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상담소 소식
[소모임후기] <육식의 성정치> 읽기를 마치며
소모임 소식을 접했을 때 반가움이 앞서긴 했지만 걱정거리도 있었습니다.
육식을 좋아하는 내가 그곳에 가서 핀잔을 듣거나 민망한 상황이 발생하진 않을까?
고대하던 소모임의 선정된 책이 육식의 성정치라니..(대체 누가 고른거지?라는 의문이 지금은 감사함으로 바뀌었지만)
특히 서문의 생소함과 난해함 때문에 진도를 따라갈 수나 있을지 막막했습니다.
그래서 혼자였으면 어려웠을 이 한권을 무사히 다 읽어냈을 때는 뿌듯하기까지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에서 언급된 텍스트의 힘이 저에게도 작용하다니!!
저와 비슷한 육식가들과 식사를 할때에는 모임을 소개하고 홍보하며 가급적 채식에 가까운 메뉴를 고르려고 노력을 하게 되더군요.
소모임 마지막 날은 상담소 인근의 채식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했었는데 자연식 케이크도 너무 맛나게 먹었습니다. 그래서 서점에 가면 채식 요리법에도 눈길이 가게 됩니다.
최근 소모임이 끝나고 모임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는 허전함도 달래고 신선한 채식도 접해보고자 서울과 안양의 식당을 찾았습니다. 비채식인과 동행을 했었는데 반응이 꽤 괜찮아서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채식문화 확산을 위해서 제작된 비건 할인쿠폰을 사용하는 즐거움도 있었구요^^ 저의 올해 목표는 쿠폰북에 있는 식당들을 탐방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직은 육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분명 육식을 보면 이전과는 다른 감정들을 느끼고 있는 과도기인 듯 합니다. 이러한 변화가 지속될 수 있는힘은 역시 소모임의 역할이 컸습니다. 단순히 책 한권을 마친 것이 아니라 행동의 변화에도 동참하도록 이끌어주었으니까요. 저의 육식 고백에도 따뜻하게 맞아준 구성원들에게 고맙다는 말 전합니다.
- 지은
고기, 정확히 말하면 땅에서 자라나 고기된 동물을 먹지 않아 본 지 6개월이 지나 7개월 째가 되었다. 내가 쓸어먹어 빈그릇으로 깔끔히 마무리하던 그 식탁들은 찌개에서, 반찬에서, 불판에서 그 고기들을 남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은 나 때문에 다른 메뉴를 골랐고, 약속을 잡는 사람들은 고기 아닌 맛있는 메뉴와 식당의 존재를 확인했으며, 동료들과 공식 행사에서는 비육식 버전의 간식과 식사들이 추가되었다.
나의 비육식은 <육식의 성정치> 이 책을 상담소 회원소모임에서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였는데, 왜냐하면 내 입맛과 혀에 달라붙어 있어 한번도 의심이 대상이 되지 않았던 고기를 탈부착이 가능한 상태로 만들고 난 후에 책을 읽어나가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질문이 많을 것이고, 그건 정확히 나에게도 질문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입맛’과 ‘식욕’은 감각이기도 하지만 생각이기도 하고, 먹는다는 행위가 등장하는 온갖 문화적 양식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서 배치된 의도적인 선택과 행동이었다는 점을 알아가는 동안, 다른 의도적인 선택들은 또 다른 나를 구성해가고 있다.
<육식의 성정치>는 고기를 먹는 문화, 고기를 먹는 것을 장려하고 자연화하는 지지체계, 고기를 먹기 위해 이루어지는 많은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단계들을 분석하며 이것이 가부장제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밝히고 있다.
페미니즘 신학을 공부하던 이 책의 저자 캐럴 J 아담스는, 래드클리스대학 슐레징어 여성사 도서관에서 20세기 초 페미니스트 채식주의자의 원고들을 열람했고, 채식주의자 집단의 일원이었던 페미니스트 40명과 인터뷰하여 쓴 논문을 「계간 아마존」과 「레즈비언 리더」라는 논문선집에 75년 처음 싣고 이듬해 「음식 컴플렉스」라는 책으로 발간한다.
반 여성폭력 활동가로 살다가 87년, 마가렛 호만스가 쓴 『여성, 단어를 낳다』(1986)를 읽다가 ‘부재 지시대상 absent referent'라는 개념을 발견하고 여러 생각들이 다시 꿰어진 후 2년 후 책을 완성하게 되었다. 처음 페미니즘과 채식의 관계에 관심을 갖게 된 지 15년만이었다.
