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 기념 성명
오늘은 “9.28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행동의 날”이다. 우리는 2021년 ‘낙태죄’의 실효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이 안심할 수 있는 보건의료 환경과 제도적 보장 속에서 양질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받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오늘 전 세계 여성들의 행동과 요구에 함께한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정부 보건당국과 국회가 계속해서 책임을 방기해오던 가운데, 최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에서는 그간 계류되었던 모자보건법 개정안을 모두 안건으로 상정했다. 그러나 현재 안건으로 상정된 계류안은 2021년 발의된 남인순 의원의 개정안을 제외하면 모두 ’낙태죄‘의 실효가 만료되기 전의 개정입법 시한인 2020년에 발의된 것으로 비범죄화 이후의 요구와 방향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여전히 각 정당과 소속 의원들은 형법상 처벌 조항과 모자보건법을 통한 허용 범위 규정이라는 후퇴한 수준의 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 또한 3년 전의 인식 수준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형법상 ‘낙태죄’ 조항이 실효를 다하여 모자보건법 제14조 또한 더 이상 적용되지 않으며, 세계보건기구에서도 각국에 임신중지의 전면 비범죄화를 강력히 권고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와 같은 논의는 오히려 상황을 후퇴시킬 가능성이 있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드러낸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에 대한 심각한 무지와 국회와 정부의 보호출산제 도입 시도는 더욱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우리는 ’안전하고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위한 국제 행동의 날‘을 맞이하여 다음과 같이 요구한다.
1. 모자보건법 개정에 대하여
세계보건기구의 <임신중지 가이드> 를 비롯하여 여러 국제 규범들은 임신중지의 완전한 비범죄화와 함께 체계적인 보건의료시스템을 갖추도록 권고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나라들이 그와 같은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 한국은 이미 2020년 12월 31일자로 형법상의 ‘낙태죄’가 법적 실효를 상실한 상태인 바, 임신중지는 더 이상 형법상의 규제나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비범죄화가 이루어진 만큼 모두에게 양질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할 수 있는 포괄적인 보건의료체계와 권리 보장을 위한 법제도 구축이 진전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달라진 것이 없다.
정부와 국회는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그간 임신중지에 대한 법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음성적이고 폐쇄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보건의료 환경을 공적 시스템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건강보험 적용과 보건의료 연계 체계 구축, 공식 상담과 정보 안내 시스템을 통해 보건의료 기관에서의 공공연한 차별과 모욕적인 발언, 서류 위조, 무리한 진료비 요구와 현금납부 요구 등의 관행을 변화시키고 모든 의료인들이 양질의 임신중지 관련 의료 서비스를 안전하게 제공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양질의 안전한 임신중지에는 임신중지 시술이나 약물의 처방만이 아니라 임신중지 전후의 건강에 관한 상담과 지원, 폭력 상황에서의 임신중지에 대한 지원, 당사자의 사회경제적 상황에 따른 지원이 모두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임신 초기 유산유도제인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을 이용한 내과적 임신중지는 1988년 이후 전 세계 95개국에서 충분히 안전성과 효과를 인정받아 널리 사용되고 있으며, 내과적 임신중지의 비율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런 유산유도 약물이 필수의약품에 포함되지 않고 있어 내과적 임신중지에 접근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비공식적 약물 사용 실태나 그로 인한 후유증과 합병증 등 건강권 침해사례에 대해서 알 수도 없는 실정이다.
모임넷은 2023년 6월까지 172명의 약사, 59명의 의사, 1625명의 시민들이 각각 유산유도제의 필수의약품 지정과 신속한 도입을 촉구하는 진정서를 식약처에 제출하였으나, 식약처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앞세워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할 엄중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양질의 안전한 임신중지는 한 사람의 생애주기에서 성재생산 건강을 관리하고 유지하는데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치며,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의 보장은 인권과 건강권의 필수요소이다. 따라서 정부와 국회는 모자보건법 개정법안에 임신중지서비스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적용과 접근성 확대, 임신의 유지와 중지/양육/성재생산 건강에 관한 포괄적 상담과 지원 체계 구축의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 또한 중앙 및 지방정부는 ‘포괄적 재생산 건강지원’을 위한 기관을 설치/운영하고 피임, 임신/출산, 안전한 임신중지, 성교육과 성건강 관련 지원을 종합적으로 계획하고 제공할 것을 요구한다.
