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역량강화
2024년 11월 23일,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발화>에서 6명의 이끔이들이 용기 내어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끔이 라일락, 라온, 햇님, 엘, 하나, 나기와 활동가 앎, 고슴도치는 무대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과정을 함께하면서
2024년 10월 19일부터 11월 30일까지 총 7주 간 매주 토요일마다 모여 워크숍을 진행했습니다.
아래는 이끔이 햇님과 나기가 전하는 7주 간의 워크숍 참여 소감입니다.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발화> 리플렛에 수록된 워크숍 소개. 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햇님의 후기]
2024년 10월 19일. 라일락, 라온, L, 하나, 나기, 앎, 고슴도치, 우리 8명은 빛의 광장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라탔다.
첫날은 참 어색했다. 아니, 조심스러웠다는 말이 맞을까? 서로가 서로의 피해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알기에 그랬던 거 같다.
각자의 책상에 놓여 있는 종이 한 장. <말하기 참여자들의 약속>이다. 그 글들은 간결하고 강했다.
"모든 참여자는 성별, 성별 정체성, 성적지향, 나이, 신체 조건, 피부색, 장애, 병력, 연애와 결혼 여부 및 임신 출산 여부 등이 각자 다를 수 있어요. 다양한 사람과 함께 참여함을 인지하고 그에 맞는 의사소통을 위해 노력해요.
자신과는 다른 경험을 존중하고 차이를 인정해요. 참여자들은 각기 다른 삶의 여정에 있어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하거나 상대를 위한 '정답'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주세요. 다른 참여자의 경험을 나의 기준으로 판단하기보다 그 순간 상대가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고 나의 경험과 만나는 점을 생각하면서 들어주세요."
<말하기 참여자들의 약속 中->
한 명씩 돌아가며 그 글을 읽었다. 세상에서 제일 자상한 약속을 숙지한 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내용을 장착한 우리의 발화가 시작되었다.
참여자들은 워크숍을 시작할 때마다 '자기표현카드'를 한 장씩 골라 그날의 컨디션과 마음 상태를 이야기 나누었다. 햇님의 이름표와 햇님이 고른 자기표현카드. 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말의 불이 지펴지니 따뜻했다. 각자 한 명씩 사연을 꺼내 놓았을 때 한참 그것을 서로 바라보았다.
다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이 참 많았다. 그런데도 집중해서 바라 봤다. 이안젤라홀(모임 장소)은 한 주 한 주,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공간이 되었다.
그렇게 우리는 그 곳에서 안전하게 무대를 준비해 나갔다.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발화> 로비에 진열된 리플렛과 '생존자가 보내는 엽서' 참여 부스. 사진: 혜영
빛의 광장에 도달했다.
첫 이끔이님의 무대를 보며 국가는 교제폭력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있다는 현실에 마주했다. 가해자는 불송치 되었다. 그 과정 내내 이끔이님은 큰 고통을 받았다. 연인 사이라는 관계에 가려진 교제폭력의 심각성과 교제폭력이 발생하는 메커니즘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수사기간은 교제폭력의 특성과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에 기반했다. 친밀함 뒤에 가려진 공포이다. 또 한 명의 이끔이의 무대는 자신의 내면과 소통하는 무대처럼 내겐 비춰졌다. 누군가는 뮤지컬처럼 또 누군가는 직접 그린 멋진 그림으로 동화책처럼... 숨죽인 관객들 속에 이 울림이 퍼져갔다.
마치고 나니 난 이 7명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우스갯소리로 연대해서 사랑하는 건지 사랑해서 연대하는 건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발화의 불을 지핀 이끔이 중 하나인 게 행복했다.
2018년 말하기 대회에서는 난 응답이었다. 그리고 2024년 15회, 난 이끔이가 되었다. 난 또 그다음 이끔이의 이야기를 들으러 갈 것이다. 그다음도 또 그다음도. 어디에서든 함께 할 것이다.