‘부재지시대상’은 이 책에 자주 등장하는 개념이다. 분명 존재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게 하는 대상, 대상으로만 존재하게 만들어 때로는 이렇게 은유했다가 저렇게 삭제하는 대상, 다른 존재와의 상관관계 및 연결고리가 부정되는 대상. 그 목소리가 변형되거나 왜곡되는 대상. 그 목소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은 공격받고 비난받는 대상.
부재지시대상이 된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마음 편히 훼손하거나 이용하는 일에 동참하게 되고, 그 존재와 연결되거나 연대하는 일을 회피하게 되고, 부재지시대상 사이에서도 위계, 서열이 생기며 당연히 더 낮은 계급을 분리시키고자 한다. 체계화된 억압의 구조에서 층층이 살아가는 존재의 형태이자 양식인 셈. 저자는 이런 문장들을 썼다.
“가부장제 문화에서 부재지시대상의 구조[동물 이미지]는 항상 다른 억압되는 집단[여성]을 연상시키면서 각각의 다양한 억압들을 강화한다”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에는 동물을 대신도살하는 소외된 노동을 대신 수행하는 대리인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신은 대신 돼지를 잡아줄 사람을 고용할 것이다”
(85~88p)
“또한 우리는 동물이 처한 현실을 왜곡하는 은유들 또는 직접적인 비유들을 사용하면서 우리 자신과 동물을 구별한다.”
"동물은 부재지시대상이기 때문에 우리는 고기를 먹으면서 “지금 나는 고기와 상호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육식을 동물과 접촉하는 것이 아닌 단지 음식과 접촉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분리, 은폐, 잘못된 설명, 그리고 비난을 교묘히 피한 뒤 부재 지시대상의 구조는 지배적인 것이 된다”
(126~131p)
나는 여전히 육식을 하는 친구, 동료들과 있을 때 부재하던 대상을 존재로 다시 생각나게 상상되게,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에서 부딪혔다.
“이게 고기가 아니라 동물이야” “말하지마!”
“이것은 살아움직이던 남의 살이야” “안들려 안들을 거야”
“동물이 고기가 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성폭력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을까” “제발 내가 모르게 해줘”
나는 여전히 물고기를, 우유를, 달걀을, 순대를, 만두를 먹던 나와 때로는 부딪혔고, 때로는 넘어갔다.
“순대는 어쩔 수 없어” “만두는 최애잖아” “생선은 먹어야지 나도”
그러던 어느날 서울 빼끄럼한 분식집이 아닌 시골 장터에서 순대를 먹다가, 이것이 얼마나 야성적인 육식 메뉴인지 깨달았다. 오랫동안 해오던 외면과 부정에 종지부를 찍게 된 날이었다. 서울 마트에서 작은 스티로폼에 소량 팔던 회가 아니라, 커다랗고 생생했던 물가 식당에서 회를 먹기로 했을 때 수족관에서 꺼내진 물고기 머리에 망치가 내려 쳐지던 장면을 보았다.
페미니스트로서 육식문화를 바라보고, 비육식을 일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나누던 온갖 수다는 이제까지 거의 한번도 말해보지 않았던 내용들이었다. 동물이 들어가지 않은 만두, 동물이 들어가지 않는 햄버거를 만드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여성’이 육식문화의 한복판에 있을 때와 비육식의 한복판에 가려고 할 때 각각 어떤 비난과 질문에 놓이는지도 폭풍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자기 일상을 내놓고 탈탈 털고 헤쳐보았고, 다시 배열해보며 깨달음과 발견을 쌓아갔다.
억압이 연결되어 있고, 억압은 위계화된다는 말을 마음에 품고 만나는 여성운동가들의, 페미니스트들의 어떤 일상의 장면은 따끔따끔하다. 내가 인정하거나 이해하거나 겪은 폭력은 부정의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지만, 누군가 문제제기하는 다른 억압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가 아니라 ‘그건 오바 아니냐?’고 묻게 되는 감각은 어떻게 생겨날까. 내가 어떤 폭력의 구조에 대해서는 ‘가해자’일 수 있다는 자각 앞에 선 저항일 수도 있고, 거대한 억압들이 연결되어 있는 세계를 알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일 수도 있을 것이다. 미러링이 필요했던 메갈리아의 저항처럼 육식에 저항하는 활동가들은 접시에 놓인 인간, 그 위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든 돼지들을 그려내고 있다.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지향하는 것이 폭력으로부터 빠져나와 ‘정상화’되는 것, ‘정상성’과 ‘권력’을 되찾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폭력의 기제를 알게 된 약자들이 연대를 일구어가는 것, 힘의 다른 배치와 질서를 꿈꾸는 것이라면 여성폭력과 육식주의, 그리고 또 다른 억압들, 그리고 그것의 연결들을 묵상하는 할 일은 깊고 넓다. 억압과 폭력은 일부 미친 가해자들 때문이 아니라 나 역시 놓이게 되는 구조 속의 행동기제에 녹아있다는 걸 다시 살피는 일을, 입맛이라는 나에게 부착된 욕망의 감각으로부터 매순간 시작할 수 있다니, 얼마나 어렵고도 쉬운 일인가. 젓가락을 집어드는 손을 침을 고으고 벌리는 내 입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명확하고도 복잡한 일인가. 내가 연루되어 있는 폭력의 입체에 대해 사유하게 된다니, 얼마나 멀고도 가까운 일인가.
