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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제도 변화

성폭력 및 여성 인권 관련 법과 제도를 감시하고 성평등한 사회를 위한 법 제·개정 운동을 소개합니다.
2024 총선대응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릴레이 ‘정치 에세이’ 세번째
  • 2024-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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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정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선거를 앞두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올린 우리가 바라는 가치, 정책, 정치에 대한 글입니다. 


💥’정상’에서 벗어난 몸과 마음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


물음표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나는 감각이 예민해서 브래지어를 차고 버티지 못한다. 누군가가 갈비뼈를 끈으로 묶고 숨통을 막아버리는 느낌이 든다. 억지로 차고 버티면 고통스럽다 못해 감각이 멍해진다. 다른 일에는 아예 손을 대지 못한다. 경험상으로는 6시간 정도 버티면 고통이 감각의 역치를 넘어가서인지 감각이 무뎌진다. 고통이 좀 덜해졌나 싶으면 이미 탈진해있다. 브래지어를 찰 때마다 이 고통을 반복해서 겪어야 했다. 적응할 수 있다고 설득당해본 기억은 있지만 실제로 적응한 기억은 없다.


브라 때문에 버티기 힘들다고 주변에 말해봐도 돌아오는 건 내가 실행할 수 없는 충고 뿐이었다. 자주 차고 다녀서 적응하면 편해진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브라를 차고 자보기도 했고 억지로 버티려고도 해봤지만 몇 년이 지나도 편해지지 않았다. 편한 브라를 찾으면 된다는 말도 들어봤다. 그런데 아무리 종류를 바꿔봐도 등 뒤에 무언가 닿는 느낌만 들면 끔찍한 감각이 되살아났다. 나를 키운 여성 양육자는 내가 황금 가슴이라도 가진 것처럼 유난을 떤다고 했다.



브라와 자폐차별,성차별. ⓒ필자 제공


유난이 아니었다. 나는 자폐인이다. 공식적인 진단을 받을 기회도 없었고, 장애인 등록은 언감생심이었다. 하지만 내 삶은 자폐인 여성의 삶이다. 자폐인인 줄 몰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수적인 지역에서 여자중학교를 나왔다. 알지도 못했던 장애 때문에 학교폭력에 시달렸던 초등학교 때보다는 낫다고 생각했지만, 성차별적인 학칙과 나의 자폐 특성이 맞물리면서 당시에는 설명할 말조차 찾을 수 없던 피해를 봤다. 학교는 학생들의 속옷까지 통제했다. 눈에 띄지 않는 색깔의 브라에 끈 자국을 가릴 단정한 흰색 속옷을 요구했다. 어떤 학생은 무늬가 있는 브라를 입고 등교했다고 벌점을 받았다. 여자는 아이를 낳지 않으면 병에 걸리는 몸이라고 대놓고 말하던 선생님도 있었다. 2010년대에 일어난 일이다.


어릴 때는 브라를 차지 않아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교복을 입어야 하는 중학교에서는 확실히 티가 났다. 특히 하복. 아까 언급했던 선생님이 내가 브라를 차지 않는다는 걸 눈치채고는 나를 따로 불러서 윽박질렀다. 뭐라고 말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말을 해도 내가 안 듣는다면서 ‘인성생활부’에 넘기겠다는 취지였다. 실제로 인성생활부장 선생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학교에서 배려할 만큼 배려해 줬는데 내가 기본을 안 지킨다고 따뜻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씀하시더라. 나중에는 아예 담임 선생님이 다른 학생을 시켜서 내가 브라를 차고 다니는지 감시하게 만들었다. 여자인 네가 브라를 차지 않고 유두를 드러내는 행동은 ‘시각적 성추행’이라는 소리도 몇 번 들었다.


여기서 ‘인성생활부’와 ‘시각적 성추행'이라는 말에 주목해 보자. 인성생활부는 잘못을 저지른 학생들을 징계하는 부서다. 성추행은 범죄다. 나는 자폐 특성상 브라를 차고 버틸 수 없는데, 학교는 내가 브라를 차고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로 징계 절차를 밟았다. 자폐 특성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범죄자나 다름없는 취급을 당했다. 유두가 교복 밖으로 드러나면 다른 학생들이 나를 피했다. 교복을 입고 있기 힘들어서 체육복 차림으로 최대한 오래 버티려고 했는데, 교복을 제대로 안 입고 다닌다며 교실에서 큰 소리로 모욕을 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그때는 내가 장애인인 줄도 몰랐고, 장애의 특성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 길이 없었다. 내가 무슨 일을 당하고 있는지, 왜 당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로 경멸과 혐오를 받아내야 했다.