7주간의 머나먼 여정이라는 자원에 도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 홀로 아파하고 있을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어서. 글 솜씨 부족하지만 후기 쓴 햇님 드림-
'여성주의에 눈 뜨다'라는 제목으로, 응답이들에게 영웅담을 들려주듯이 무대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끔이 햇님. 사진: 혜영
[나기의 후기] 2024년, 나의 말하기
유독 힘들었던 한 해
2024년은 유독 힘겨웠다. 힘들었던 만큼 보상 받을 거라는 믿음이 깨졌고 트라우마는 8년의 시간을 넘어 내게 다시 돌아왔다. 괜찮아졌다고, 나는 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가해자가 내 삶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뭔가 극복해 보려 애쓸 에너지도 없었고 살아있는 것에 피로감을 느꼈다.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다른 피해자들은 어떻게 살아가는 걸까? 그래서 무작정 구글에 ‘성폭력 피해자 모임’이라 검색했고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주최하는 성폭력생존자자조모임 ‘작은 말하기’를 알게 되었다.
작은 목소리에서 큰 목소리로
처음 '작은 말하기'에 나갔을 때, 나는 마치 죄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불특정 다수 앞에서 내 피해 경험을 말해보는 게 처음이었고 사람들이 나를 탓할까 겁도 났다. ‘같은 피해자들마저 나를 이상하게 생각한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다 나올까?’ 많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의 피해 경험을 쏟아낸 후 고개를 들어 마주한 사람들의 얼굴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렇게 '작은 말하기'에 나가고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도움을 받아 심리 상담도 받게 되면서 이제는 스스로 좀 나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이하 '큰 말하기') 공고문을 봤을 때 망설임 없이 신청했다. 더 이상 나를 탓하고 싶지 않았고 내가 내 편에서 살아가고 싶었다.
워크숍 진행 과정에서 말하기 참여자들과 함께 만든 약속과 역대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포스터가 진열된 벽. 사진: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회를 준비하며 - 감정 되찾기
사실 성폭력 피해자라는 공통분모가 있지만 서로 살아온 삶이 모두 다른 개인들이기에 갈등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하지만 참여자와 각자의 경험을 나누고 격려하는 과정에서 서로 유대감이 생기고 마음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을 나누며 서로 화내주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는데, 나는 내가 나 자신의 경험에도 이렇게 반응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말하고 듣는 과정 자체가 당사자가 충분히 발산하지 못했던 감정을 서로가 거울처럼 비추어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 덕에 나는 과거 경험이 떠오르면 두려워하고 자책하는 것에서 분노할 수 있게 되었다.
과거를 바라보는 것은 분명 괴로운 일이었지만, 혼자서 꺼내보는 것보다 안전했다. 해볼 가치가 있었다.
큰 말하기 - 단단해지는 경험
무대에 섰을 때, 긴장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편했다. 대회 준비 과정에서 참여자, 활동가 분들과의 연대가 내 안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많이 해소해주었다. 관객석에 앉은 이들이 나와 비슷하다면 손을 내밀고 싶었고 팔짱 끼고 검증하러 온 사람이라 해도 그때는 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피해자이며 잘못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참가자분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어갔고 나 또한 무대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피해자가 피해자임을 밝히고 응원받는 것. 그 자체로 삶에 대한 큰 희망을 얻었다.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시간을 흘려보내도 늘 마음속에 깔려있던 불신과 불안감이 약간 밀려나고 세상에 내 편이 있다는 믿음이 자리 잡은 것 같았다.
이끔이 나기를 지지하는 별이 되어 주기 위해 공감과 지지, 연대의 마음을 담아 스마트폰 손전등으로 무대를 비춰주고 있는 응답이들. 사진: 혜영
대회에 참가하게 될 또 다른 분께
저는 두려웠고 사실 아직도 두렵습니다.
그래도 혼자 두려워하는 것보다 다른 분들과 나누는 게 더 나았습니다.
당신의 곁에 생각보다 많은 우리가 있음을 알게 되는 경험을 하실 겁니다.
앞으로 우리가 점점 더 편해지기를 기도합니다.
- 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