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2017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토론회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 후기
9월 19일, 서울 은평구 서울혁신파크에서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성폭력 판례뒤집기 토론회’가 열렸습니다. 이번 토론회 주제는 ‘피해자 권리 상실 삼각지대, 준강간’으로,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박아름, 변호사 이은의,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전문연구원 추지현님의 발제와 페미니스트 의사 이원윤, 장애여성공감 대표 배복주,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 최영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김홍미리님의 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번 토론회의 포스터는 형법 제299조에서 규정하는 준강간 사건에서 피해자의 권리가 어떻게 상실되고 있는지를 너무나도 잘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발제와 토론을 거치면서 접하게 된 많은 사례들에서는 무고와 피해자다움, 블랙아웃의 삼각형에서 피해자의 권리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준강간 피해자는 자신이 당한 피해를 고소하면서 무고로 역고소 당할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법정에서 요구되는 ‘피해자다움’을 갖추지 않으면 ‘피해자’가 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게다가 가해자 측이 주장하는 ‘블랙아웃’은 그 의미도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채 피해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증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형법에 규정된 준강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을 한 것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실제로 법정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는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판사들은 피해자가 피해 당시에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으며, 피고인이 그 사실을 알고 이용했다는 점을 ‘피해자’로 하여금 입증하도록 요구합니다. 피고인 측 변호사는 ‘블랙아웃’을 근거로 피해자가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거나, 피고인이 피해자의 상태를 몰랐을 수도 있다는 아주 희미한 가능성을 들어 피고인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추지현님의 발제 부분에서 피해자는 “기억을 이야기하면 심신상실의 상태가 부정되고, 기억이 없다고 하면 진술 자체가 의심받는”의 딜레마에 빠진다는 점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또한 토론회에서 다루어진 사례들 중에는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를 준강간이라고 의미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이 성폭력이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피해자마다 각각 다르기 때문에, 피해 직후 피해자의 행동 또한 제각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법정에서는 피해 직후의 피해자 행동을 보고 ‘피해자다움’의 각본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피해 사실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동안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통념을 바꾸기 위해 수많은 여성단체들과 연구자들이 노력했지만, 준강간 판결들은 판사들의 변하지 않은 통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토론회는 여러 판례들을 바탕으로 준강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무엇이고, 어떤 노력을 통해 잘못된 통념을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위에 언급한 부분 외에도 비동의간음죄 신설과 피해자에 대한 공감의 필요성, 블랙아웃과 패싱아웃(passing out)의 차이점과 그 개념들이 피해자의 진술의 신빙성 문제에 불리하게 작용하는 맥락 등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고, 어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지점들을 담고 있었습니다. 이번 토론회처럼 문제에 대해 함께 말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들은 변화를 위한 의미 있는 토대가 될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인권을 보장하고, 피해자의 경험과 언어를 반영한 법의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한국성폭력상담소의 기획과 진행, 그리고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이 글은 본 상담소 자원활동가 이비현님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