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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만에 만나는 한해보내기
  • 란 | 본 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본편보다 재밌는 후일담

한 달 만에 만나는 한해보내기

란 | 본 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한해보내기 한 달 전

“합정역 7번 출구로 나와서요, 우리은행을 끼고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오세요. 왼쪽에 문구점이 있는데 그 골목으로 들어와서 다시 오른쪽으로 돌면 길 끝에 보여요.”

하악……. 길 끝에 보인다고 했는데, 잘 안보였습니다. 그렇게 두어 번 왔던 길을 다시 돌고 돌아 상담소를 찾았습니다. 상담소에 들어오자마자 환하게 웃는 한 명의 그녀가 뭘 마시겠냐고 묻더니, 방금 막 내린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었습니다. 덕분에 상담소의 첫 느낌은 향긋하고 따뜻할 수밖에 없었지요. 첫눈에 여기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고요. 그런데 한 시간이 넘는 수다 같은 면접을 보고 나오면서 전 낙담했습니다. ‘미녀소장’이라던 분이 저에게 물었던 마지막 물음의 제 대답이 저도 별로 맘에 안 들었거든요.

아…… 떨어졌겠다, 마음을 놓고 있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그리고 전 상담소의 새 식구가 되었습니다.

한해보내기 일주일 전

여성주의상담팀 신입활동가로 들어와 지낸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저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건넸던 그녀가 다시 저를 불렀습니다. 그러더니 회원 분들과의 중요한 만남인 한해보내기를 준비해보자고 하더라고요. 네. 그녀는 상근활동가 두나였습니다.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이 한해보내기의 중요성을 알 리 없으니 덜컥 그냥 같이 하면 되겠지 했습니다.

한해보내기 사회를 보는 활동가들

그런데 그때는! 한해보내기가 일주일 남은 날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준비할 것은 바로 그날의 공연을 책임질 공연 섭외였습니다. 한해보내기 때 상근활동가들이 멋진 공연을 준비하는데, 올해는 시간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일주일 만에 공연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였으니까요. 시크릿의 ‘별빛달빛’ 춤을 추자, 사마귀유치원을 각색하자 등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지만, 결국 공연은 준비된 그녀들, 상근활동가 ‘마도’가 속한 싱어송라이터 그룹 ‘소시리어스’가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우리 10대 청소녀 회원분들이 열심히 준비한 ‘십센트’가 공연을 해주었고요. 당일에서야 알았지만 공연을 한 두 팀 모두 능력자였습니다. ‘소시리어스’의 무대는 감질 나는 가사와 퍼포먼스로 회원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기 충분했고, ‘십센트’는 나가수 뺨치는 폭풍성량으로 회원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습니다.

공연섭외가 되고 나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습니다. 앗. 그런데 한해보내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사회는 누가 볼 건지, 2011년 사업보고와 각종 프로그램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당일 사용할 음식도 준비해야 했고요. 사회는 상담소의 입담을 책임지는 ‘토리’와 ‘복옥’에게 맡겨졌습니다. 처음에 부탁했을 때는 둘 다 난색을 표하더니, 준비하는 과정에서는 드레스코드까지 맞추는 센스를 발휘해줬습니다. 사회 대본을 작성하던 토리는 스스로 쓴 재밌는 구절에서 혼자 웃음을 참지 못했고, 복옥은 자연스러운 연기로 마치 대본 없이 즉흥으로 사회를 보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고요.

마이크를 든 활동가

당일 참가하실 회원님들이 부족하지 않게 드실 수 있도록 음식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공명’은 고기를 먹지 않는 회원들을 위해 햄이나 소시지 등 고기가 들어가지 않은 샌드위치와 김밥을 주문했습니다. 도착하신 회원 분들께 추첨번호와 함께 드릴 초콜릿을 사기 위해 ‘배’는 합정동과 상수동 근처의 슈퍼를 돌아 온갖 종류의 초콜릿을 모아왔습니다.

한해보내기 준비는 척척 진행됐습니다. 두나가 걱정하지 말라던 이유가 다 있었어요. 일주일 만에 할 수 있을까 걱정했던 저의 조바심은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상근활동가들은 나눠진 일들을 눈 깜짝하는 사이에 해냈습니다. 이러니 신입활동가 눈에는 어마어마한 업무에 늘 시달리면서도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야 말로 상담소의 매력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요.

드디어 한해보내기 당일

올해 들어 제일 춥다던 그날. 합정역에서 10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마리스타 교육원에 회원 분들이 속속 도착하셨습니다. 손이 빨개질 정도로 추운날씨에 ‘나랑’이 합정역부터 마리스타까지 발자국 안내판을 붙였지만, 어떤 회원 분은 마리스타를 찾기 어려워 1시간이나 근처를 헤매셨다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고요. 그래도 도착한 회원 분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부스행사로 진행된 페이지비의 다이어리를 구매하고, 가져오신 선물을 나누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본 행사에서의 가장 중요한 역은 ‘미초’가 했습니다. 당일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진행순서에 맞추어 넘기는 역할을 담당했거든요. 미초는 본행사가 시작되기 전부터 화장실을 다녀오며, 실수할까 봐 긴장된다고 했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매끄러운 솜씨를 보여줬습니다.

고깔모자를 쓴 참가자들

본 행사에서 잊혀지지 않는 모습은 단연 ‘미순’의 ‘윤상’ 따라잡기 퍼포먼스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윤상의 헤어스타일과 판박이인 가발을 쓴 미순은 자기 한 몸 불사질러 한해보내기의 분위기를 업 시키겠다는 각오로 무대에 섰어요. 당연히 좌중은 쓰러졌고요. 그 모습은 사진으로 남아있답니다.

가발을 쓰고 무대에 선 미순

무엇보다 한해보내기의 훈훈함은 상담소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실세(?)인 ‘회원’분들 덕분이었습니다. 추운 날씨에 바쁜 연말에 시간 내서 함께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그날의 기억은 저에게 소중한 경험으로 남아있답니다. 특히 선물 나눔을 위해 일일이 손수 선물을 들고 들어오던 회원 분들의 모습은 저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습니다.

노트북 앞에 앉은 활동가

새로운 활동가로, 신입 회원으로, 한 달 만에 만난 한해보내기는 제가 상담소의 매력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한 달 만에 한해보내기를 만나고 또 한 달이 되어가려는 흐른 지금, 쌓여가는 상담일지와 쉴 새 없이 몰려드는 면접상담 일정이 버겁기도 하지만 저에게 상담소는 일주일 만에 행사 하나를 뚝딱 해낼 만큼 팀워크가 좋은, 유쾌함과 따뜻함이 감도는 공간입니다. 이런 공간을 만난 한해를 보내고 이제는 새로운 한해가 시작되네요. 저도 상담소도 부쩍 자라나는 한해가 될 2012년 끝자락의 한해보내기는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기대해봅니다.

별칭과 본명 사이에서 갈등하다 귀차니즘 발동으로 그냥 이름만 사용하는 중. 동거견과 함께 술을 마시는 것을 즐기는 상담소의 파릇한 신입활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