- 오매
언젠가 친구가 비건 페미니스트가 뭐냐고 물었다.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우는 것과 우유, 달걀을 먹지 않는 것이 대체 무슨 상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했다. 대답을 하려다 턱, 막혔. 페스코로 산지 칠 년차에 자타공인 페미니스트였지만 비건 페미니스트라는 단어는 처음 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용어를 설명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육식의 성정치>소모임에 들어갔다. 육식문화와 여성주의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했다. ‘나는 채식을 하는 페미니스트인데, 비건 페미니스트는 뭐지?’ ‘나는 스스로를 누구로 정의하는가?’하는 물음에 답하고 싶었다.
책은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웠다. 사실 아직도 나는 ‘부재지시대상’이라는 말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한다. 그래도 이제는 안다. ‘저 여자 맛있겠네.’가 여성을 고깃덩어리에 비유하는 것임을, 인간이 고기를 먹듯이 남성이 여성을 먹어치우는 상황을 상정하고 있음을 안다. 여성을 지배하고 억압하는 구조에서 여성이 주체가 아닌 욕망의 대상으로 취급받는 상황은 육식문화에서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 고기로 변화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존재가 존재가 아닌 대상으로 인식되는 상황. 억압의 체계는 어찌도 그리 유사한 것인가. 내가 겪는 억압이 전혀 동떨어진 것 같은 존재의 억압과 결국 맞닿아있다는 사실이 다시금 와 닿았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너의 이야기이고, 너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이도 하다. 너와 내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는 서로의 차별에 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을 책을 읽는 내내 떠올렸다.
또 나는 안다. ‘초식남, 육식녀’라는 신조어의 전제는 여성은 식물처럼 수동적이며 남성은 능동적이라는 사회적 인식임을. 여성주의 은유에서 식물이 그렇게나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사실을 왜 이전에는 미처 몰랐을까? ‘장님 3년, 귀머거리 삼년, 벙어리 삼년’, ‘그저 꾹 참는 게 제일이다’...... 여성에게 전해지는 조언들은 어쩜 그렇게 하나같이 식물적이었는지. 그러니까 여성은 육식이 지배적인 문화에서 식물이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듯이 남성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온갖 부정적인 함의를 주렁주렁 달고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니 여성이 식물을 먹는 일은 고기를 먹는 일보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비록 은유일지라도.
읽으면 읽을수록,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비건과 페미니스트라는 집합이 비건페미니스트로 수렴되는 일이 지극히도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긴 시간 비건을 지향하고 페미니스트로 살아왔으면서도 둘을 연결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스스로의 둔감함이 놀라웠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른바 동물성 단백질, ‘고기’의 생산은 암컷에 대부분 의존한다. 끊임없이 알을 낳다가 폐기처분되는 암탉, 평생을 임신한 채로 지내면서 우유를 뽑아내야 하는 암소....... 공장식 축산에 기반을 둔 현대의 육식은 지극히도 여성화되어있으며 암컷을 억압하는 구조다. 단순히 종이 다르다는 이유로 암컷이 겪고 있는 고통을 나와 별개로 치부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살고 싶은가? 대답은 늘 ‘아니’였다.
여성의 입장에서 채식을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책이 끝난 후 나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채식의 체계는 누가 만든 것일까. 고통을 덜 야기하는, 그리고 생명력을 덜 지니고 있는 순서로 구성되어있는 채식의 단계에는 성(性)이 없다. 먹는 쪽과 먹히는 쪽의 성별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로 여겨져 대부분의 채식 논의에서 거론되지도 않는다. 마치 모든 세상의 논의에서 성(性)이 주변적인 일로 취급받아왔듯이. 하지만 채식은 성 중립적이지 않다. 다만 성을 배제해왔을 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고민을 시작했다. 여성의 채식은 남성의 채식과 어떻게 다른지를, 나는 왜 채식을 하며,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내 삶의 전반과 채식이 어떤 연관성을 지니기를 원하는지를. 내 선택과 삶의 단면이 켜켜이 쌓이는 기록저장소인 내 몸이 어떠하기를 바라는지를.
