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문화운동
나는 지난 5월 31일에 열린 서울 퀴어퍼레이드의 전야제인 핑크닷에 부스 스탭으로 활동했었다. 내가 참여한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스에서는 ‘적극적 합의’가 무엇인지 알리는 것이 주 목표였고 퀴어퍼레이드 참여자들에게는 파트너와 스킨십이나 섹스를 할 때 본인이 어떤 합의 행동을 하는지 포스트잇에 적어서 판넬에 붙이게 하는 활동을 하였다. 판넬에는 점수(0점~5점)가 적혀져 있어서 본인의 합의 행동이 얼마나 적극적 합의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점수에 맞게 포스트잇을 붙이는 방식이었다. 참여자들은 판넬에 붙여진 다른 참여자들의 포스트잇을 보고 자유롭게 점수를 옮길 수도 있었다.
위에서 말한 ‘나의 적극적 합의 점수는 몇 점?’ 활동에서는 다양한 참여자들의 반응을 볼 수 있었다. 포스트잇을 부탁드리면 쑥스러워하시거나 거절하시는 분도 계셨고 오히려 하고 싶다고 부탁하시는 분도 계셨다. 어떤 분은 판넬에 붙여진 포스트잇이 흥미로우셨는지, 포스트잇은 적지 않으셨지만 판넬을 오랫동안 구경하다가 가시기도 했다. 또한, 판넬을 찍어가시는 분도 많았다. 그룹으로 온 참여자의 경우에는 판넬에 붙여진 포스트잇을 보고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시는 장면도 많이 보았다.
그런 다양한 참여자들의 반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는 두 명의 참여자가 와서 어떤 한 포스트잇을 보고서는 이 행동은 몇 점에 있어야 하는가를 서로 열띠게 얘기했던 것이었다. 아무래도 일상에서는 성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장소도 없을 뿐만 아니라 친구들끼리는 이런 얘기를 나누더라도 장난식으로 흘러가기가 쉬운데 퀴어퍼레이드에서는 성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고도 진지하게 받아들였기에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또 하나는 본인의 합의 행동을 적은 포스트잇을 붙이신 후에 판넬을 살펴보신 후에 본인의 합의 행동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나에게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고 일행분들과 얘기를 나누시다가 하신 말씀이었지만 이 활동으로 참여자들에게 어떤 생각할 거리를 주었다는 것이 뿌듯했고 그 말씀을 듣고 나니 나는 그동안 어떤 합의 행동을 했고 그 행동은 과연 얼마나 적극적 합의에 맞는지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참여자의 반응 외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판넬에 보이는 행동의 흐름이었다. 0점과 5점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의 내용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주로 0점에 붙어있는 포스트잇은 ‘느낌으로 안다’와 같이 상호 간에 오해가 있을 수 있는 불확실한 행동이 적혀져 있었다. 반면에 5점으로 갈수록 파트너에게 직접 물어보거나 하고 싶다고 말을 하는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본인이 높은 점수에 붙였더라도 불확실한 행동이 적혀져 있더라면 시간이 지난 후에는 낮은 점수로 옮겨져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우리는 판넬에 여러 가지 행동을 적어놓고 그 행동 중에서 적극적 합의가 아닌 것에 스티커를 붙이는 활동도 같이 진행했었다. 판넬에 적힌 행동들은 ‘권력 관계 아래에서 일어난 일이다’나 ‘상대방이 술이나 약물에 취한 상태였다’와 같은 내용으로 모두 적극적 합의가 아니었다. 그 판넬을 보고 눈물을 보이신 분도 계셨고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모두 (적극적 합의가) 아닌 것 아닌가요?”라고 묻기도 하셨다. 그 행동들에 대해 매우 화가 난다고 말씀하시기도 하고 화난 만큼 스티커를 많이 붙이고 가신 분들 또한 계셨다. 참여자들께서 다양한 반응을 보여주셔서 기쁘기도 했지만, 이 퀴어퍼레이드를 나가기만 해도 이런 반응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씁쓸하기도 했다.
나는 올해 처음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이번 행사 이후에도 계속 참여하고 싶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번 퀴어퍼레이드를 통해 자유롭게 성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일상생활에서는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이야기할 기회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런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내가 이상하게 보일까봐 걱정이 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 안에서는 이상하게 보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스킨십이나 섹스에 대해 얘기해도 “여자가 무슨 저런 말을 해?”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또한, 내가 페미니즘 얘기를 해도 공격받지 않을 것을 안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편안함을 주는 일이었다. 보통 페미니즘 얘기를 꺼낼 때는 혹시라도 물리적인 공격을 받을까봐 경계하며 말을 시작하는데 여기서는 내 생각을 마음껏 말할 수 있었다. 나를 검열하지 않은 채 내 생각을 말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받는다는 것은 굉장히 후련한 것이라는 걸 느꼈다.
