은 ‘삶의 결을 하나하나 매만질 줄 아는 인간’이라는 막연한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릎에 작은 노트를 올려놓고 그 위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적어본 적이 있는 사람, 친구가 써 준 메모를 버리지 않고 다이어리에 껴놓은 적이 있는 사람,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들을 인화한 뒤 앨범에 한 장, 한 장 끼워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쉽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사람과 인생에 관한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까지 열심히 기록의 즐거움을 설파했으니, 이제 미래의 ‘기록 중독자’들을 모집해 볼까 한다. “내일부터 자신만의 물리적 기록물을 만들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권유형 문장과 함께. 일기장, 가계부, 다이어리, 스크랩북, 뭐든지 좋다. 하루 종일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 키보드와 씨름하고 온 열손가락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해 보자. 처음엔 조금 귀찮을지 몰라도, 습관이 되면 매우 즐거운 취미 생활이 될 것이라 믿는다. 분명 삶의 질감과 양감이 풍부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책상 위에 있는 연필이나 펜을 들자. 그리고 근처에 있는 포스트잇에 적어라. “삶의 자취를 남겨보자!” 이 포스트잇을 뜯어내 노트 맨 앞장에 붙이는 순간 삶의 기록이 시작된다. 모두들 도전해 보시길.

사족.

‘기록 중독자’가 남긴 베스트 스크랩북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학교 1학년 2학기 때부터 써온 가계부 노트들, 삶의 흔적들이 빼곡히 붙어 있는 몰스킨 다이어리, 영국 생활을 정리하면서 만든 스크랩북 등이 있겠지만 뭐니뭐니 해도 최고의 작품은 2011년 10월에 발간된 『여행수업 Vol. 1 시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반년 넘게 시장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기록해 놓은 내 인생 첫번째 ‘공식 스크랩북’이다. 시장을 사랑하는 동지들과 함께 만들었다.

조윤주 상담소 정회원이자 발기인이고, 소설모임 멤버다. '역마살 낀 인생'을 동경하는 근면성실한 직장인이다. IT 브랜드의 홍보를 담당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기계치이며, 삶의 방식도 상당히 아날로그적이다. 자연 속을 걷는 것과 삶의 순간, 순간을 기록하는 것,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누는 소소한 대화, 종이 냄새와 손때 묻은 낡은 물건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