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 위헌소원과 관련하여 본 상담소가 2월 11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의견서입니다.
의 견 서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5년간의 성폭력피해자 상담과 지원으로 축적된 경험을 바탕으로,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의 위헌성을 판단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이 법률과 ‘성폭력’의 관계성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제출하오니 판단에 참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다 음 -
1.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은 성폭력을 처벌하는 법 조항이 아니라 인권침해적인 법 조항입니다.
강제성과 공연성이 있는 성관계나 성적 언동은 성폭력관련법(군형법 제15장, 형법 제32장, 성폭력처벌법)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또한 군대 내 성폭력은 군대의 위계적 권위적 수직관계, 그리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지 못하고 생활을 함께해야 한다는 데 그 특수성이 있는 만큼, 상관이나 지휘관에 의한 성폭력은 법적처벌과 별도로 징계를 통해서도 규율할 수 있습니다.
강제성과 공연성이 없는 성관계를 처벌하는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는 성폭력을 처벌하는 법 조항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권침해인 법 조항입니다. 2015년 11월 5일 유엔 시민적 정치적 권리규약위원회(ICCPR)는 군대에서 남성 간 합의에 의한 성적관계를 처벌하는 군형법 제92조의6을 폐지하고 이행상황을 1년 이내 보고하도록 권고했습니다. 같은 달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성적지향 · 성별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역시 성소수자가 군대 내에서 겪는 부당한 대우와 성폭력을 개선하기 위해 군형법 제92조의6이 폐지되어야 한다고 제언했습니다.
또한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이 비친고죄여서 성폭력처벌법의 공백을 보완할 수 있다는 일각의 주장 역시 사실과 다릅니다. 2013년 6월 19일부터 성폭력범죄의 친고죄 조항이 폐지된 바, 군대 내 성폭력을 신고하기 어려우므로 주변인이 신고하여 수사할 수 있도록 군형법 제92조의6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모든 성폭력범죄의 친고죄 조항 폐지로 이제 주변인의 신고와 수사기관의 의지가 있다면 당사자가 고소하지 않아도 성폭력 사건을 수사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은 결코 성폭력범죄의 처벌조항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은 당사자들을 모두 처벌하는 바, 성폭력피해자를 보호하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자칫 동성 간 성폭력에 대한 이해와 감수성 부족으로 인해 ‘성폭력’이라는 본질이 가려지고 ‘성군기 문란’으로만 판단되어 성폭력피해자마저 가해자와 같이 형벌을 받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동성 간 ‘성관계’에서 강제성이 있었는지 또는 그것을 고의적으로 공연하였는지 여부를 판단하여 위법한 사실이 있을 때만 처벌하여야 할 것입니다. 단지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인권침해입니다.
이상의 이유로 본 상담소는 군대 내 성폭력의 제대로 된 처벌을 위해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2. 군대 내 성폭력 근절은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이 아니라 올바른 조직문화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국가인권위원회 연구용역으로 2004년 본 상담소가 수행한 연구조사 <군대내 성폭력 실태조사>도 군대 내 성폭력 근절을 위한 대안으로 친고죄 조항 폐지, 강간의 객체에 남성을 포함할 것, 신고와 처리절차 중 피해자 보호조치 개선, 내무반 시설개선, 외부기관의 적절한 개입과 군인의 인권을 보장하는 법 제정 등으로 제시한 바 있습니다.
또한 군대 내 성폭력에 대한 드문 연구조사로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이 연구의 결론은 ‘동의에 의한 성행위와 강제적인 추행 혹은 강간을 같은 맥락에서 추행으로 규정짓는 것은 군기문란 사고라는 관점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서 성폭력의 범죄구성요건의 핵심인 ’강제성‘을 기본 기준으로 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동의에 전제된 성행위에 대한 규정이 동성애에 한정되어 있어 동성애 폄하와 차별을 드러낸다.’라고 군형법 제92조의6(구 제92조의5)의 문제점을 분명히 짚어내고 있습니다.
군대 내 성폭력의 근절은 ‘강제성’이 있는 성적 언동을 제대로 처벌하고 규율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지 충분히 합의된 개인들 간의 내밀한 성적 언동을 밝혀내고 형벌로 규율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본 상담소는 이 연구의 결과와 그간 성폭력피해자를 지원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 내 성폭력의 근절은 군대 내 성폭력피해자가 자신의 성폭력피해를 용기 있게 호소하고 신고할 수 있는 조직문화의 변화가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성폭력피해자가 구제되지 못하는 것은 성폭력관련법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법이 있음에도 군대의 위계적 권위적 수직관계와 폐쇄적 조직문화가 사건을 은폐하고 해결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본 상담소는 이번 결정에서 ‘군형법 제92조의6 (구 제92조의5)을 폐지하면 군대 내 성폭력이 만연해진다’는, 동성애에 대한 편견에 기반한 선동이 배격되기를 바랍니다. 부디 헌법재판소가 개인의 성적자기결정권과 인격권을 보호하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결과를 내려주시기를 바라며 의견서를 제출하오니 면밀히 판단해주십시오.
2016년 2월 11일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