퀴어퍼레이드 안에서는 사람들과의 유대감도 느낄 수 있었다. 나와 이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이지만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친밀감과 유대감이 느껴졌다. 나는 사람을 좋아하고 같이 얘기하는 것도 좋아하는 성향이지만 어쩔 수 없이 처음 보는 사람은 경계해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퀴어퍼레이드 안에서는 초면인 사람임에도 위협을 느끼지 않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즐거웠다. 그리고 퀴어퍼레이드 행진은 그 유대감을 더욱 증폭시켜주었다. 이 많은 사람이 나와 뜻을 함께하고 있으며 다 같이 걷고 있다는 것은 평소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유대감을 주었다. 짧은 거리가 아님에도 끝까지 즐겁게 완주할 수 있었던 것은 축제가 주는 즐거움, 우리가 함께라는 유대감 그리고 옆에서 같이 걸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기에 더욱 연대가 중요하다고 느껴졌던 행사였다. 그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된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이번 경험을 시작으로 계속 연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이 후기는 본 상담소 자원활동가 청님께서 작성해주었습니다.>
▶️ 핑크닷이 뭔가요? 핑크닷은 2009년 싱가포르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해요. 싱가포르는 남성 간의 모든 성적인 신체 접촉을 불법화하는 국가입니다. 한국에서는 군형법 제92조의6이 군대 내 동성 간 합의한 성행위를 처벌하고 있죠?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도 군관련성소수자인권침해차별신고및지원을위한네트워크와 연대하여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 운동을 십여 년 넘게 지속하고 있는데요. 싱가포르는 심지어 군대 밖에서도 남성 간 성행위를 처벌합니다. 원래 싱가포르 형법 377조는 '자연의 질서에 반하는' 성행위를 불법화하는 규정을 두고 출산 가능성이 없는 모든 형태의 성행위를 처벌했다고 해요. 해당 법은 당사자 간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적용되었고, 이성 간의 구강/항문 성교까지 처벌하는 문제점이 있어 2007년 10월에 폐지되었어요(지금의 싱가포르 형법 377조는 시체강간을 처벌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도의 규정으로 남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싱가포르 형법 377A조는 여전히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국민들의 자유로운 집회나 시위를 엄격하게 제한하여 정치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엄격한 시민 통제로 심지어는 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멋있게 표현하는 것조차 검열법에 의해 금지한다고 해요. 그런데 2009년에 싱가포르 홍림공원 안에 있는 자유발언대(Speaker's Corner)가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면서, 누구나 등록만 하면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에 성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은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분홍색으로 인간 동그라미를 만드는 행사를 준비하였고, 어두워지면 분홍색 불빛을 동시에 켜는 점등식을 진행했다고 해요. 공존, 화합, 연대하는 성소수자(와 연대자)들의 모습을 사회에 드러내기 위해서였죠. 2009년에 2천5백 명 규모로 시작한 핑크닷은 2011년에는 1만 명, 2014년에는 2만6천 명으로 매년 참여 인원이 늘어나고 있고, 현재 홍콩, 대만, 일본 오키나와 등에서도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올해 제20회를 맞이하는 서울퀴어문화축제에서도 특별한 전야제로 서울핑크닷을 진행합니다. 국가가 공과 사, 당사자 간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통제하고 처벌하는 것은 심각한 인권침해입니다. 특히 싱가포르의 형법 377A, 우리나라의 군형법 제92조의6과 같은 '동성애 처벌법'은 이성 간 성기 삽입만을 '정상적', '자연적'인 성행위로 규정하고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합니다. 반면, 합의한 성행위도 성범죄로 규정함으로써 성범죄를 개인의 문제, 사적인 문제로 보는 왜곡된 인식을 형성하고 실제 성폭력의 문제 해결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그동안 섹슈얼리티 담론을 변화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해온 반성폭력 운동 단체로서 이번 서울핑크닷에 참여 및 연대하기로 하였어요. |
