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림터
  • 울림
  • 울림
  • 열림터
  • ENGLISH

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후기] 이 시기를 경과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질문과 고민을 남겨두자! - 페미니즘 정치특강 이후
  • 2024-02-29
  • 660

[후기] 이 시기를 경과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질문과 고민을 남겨두자!

- 2024 총선 대응 기획 첫 번째, <페미니즘 정치 특강: 윤석열 정부 이후 젠더 정세>


활동가로서 부끄러운 말이지만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른다. 정치 뉴스들은 죄다 진절머리 나고 절망적이어서 굳이 찾아보지 않는다. 아침나눔 시간 때에 듣는 소식들이나, 동료들이 단체 메신저에 올려주는 기사들로 겨우 따라가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런 나에게도 배복주 의원, 류호정 의원의 연이은 정의당 탈당과 개혁신당으로의 입당 소식은 충격이었다. 황망할 때는(정말 농담이 아니고) 팟캐스트 앱을 켜서 월간 오디오 매거진 <정희진의 공부>를 듣는다. 절망적인 상황을 새로운 관점과 힘 있는 말(그리고 기습적인 웃음)로 돌파해 내는 정희진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다가도 결연해지면서 마음을 다잡게 되는 것이다. 토요일 오후 2시 황금 같은 시간에 강의를 들으러 전국 각지에서 96명이나 모인 건 다들 이 황망한 현실에 대한 정희진의 어떤 말이라도 필요해서이지 않았을까.




강연 사전부스에 마련된 '정희진의 말' 샤워 부스


강의는 로즈 마리 라그라브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했다. 


“페미니스트가 되는 것은 빈민가에, 국가에, 혹은 옆집에 사는 여성들의 착취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자신이 투쟁할 것임을 안다는 뜻이다. 
즉 영원히 투쟁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드릴지 모르겠다며, 현실을 직면하자는 의미에서 가져왔다는 인용구는 페미니스트는 ‘되는’ 것이며, 영원히 투쟁할 준비가 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그걸 안다면 페미니스트라 말하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다. 


맨 처음 강의 섭외 과정에서 총선 정세에 관해서 이야기를 해달라고 해서 몇 번을 고사했다는 정희진 샘. 그런데 그냥 선생님 하던 이야기를 하라고 해서 뻔뻔하게 나왔다는 정희진 샘. 섭외자 동은 활동가가 보낸 메일 중 “총선 분석보다는 이 시기를 경과하는 페미니스트로서 질문과 고민을 남겨두자.”라는 부분을 두 번 강조하며 읽었다. 





현장 체크인 모습. '지구 망함'을 함께 예견하는 참여자들


이 시기란 어떤 시기인가. 오매 활동가의 말을 빌리자면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박원순 전 서울시장 위력 성폭력 사건 이후에 오세훈 서울시장,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고, 더불어민주당은 국민의힘의 반대급부에서 반대하기에 급급하고, 그 안에 있는 여성의원들은 발언권을 상실하고 있는 상황. 더불어민주당이 당내 위력성폭력에 대해 사과하고 성찰하라고 했던 여성의원들(신지예, 류호정, 배복주)이 다 국민의힘, 개혁신당에 직접 합류하거나, 합류에 동의하는 방식으로 정당 정치에서 느끼는 고립감과 좌절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선택한 상황이다.



사실 총선은 범야권이 모두 분열된 상황에서 국민의힘의 압승이 예상되고 있다.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인 행동 지침은 비례대표제 선거에서 위성정당이 아니라 비례대표 정당에 투표하는 것이라고 한다. 지역구에서는 표가 분산되지 않게 하지만 비례대표 정당에는 녹색정의당(이렇게 직접적으로 표기해도 되나?)에 투표하는 것이다. 3% 득표율을 채우지 못하면 빚을 진다고 하니 소수 정당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투표를 잘해야겠다.




따스하고, 집중하는 강연장의 분위기


이준석 대표에 대한 평가도 이어졌다. 이준석 대표나 한국 정치가 젠더 이슈에 대해 전혀 모르고 관심이 없으면서도 표가 되기 때문에 이를 이용하는 문제에 대해 젠더 문해력 이전에 젠더의 인식론적 지위를 높이는 것이 과제라고 진단했다. 여성학 공부를 하고, 여성주의 언어를 생산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에 페미니즘이 대중화되면서 페미니즘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공부를 안 해도 된다는 인식이 파다해졌다며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미니즘은 정체성의 정치에서 출발하지만, 여성들 사이에도 경험, 계급, 나이, 빈부, 외모 등등 너무나 많은 차이가 존재한다. 서로 간의 차이를 발견하며 겪는 페미니즘의 위기는 오히려 굉장히 발전적인 일이다. 이를 통해 여성 정체성의 정치를 넘어서 보편적인 사례 정의로 연대를 해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의 의회 진출은 성공했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는 왜 답답한가? 그 배경을 한번 살펴보면, 한국에서 여성주의는 기본적으로 ‘여성도 공적 영역에 진출해야 한다’는 자유주의였기 때문이라고 정희진 선생님은 말한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여성의 지위를 높이지 않았다. 오히려 여성들이 집안에서도 바깥에서도 일하는 이중노동을 의미했다. 여성의 의회 진출 또한 실패했다. 국회로 간 여성단체 활동가들 모두 다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현 상황을 보면 도대체 그들이 왜 국회로 갔는지 근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여성들이 국회로 가서 여성주의를 펼치는 게 아니라 남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방패막이가 된다면 여성들이 의회에 왜 진출해야 하는가?” 


이 밖에도 여성가족부 ‘문제’, 식민지 발전주의 콤플렉스와 기후 위기, 북한 문제 그리고 최근 핫한 사상검증 서바이벌 속 <페미니즘 대 이퀄리즘>의 구도까지 망라한 이번 강의는 너무 알찼다. 뒤 내용이 더 궁금하신 분들은 정희진의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을 읽어보시길 권한다.

(정희진 선생님은 주로 메일로 소통을 많이 하신다고 한다. 독자들이 보낸 메일에 답변을 다 하신다고 하니 궁금한 점이 있다면 정희진 선생님께 직접 메일을 보내보는 것도 좋겠다. 엄청난 공부가 될 것이다.)






(부산대 맞춤법/문법 검사기 가 물음표 친 '이퀄리즘'. 그래! '이퀄리즘' ??? )


정희진은 말했다. “지금은 ‘나’를 지키고, 보호하고, 주변을 챙기고, 버티는 것이 운동이다. 기대와 욕심을 버리고 소비를 최소화하고, 일상을 살리는 자기 공부와 안목 있는 독자로 사는 것. 여성운동은 일상의 운동이고 그렇게 거창하지 않다.”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기운을 어디에 쓸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타인과 불필요한 논쟁을 하지 말고, 자기 자신과 대화하라는 말로 강연은 마무리됐다.


"인간의 인식 과정은 기본적으로 '희망'"


우리는 이 시기를 경과하는 페미니스트로서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총선은 국민의힘의 압승이 예상되고, 지구는 망했고, 앞으로 30년 이상 한반도는 전쟁보다 더한 상황이 닥친다는데. 인간의 인식 과정은 기본적으로 ‘희망’ 지향이라는, 현실을 직면하지 못한다는 쓰라린 진실이 우리에게 차라리 희망일까? 강의가 끝나고 각자 돌아간 삶의 자리에서 영원한 투쟁을 준비하게 될 우리에게 여전히 질문과 고민이 남아있다.



우리에게 남은 질문과 고민을 나누는 참여자들의 모습

- 이 글은 부설 쉼터 열림터 활동가 상아가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