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한국성폭력상담소는 2019년 3월 21일부터 전국 209개 단체와 함께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 글은 지난 2019년 11월 13일 오후 2시에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열린 "20대 국회 강간죄 개정을 위한 토론회 - 성폭력 판단기준, '폭행과 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의 참가 후기입니다.
폭행·협박의 증명을 요구하는 최협의설?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에서 2018년 1월 30일부터 5월 30일까지 전국 네 개의 상담소의 상담일지를 분석한 「성폭력 피해상담 분석 및 피해자 지원방안 연구」에 따르면, 많은 피해자들이 언론에 공개된 미투운동들에 힘을 얻어 이제라도 가해자를 처벌하기 위해 성폭력상담소를 찾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법적 처벌로 이어지지는 못했는데, 가장 큰 이유는 강간죄의 구성요건과 판단기준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형법 제297조 강간은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명시되어 있고, 여기에서 “폭행 또는 협박”은 “상대방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하게 곤란하게 할 정도”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최협의의 판단기준은 실제 성폭력 피해경험을 담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대다수의 성폭력이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며, 가해자들은 폭행이나 협박이 없이도 피해자의 취약성을 이용하여 강간한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있으며, 지난 2018년 3월 UN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한국정부에게 ‘동의 부족’을 중심으로 강간을 재정의하라는 권고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미투운동에 대한 응답이 필요하다!
강간죄 개정과 관련하여 이미 지난 2007년, 여성단체와 학자들이 함께 만든 여성인권법연대 주최로 “형법개정안 공청회”가 개최된 바 있습니다. 당시 형법 297조를 “동의 없는 성적행동”으로 두면서 기본구성요건으로 하고, 298조, 299조는 폭행·협박·위력에 대하여 가중 처벌하도록 제안하였지만 개정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2019년 3월 21일, 전국 209개 단체가 함께(2019.11.13 기준) “‘강간죄’ 개정을 위한 연대회의(이하 연대회의)”를 구성하고, 성폭력의 판단기준을 폭행·협박이 아닌 ‘동의 여부’로 바꾸기 위한 활동들을 해왔습니다. 연대회의의 조사에 따르면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서 2019년 1월부터 3월까지 접수된 강간 사례 1,030건 중에,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있었던 사례는 28.6%(295건)에 불과하였고, 직접적인 폭행·협박이 없었던 사례는 71.4%(735건)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연대회의는 전문가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법안을 만들고, 집회, 기자회견, 입장문 제출 등의 활동을 해왔으며, 2019년 11월 13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과 토론회를 개최하였습니다.
발제의 주된 내용들
토론회에서는 총 세 분의 발제와 세 분의 토론이 있었는데, 먼저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님은 “‘강간죄’ 구성요건 개정 운동의 배경 및 의미와 과제”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강간죄 구성요건의 변화를 위한 여성운동단체들과 연대회의의 활동내용들, 그리고 최근 국회의 입법안들과 몇 가지 쟁점들을 발표하셨습니다. 특히 그간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의 대안으로 ‘비동의간음죄’를 요구해왔는데, ‘비동의간음’이라는 표현이 여성혐오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한자 표현으로 개선이 필요하며, ‘동의 여부’ 판단에 대한 법학자들의 부적절한 비판들을 말씀하셨습니다. 다음으로 민변 여성인권위원회 미투대응팀장이자 본 상담소 이사님이신 이경환 변호사님은 그간 전문가회의에서 논의하고 준비해온 형법 개정안의 주요 내용들을 짚어주셨는데, 주되게는 성폭력 관련 특별법을 형법으로 통합하고, 비동의를 기본 구성요건으로 하는 체계 개편과 기존의 강간/추행의 이분체계를 강간/유사강간/추행의 삼분체계로 재구조화하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장애, 나이 등을 고려한 가중요건의 재조정을 제안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임다혜 선생님은 독일, 스웨덴, 오스트리아의 강간죄 개정 항목들을 살펴보면서 한국과의 차이점 및 참고할 지점들을 짚어주셨습니다.
토론과 고민지점들
앞의 발제에 대한 토론들도 향후 논의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먼저 인천지방법원의 오승이 판사님은 기본적으로 ‘동의 없이’를 기본요건으로 두는 것에 동의하지만, 도입 후 법해석에서 성차별을 고착시키는 것은 아닐지 숙고가 필요하며, 최근 성적자기결정권과 동의의 의미와 범위에 대해 다루고 있는 두 개의 판례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이외에도 연대회의의 개정안에 대해서는 ‘성적 침해’라는 개념의 적절성, 다른 관련 법들과의 관계를 고려해야된다는 것, 위력과 폭행·협박을 같은 조항에 두는 것에 대한 고민, 성인 비장애 여성 대상 ‘그루밍’을 염두한 것으로 보이는 ‘보호감독 관계의 남용’에 대한 적절성 및 기타 문구 상의 고민 지점들을 토론해주셨습니다. 다음으로 박은정 부장검사님은 해외입법례를 참고할 때의 주의점, ‘간음’ 대신 ‘성교’라는 단어를 쓸 때의 고민들, 역시 성인 비장애 여성에 대한 ‘그루밍' 범죄’ 도입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은지, 특히 20대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국민적 반응이 없어서일 수 있으며, 국민조사가 필요하겠다는 의견도 덧붙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계명대학교 장응혁 교수님은 개정안에서 ‘동의 없이’보다 ‘의사에 반하여’ 등의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지, 구성요건들이 중복되지는 않는지와 ‘그루밍’ 관련 조항은 특별법으로 다루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셨습니다.
이후 플로어 토론이 이어졌는데, 한국여성민우회 김민문정 대표님은 국민들의 반응이 부족한 것 같다는 토론내용에 대해서 2018년 미투운동 자체가 강간죄 구성요건을 바꿔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이었으며, 현재 국회에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검찰개혁 등의 문제에 집중하느라 여성들의 문제에 귀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견을 주셨고,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오매 활동가는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상담사례 조사에서 71.4%가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이라는 것에서 이미 피해자들의 피해경험과 법규정이 맞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며, ‘보호감독 관계의 남용’에 대한 개정 제안은 성인여성대상 그루밍을 포함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동의가 아닌 상황에서의 폭력들을 다루려는 것이었음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국회입법조사처의 차인순님께서는 강간죄 개정에 대해 20대 국회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국민적 공감이 없어서가 아니고 총선 준비 등의 현실적 문제 때문일 수 있으며, 혹시 20대 국회에서 어려움이 있다면, 21대 총선공약과 국회를 최대한 활용해야 하며, 특위를 구성하는 등의 적극적 전략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최협의설 타파는 시대적 요구
2018년을 경유하여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는 한국의 미투운동은 성폭력이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연대가 필요한 일임을 확인시켜주었고, 기본적인 사회적 안전망으로서 시급히 필요한 변화들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최협의설 타파는 “이제는 살기위해 말해야겠다”며 상담소를 찾고, 거리에 나섰던 수많은 피해자들의 용기와 목소리에 대한 응답의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의 지지와 연대를 부탁드립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의 파이(김보화)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