▶ 상담소는 왜 퀴어문화축제와 함께 하나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그동안 매년 서울퀴어문화축제에 참여하여 길거리괴롭힘 소멸 프로젝트 <넌진상> 부스,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퀴어셀프디펜스> 프로그램 등을 진행해왔고, 상담소가 오랫동안 연대해온 차별금지법제정연대, 군관련성소수자인권침해차별신고및지원을위한네트워크 등의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함께 해왔습니다. 성폭력은 성별화된 권력구조, 위계화된 성별구조에서 발생합니다. 폭력적, 해악적, 헤게모니적 남성성을 구성하고 여성을 취약한 신체로 만드는 데 가부장제와 이성애주의가 공고하게 결합되어 강간문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젠더이분법과 이성애중심주의에 균열을 내는 일은 반성폭력 운동에 중요한 지점입니다. 상담소는 매년 1천 건이 넘는 성폭력 상담을 하고 있고, 그 중에는 피해자가 성소수자인 경우도 많습니다. '해군 상관에 의한 성소수자 여군 성폭력 사건'이 대표적인 사건이겠지요. 작년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생존자의 자리]에서는 트랜스남성이자 성폭력 생존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나눠주신 말하기 참여자도 있었어요. 전화상담에서 매번 성적 지향, 성정체성 등을 물어보는 것은 아니니까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성소수자일 것입니다. 때로는 성소수자이기 때문에 더 쉽게 성폭력 피해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가해자는 '전환치료', '교정' 등을 명목으로 성폭력을 하기도 하고, 음성화된 만남으로 피해자를 유인하여 성폭력을 하기도 해요. 성소수자는 성폭력 피해를 경험해도 아웃팅이 걱정돼서, 피해를 인정받지 못할까봐, 피해 사실을 밝히면 나의 성적 지향 또는 성정체성의 원인으로 보니까, 가해자도 성소수자인 경우 알려지면 성소수자 혐오를 더 강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피해 사실을 신고하거나 말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군대 내 성폭력 피해자였던 어떤 성소수자 군인은 동성 간 합의한 성행위를 처벌하는 군형법 제92조의6에 의해 가해자와 동법으로 처벌 받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 형법이 '부녀'만을 성폭력 피해자로 인정했던 과거에는 "트랜스젠더는 (성전환 수술을 하지 않아서/염색체가 다르므로/주민등록상 성별 정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녀가 아니다" 라는 법원의 판단으로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지 못하기도 했었어요. 성폭력을 '여성의 정조를 침해한 죄'로 보았기 때문에 성소수자는 '보호할 정조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죠. 이에 성폭력상담소를 비롯한 여성인권운동단체와 성소수자인권운동단체는 강력하게 규탄하고 성폭력 법 개정을 촉구하였습니다. 지금은 성폭력의 객체를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어, 성별과 상관 없이 모든 사람이 성폭력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되었어요. 이렇듯 성소수자의 인권은 반성폭력 운동과 무관한 것이 아니에요. 작년에는 미투운동을 통해 '퀴어 내 성폭력'이 중요하게 공론화되기도 했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앞으로도 성소수자가 경험하는 성폭력을 사회에 알리고, 성소수자라도 차별이나 혐오 없이 피해자로서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활동할 것입니다. 상담소에게 퀴어문화축제는 성소수자와 반성폭력 운동의 담론을 공유하고 성소수자 피해자와 연대하는 장입니다. 성폭력 없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한 걸음 한 걸음, 힘차게 행진하고 오겠습니다! |
▶서울핑크닷 당일 SNS에 공유한 성문화운동팀 앎 후기 서울핑크닷이 무사히 끝났습니다. 상담소의 참여 부스도 성황리에 진행되었어요! 다른 사람과 스킨십 등 성적 경험을 할 때 어떤 방법으로 상대방의 동의를 받거나 동의를 하는지 포스트잇에 적고, "나의 적극적 합의 점수는 몇 점?" 이라는 질문에 0점부터 5점까지 점수를 매기는 부스였어요. 그런 걸 어떻게 공개적으로 밝히냐며 쑥쓰러워하는 분,파트너에게 써보라며 포스트잇을 주는 분, 그동안 어떻게 합의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며 한참 기억을 되돌아보는 분, 자신 있게 본인의 합의 실천 방법을 쓰고 5점에 붙이는 분, 상대방이 나에게 했던 부적절한 행동을 써서 분노를 담아 0점에 붙이는 분까지 다양한 참여자들의 합의 실천 방법을 만나볼 수 있었어요! 그리고 다른 참여자들이 붙인 포스트잇을 보며 웃기도 하고, 일행과 서로의 경험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합의 방법과 점수가 맞지 않는다며 5점에서 0점으로, 2점에서 5점으로 옮기기도 했습니다. 0점에는 1~2점 사이에는 3~5점 사이에는 4~5점에 해당하는 포스트잇이 가장 많았고, 주로 공통된 내용은 '나의 의사를 솔직하고 명확하게 표현하고 상대의 의사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순간순간 찌질할만큼 동의를 구한다'는 포스트잇은 0점부터 5점까지 수없이 이동하기도 했는데요. 이 포스트잇을 성적 경험 도중에도 계속해서 상대의 의사를 확인하는 것으로 이해한 분들은 5점에 가깝게, 싫다는 상대의 의사를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요구해서 사실상 강요하는 것으로 이해한 분들은 0점에 가깝게 점수를 준 것 같았습니다. 부스에 참여하지 못한 분들도 한번쯤 생각해보시면 좋겠어요. 나는 어떻게 합의하고 있나요? 적극적 합의를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 것 같나요? 모든 성적 주체와 모든 사회구성원이 알고, 확인하고, 실천해야 할 적극적 합의의 기준! 여러분도 꼭 기억해주세요~ / 명시적으로 / 의식이 있을 때 / 충분한 정보와 이해를 바탕으로 / 평등하게 / 모든 과정에서 항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