책을 덮고도 삶은 이어진다. 소모임을 시작하기 전에 품었던 두 가지의 질문이 실은 하나였음을, 깨닫는다. 하나의 질문은 다시 다른 질문으로 이어진다. ‘나는 스스로 어떻게 정체화하는가.’ 소모임이 끝난 후의 일상은 그 질문에 답을 해나가는 과정일 테다.
- 은아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이유에는 크게 3가지로 건강상의 이유, 종교적인 이유, 윤리적인 이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건강과 종교적인 이유는 비교적 우리문화에 익숙한 반면 윤리적인 이유의 채식은 낯설고 조금 유별난, 까다로운 것으로 여겨진다. 책 소모임을 하기 전까지 나 역시 채식에 대한 편협한 생각의 소유자였음을 고백한다. 막연히 채식을 하면 ‘다이어트 측면에서 몸에 좋지만 영양상 부족하지 않을까’라는 생각과 채식하는 사람과 식사를 하게 됐을 때 ‘그냥 좀 적당히 맞춰서 먹지’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여기서 ‘적당히’, ‘맞춰서’ 라는 생각이 나와 다른 행위와 선택을 하는 사람에 대한, 즉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었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다시 말해 식사행위가 단지 개인의 취향의 문제가 아닌 동물복지에 대한 행위의 실천이자 가치관의 반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연결고리에 대해 그동안 성찰하지 못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육식문화가 얼마나 강력하고 지배적인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책의 저자, 캐롤 아담스는 우리의 언어, 텍스트, 신체, 삽화 등 문화 곳곳에서 육식문화의 만연한 사회구조와 그 과정에서 여성의 대상화, 폭력성, 야만성에 대해 잘 보여준다. 그 구조 속에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고 가담하게 함으로써 동물을 소비하는 방식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과 유사하고, 곧 성차별의 문제와 육식의 문제가 서로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육식이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이라는 메시지는 조금 황당하거나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저자의 20년이라는 방대한 결과물을 들여다보면 그 노력과 세월에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소모임 멤버들은 저마다의 사연으로 이미 채식주의자가 됐거나 책을 통해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채식하는 과정에서 부딪히는 차가운 시선과 가족, 친구, 연인사이에서 일어난 갈등과 차별에 대해 유쾌하게 나누어 주고, 6개월의 긴 여정 동안 함께 공감해준 멤버들에게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채식주의자뿐만 아니라 지배문화의 권력과 억압에 맞서 일상에서 매일 투쟁을 하고 있는 수많은 그대들에게 응원을 보낸다.
- 경주
육식의 성정치 페미니즘과 채식주의 역사의 재구성
10주년 기념판 서문|서문|감사의 말
1부 고기의 가부장제적 텍스트들
1장 육식의 성정치
2장 동물 성폭행, 여성 도살
3장 은폐된 폭력, 침묵의 목소리
4장 말이 살이 되어
2부 제우스의 복부에서
5장 해체된 텍스트들, 분해된 동물들
6장 프랑켄슈타인이 창조한 채식주의자 괴물
7장 페미니즘, 1차 대전, 그리고 현재의 채식주의
3부 쌀을 먹는 것이 여성을 믿는 것
8장 채식주의 신체에 대한 왜곡
9장 페미니스트-채식주의자 비판 이론을 위해
에필로그: 가부장제 소비문화 뒤흔들기
<육식의성정치> 읽기모임 회원들이 꼽아본 채식인들이 가기 좋은 곳들
식당
2호점 플랜트(이태원) 맛 ★★★★★ 건강 ★★★
쿡앤북(합정) 맛 ★★★★, 건강 ★★★★
수카라(홍대) 맛 ★★★★ 건강 ★★★★★
로우베가(신촌) 맛 ★★★★ 건강 ★★★★★
오세계향(인사동) 맛 ★★★★ 건강 ★★★
앙프랑뜨 비스트로 프랑스 파인더이닝 맛 ★★★★ 건강 ★★★★
린이 파티 맛 ★★★★★ 건강 ★★★★
헬스테이블(성수동) 맛 ★★★★ 건강 ★★★★★
베이커리
보난자 베이커리(성수동) 맛 ★★★★★ 건강 ★★★★
카페어니스타(연남) 베이커리(글루텐 프리, 슈거프리) 맛 ★★★★★ 건강 ★★★★★
야미요밀(합정) 베이커리(버거) 맛 ★★★★★ 건강 ★★★★
카페
두화당(효창공원) 맛 ★★★★★ 건강 ★★★★
더블하모니(합정) 쥬스! 맛 ★★★★★ 건강 ★★★★
반쥴(종로) 블랜팅 티 ★★★★★ 건강 ★★★★★
헤르만의 정원(서촌) 맛 ★★★★ 건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