그 뒤로도 몇 년간 고생하다가 괴물 취급당하지 않을 방법을 간신히 찾아냈다. 등에 달라붙는 고무줄이 없는 큰 캐미솔을 산 다음 브라 컵을 바느질해서 나만의 속옷을 조립(?)했다. 그 위에 큰 티셔츠를 입고 다녔다. 한동안은 그 방법으로 효과를 봤다. 그런데 『합정과 망원 사이』라는 책을 읽다가 생각이 바뀌었다. 유이영 작가는 브라를 처음 차던 날의 모욕감과 모멸감을 기억한다고 말했다. 작가도 나처럼 신경다양인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라 때문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웠던 사람이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날 오후에 캐미솔을 입지 않고 밖에 나가봤다. 내가 만든 캐미솔은 브라처럼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차별적인 압박과 타협하고 싶지 않아서 용기를 냈다. 


부정하고 싶었지만 유두를 가리지 않으면 불안해서 밖에 나갈 수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어떻게든 유두를 가리지 않으면 보복당할 것 같았다. 누가 나한테 보복을 가할지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끔찍한 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결국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갔다. 성차별적이고 장애차별적인 요구에 습관적으로 타협하게 된 나 자신을 보고 자괴감이 들었다. 



'콩깍지 프로젝트'에서 함께 만든 페미, 가치, 정치 콩 중 내가 붙잡고 싶은 가치 카드. ⓒ필자 제공


어렸을 때 읽어본 조선시대 때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떤 양반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딸은 방 밖으로 같이 나갈 남자 하인이 없어서 방에 그대로 있다가 불에 타죽었다는 내용이었다. 예전에는 이상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내 몸을 해쳐가며 사회적 여성성을 갖추라는 요구에 반사적으로 순응하게 된 나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소름끼쳤다. 실제로 나에게도 유두를 가릴 만한 옷이 없어서 밖에 나가지 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해외에서 지낼 기회를 잡아서 자유롭게 브라 없이 유두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여러 명 보고 나서야 유두를 가려야 한다는 압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 계속 있었으면 절대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귀국하자마자 또 유두를 가려야 할지 말아야 할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하면서 잊고 있었던 이 고민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내가 숨기려고 전전긍긍했던 건 유두 뿐만이 아니다. 나는 말이 안 되는 일을 보면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성격이지만 (자폐 특성이다) 차별당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을 끊임없이 억누르면서 살아야 했다. 자폐 특성을 보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어도 보복이 두려워 항의하려다 망설이고, 면접을 보러 가면 탈락하기 싫어서 신경전형인 흉내를 낸다. 신경전형인들의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 입을 막는 가면을 쓰고 버티는 법을 억지로 배웠다. 미등록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차별을 당해도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어 더 몸을 사려야 한다. 최근에는 무상 생리대 자판기 위치를 실시간으로 공유하는 온라인 지도를 만들자는 정책을 제안했는데, 무상 생리대라는 단어만 보고 페미니스트라면서 공격하는 사람이 나올까 봐 두려워서 공개적인 플랫폼에 제안서를 등록하기까지 오랫동안 망설였다.


장애가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부당한 요구를 받아주고 싶지 않다.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을 들킬까 봐 내 경험과 생각을 숨기고 싶지 않다. 평생 이런 차별을 견디면서 살고 싶지 않다. 부당한 걸 못 참는 성격 때문에 끊임없이 배척당했고, 앞으로도 배척당할 일이 많겠지만 굴하지 않고 목소리를 낼 힘을 기르고 싶다.


말도 안 되는 차별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더 나은 세상을 적극적으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내 모습을 숨기느라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정상'에서 벗어난 몸과 마음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내 목소리가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위 글은 여성신문에 ‘4·10 페미니스트가 꿈꾸는 세상’이라는 연재명으로 동시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