2. 보호출산제에 대하여
지난 6월 출생미신고 아동에 대한 감사원의 조사 결과가 발표된 후 한달 이내에 ‘출생통보제’가 제정되고, 영아살해죄 및 영아유기죄를 폐지하고 일반 살해죄 및 유기죄로 처벌되도록 하는 형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였다. 아울러 출산통보제로 인한 병원밖 출산의 보호라는 명목으로 보호출산제(익명출산제)가 동반입법을 목표로 보건복지부 주도하에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출생미등록 아동과 영아유기 및 영아살해가 심각한 문제라는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런 현실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정상가족 중심의 가부장적 법제도와 문화, 사회경제적 지원제도 부재, 임신중지와 출산/양육에 대한 통합적인 지원체계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며, 그로 인해 결국 모든 책임이 여성의 결정에 관한 문제로만 내맡기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임이 간과되고 있다.
따라서 법적 혼인관계 밖에서 출산한 아동이나 이주아동의 출생신고가 어렵고, 한부모에 대한 양육 지원이 양육시설에서의 지원보다 훨씬 적으며, 위기임신이나 임신갈등에 처한 가족들이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현실들을 개선하는 것이 시급하다. 게다가 미혼모시설과 아동양육시설을 통해 수많은 아동을 ‘고아호적’ 상태로 해외로 입양하는 일을 국가가 주도해왔음이 최근의 과거사 규명을 통해 드러나고 있다. 그 숫자는 1953년부터 작년까지 무려 17만명에 이른다. 국가는 수많은 해외입양인들과 친생부모들이 겪은 크나큰 고통에 사죄하고, 여성과 아동의 실질적인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차별적이고 부조리한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재하는 인간적 고통을 경감하려는 노력은커녕, 출생미등록 문제 해결의 대안이 될 수 없는 보호출산제를 통해 이제는 국가가 ‘합법적으로’ 개입하여 아이의 유기를 보조하고, 한 사람의 역사성과 정체성을 알 권리를 훼손하는 주체가 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반인도적 대처이다.
보호출산제는 친생부모의 익명성과 아동의 출생의 비밀을 보장하면서 아동의 생명을 보호해준다고하지만, 몰래 낳는 것으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위기에 내몰려 중요한 삶의 결정을 하기전에 임신을 한 시점에 누구나 포괄적인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안전하고 통합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고, 아동이 자신의 정체성을 알 권리와 친생부모와 함께 살 권리를 보장하는 사회적 보호제도를 만드는 것이 국가가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이다.
3.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에 대하여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지명된 후 지금까지 나날이 새로운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공직자윤리법을 위반한 사실들을 비롯하여, 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을 부정하는 취지의 발언과 여성의 인권을 폄하하고 다문화가정 아동을 차별적 용어로 지칭하는 등 여가부 장관 후보자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매우 부적절한 인식이 드러났다. 게다가 장관 후보자로서의 잘못된 언행에 대한 반성과 교정의 자세도 보이지 않고 있다. 자신의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여러 불법적인 방법으로 주식거래와 회사 운영에 관여했고, 그 자신이 해왔던 ‘위키트리’는 가짜뉴스의 진원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주동안 제기된 의혹과 그에 대한 소명태도에 이미 여성가족부 장관으로서 자격이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스스로 사퇴하는 것으로 후보자의 마지막 소임을 삼길 바란다.
2023년 9월 28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권실현을위한행동하는간호사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건강권 실현을 위한 행동하는 간호사회, 건강사회를 위한 약사회, 건강세상네트워크, 노동당, 녹색당, 변화를만드는미혼모단체 인트리,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사회주의를향한전진, 사회진보연대, 서울여성회,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시민건강연구소, 여성환경연대,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플랫폼C,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홈리스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