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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오매] 트랜스젠더 ‘여성’까지만? (아하!뉴스레터, 35호)
  • 2009-10-14
  • 2952
 
트랜스젠더 ‘여성’까지만?
 
 
 
 
 
지난 9월 10일, 대법원에서는 어느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 사건에 대해 유죄판결을 확정했습니다. 지난 2월 18일 1심인 부산지법 제5형사부는 18일 트렌스젠더인 김 아무개씨를 흉기로 위협해 성폭행한 혐의(주거침입 강간 등)로 기소된 신 아무개씨에 대한 선고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했었습니다.
저희 상담소도 입장을 냈습니다. 매우 환영! 블로그, 홈페이지에서 입장을 알리고 언론과 인터뷰도 했지요. 그런데 이때의 환영은 어떤 싸움을 통해 얻은 성취나 기쁨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도리어 싸움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 보입니다. 어떤 논쟁이 펼쳐질 것인지, 함께 살펴보았으면 해요.
먼저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 유죄판결이 뉴스인 것은 이 판단이 예외적이거나 처음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강간죄를 구성하고 있는 ‘간음(姦淫)’은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질 안에 삽입되는 것을 정의로 삼고 있습니다. 여성의 질이 아니라, 여성이나 남성의 구강이나 항문에 삽입이 된다면, 혹은 남성의 페니스가 아니라 다른 이물질을 삽입한 것이라면 강간이 아니라 강제추행이 됩니다. 개정된 청소년성보호법과 성폭력특별법에 19세 미만과 13세 미만 사람에 대해서 (성기와 항문에) 이물질 삽입한 경우와 (성기를) 질이 아닌 신체에 삽입한 경우에도 강제추행보다 강하게 처벌하는 조항이 추가되었지만, 여전히 ‘여자’에 대한 강간의 죄는 가장 높은 법정형이 명시된 별도의 조항입니다.
이번 판결이 주목받은 것은 트랜스젠더에 대해 ‘강간죄’가 인정되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재판부에서는 현재의 법을 준용했을 것인데, 그렇다면 이 사건의 피해자는 트랜스젠더 ‘여성’입니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여성’이 이제는 강간죄의 피해자로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단순화시켜 말하기에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가 배우고 인식하기로 성별 정체성은 개인이 그 지향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지요. 그런데 어떤 피해자가 형사상 ‘강간죄’의 피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재판부가 ‘질’이 있는지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트랜스젠더라는 표상이 가져온 폭넓은 삶의 형태가, 생물학적으로 판단된 여성성 남성성의 모호성이 이 안에 포함될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이 판결을 환영할 만한 판결로 해석하고 싶었던 것은, 법이 피해자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집착을 질의 여부로, 생물학상의 신체부위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지향까지 포괄하게 되었으면 하는 기대 때문입니다. ‘여성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 질이라는 물신화된 신체부위를 법이 지키고 서있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법이 보장하는 보호법익이 명실상부하게 ‘성적자기결정권’으로 옮아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졌던 것이지요.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가 질의 여부를, 성전환 수술 여부를 엄격하게 조사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정말 여자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주요한 판단의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번 판결과 대비되어 회자된 지난 1996년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죄를 인정하지 않은 대법원 판결이 서로 같은 논지를 취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덜 여성처럼 살아온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은 무죄, 더 여성처럼 살아온 트랜스젠더에 대한 강간은 유죄.
여성성에 대한 판단기준이 조금 확장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여성성’을 지키고자 하는 법의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라는 단언이 있습니다. 대법원 판결 다음날인 9월 11일에 있었던 ‘형법개정의 쟁점과 검토’ 학술회의에서 토론자로 나선 동부지검 강형민 검사는 ‘어제 판결에 대한 과장된 해석을 경계한다. 어제 판결은 여성성을 지키고자 한 취지’라고 발언했습니다.
이 학술회의에서는 기존 강간죄 외에, 다른 신체부위에 삽입하거나 이물질을 성기에 삽입하는, 유사성교행위를 강간에 준해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소수견해로 제시되었습니다. 동시에 강간죄의 객체가 ‘부녀’에서 ‘사람’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안도 제안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정조를 지키는 전통을 버리지 못해왔던 형법을 개정하기 위해 여성인권단체들이 제시해온 의견이었지요. 그러나 결과는 유사성교행위 조항 추가는 부결. 강간죄의 객체를 사람으로 확장하는 것은 채택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법이 지켜야 할 ‘질의 절대성’은 여전히 건재한 채로, 피해자만 여자가 아닌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에요. 트랜스젠더 여성 정도가 이 관문에 조금 덜 무리해서 도전해볼 수 있게 된 셈입니다. 그러니까, 질에 상응하는 것을 지녔는지 판단하는 재판부의 역할은 계속될 예정입니다.
법무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형법개정을 담당하는 위원회에 속한 유수한 법학자는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그냥 장난 식으로 만지는 것과, 정말 정말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할 그 무엇은 다른 것이다. 정말 소중하게 보호되어야 할 그 무엇을 위해 강간죄를 만든 것이다”
95년 형법이 개정될 때, 성폭력에 관한 형법 제 32조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에서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었지만, 실제 법해석은 그 변화를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여성의 생식능력(임신 가능성)과 관련됩니다. 혼인 이후 여성은 자신이 속한 남성 가문의 아이를 낳아야 할 의무가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그 여성의 질에 ‘남편 이외의 남성의 페니스’가 삽입된다면, 그 여성이 출산하게 될 아이는 어느 남성에 속하게 될 것인지의 혼란을 야기하지요. 이와 같이 강간범을 국가가 처벌하는 이유가 ‘다른 남성의 가문에 속한 여성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면, 생식능력이 없는 MTF 트랜스젠더 여성은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아내에 대한 남편의 강간 역시 강간죄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한 남성에게 속한 여성의 성은 더 이상 침해될 ‘정조’가 없으며, 정조가 있다 해도 그 정조는 남편에게 속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강간죄 구성요건은 피해자들의 경험을 통해 다시 구성되어야 합니다. 법적으로 강제 추행이 강간보다 처벌의 정도가 약하다면, 그 이유는 ‘여성의 질에 남성 성기가 강제 삽입된 것이 (다른 어떤 행위보다) 끔찍하기 때문’이라는 ‘사회통념’ 때문이 아니라, 신체 삽입이 이루어진 성적 침해가 신체 삽입이 배제된 성적 침해에 비해 개인의 성적 자존감을 더 중대하게 침해한다는 피해자들의 경험적 근거에서 판단되어야 합니다. 개인 경험을 이 사회의 성차별적인 편견에 의해서 배제하고 있다면, 법 자체는 ‘보편적 정의’의 차원에서 다시 질문되어야 하겠지요.
이번 판결이 개개인의 경험을 통해 법이 재구성되는 과정이 될 것인지, 개인의 경험을 배제하고 판단하는 관문을 다시 한번 드러내고 만 것인지는 많은 이들의 비판적인 관심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향후 진행될 형법 개정과정을 관심있게 지켜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