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소식지
오늘은 21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일이다. 이 귀한 휴일, 나는 숙직이다. 6개월 전 그날도 숙직이었다.
생활인 A는 그날을 기억하며 내게 말했다.
"그때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다고 제가 말했는데, 쌤이 안 믿었잖아요?"
그랬다. 2024년에 계엄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일이지 않은가?
하지만 A는 계엄 후 진행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중계해주었고, 나는 그 믿을 수 없는 상황을 듣기만 하다가 결국 스마트폰을 열었다. 활동가들 메신저방에 계엄 속보들이 속속 올라왔고, 몇몇 활동가들은 이미 국회 앞으로 향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믿어지지가 않았다. 현실감이 전혀 없었다.
[사진설명] 12.3 계엄 당시 메신저에 올라온 속보들
[사진 설명] 그날 도심에 나타난 장갑차 속보와 그 현장에 있다고 실시간으로 전해지는 활동가들의 메시지
열림터 거실 TV를 켰다. 아버지는 항상 진짜 큰일이 나면 일단 TV를 틀어보라 하셨다. TV에서는 윤석열이 선포한 계엄의 내용과 국회로 모이고 있는 국민들과 의원들을 보여주었다. 담을 넘는 의원들, 무장한 군인들을 보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이건 실제 상황이었다. 독재의 시작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치는 장면들은, 대학 새내기 시절에 봤던 광주민주항쟁 다큐멘터리들이었다. 군용차에 실리는 시민들, 군인의 군화에 짓밟혀 피 흘리는 사람들, 독재 타도를 외치는 사람들, 그리고 군복을 입고 마이크 앞에 선 대통령.
여성운동을 하는 우리는 언제나 정부의 반대편에 서서 저항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다. 독재정권에서는 당연히 우리가 타겟이 될 터였다. 억압하려는 독재자에게 우리는 끝까지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열림터는 어쩌지?
이곳의 생활인들에게 위협이 가해지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이들을 지켜줄 수 있을까?
우리는 버틸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계엄령이 반포되고,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는 헛소리가 현실이 되려는 그 시간, 나는 너무나 두렵고 불안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헬기 소리가 마치 당장이라도 열림터 문을 무섭게 두드릴 것 같았다. 그러나 숙직자인 나는 짐짓 내 불안을 감추고 잠들지 못하는 생활인들을 다독이며, 헬기소리가 아득해지게 이어플러그(귀마개)를 나눠주었다.
그로부터 6개월 후,
오늘도 거실 TV를 틀었지만 12월 3일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TV 앞에 생활인들이 다 같이 모여 파면된 윤석열 대신 새로운 대통령이 될 사람을 기다렸다. 솔직히 나는 누가 당선되든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는 당선되면 안되는 후보가 있었고, 10프로의 득표만은 안되어야 하는 후보도 있었다. 공통된 관심사로 대동단결하는, 너무나 중요한 시간이었다.
[사진 설명] 식탁을 가득채운 과자와 아이스크림. 이것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사진 설명] 온갖 CG와 AI기술들이 총동원된 개표방송들
우리는 커다란 테이블 가득 과자와 아이스크림을 펼쳐놓고 파티처럼 그 시간을 즐겼다. 각 방송사들은 개표방송에 저마다 가진 CG/AI 기술들을 총동원했다. 한 채널에서는 엉뚱하게 카피바라가 나타나 대한민국 경찰으로 변신도 하고, 등산을 하고, 방송도 했다. 또 어떤 방송에서는 후보자들이 우스꽝스럽게 무표정으로 K-pop에 맞춰 춤을 추고, 자전거도 탔다. 이 방송 저 방송을 돌려가며 개표 상황을 지켜봤고, 선거 결과가 확실해질 때까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내 삶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큰 기대는 없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망가뜨리지 않기를, 우리의 평온한 일상에 불안을 가중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 이 글은 2025년 6월 3일, 열림터에 와서 쫄보가 되어버린 감이 활동가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