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상담소 소식
<시끌시끌 상담소②>
상호돌봄의 디자인, 외주를 넘어 동등한 관계의 협업으로
산(회원홍보팀 활동가)
비영리단체의 외주란 넉넉지 않은 예산과 싸우는 일이기도 합니다.
많은 자본을 쓸 수 없는, 영리기업과는 완전히 다른,
비영리단체와 새롭게 일하는 방법을 제시해준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풍경>과 이야기 나눠보았습니다.
2022년 초, 한국성폭력상담소는 흥미로운 제안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오늘의 풍경’에서 조금은 특별한 협업을 함께 해보자는 것이었어요. 이름하여 ‘상호돌봄의 디자인’! 올해에는 적극적 합의 아카이브 웹페이지 제작으로 성문화운동팀과 합을 맞춰보았는데요. 새로운 경험과 관계 맺음에 상담소를 초대해준 ‘오늘의 풍경(이하 ’오풍‘)’의 인아, 희원을 모시고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산 반습니다. 먼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인아 저는 신인아이고, 디자인을 합니다. 간단한 설명으로는 돈을 많이 벌고 싶은 반자본주의자입니다. FDSC(페미니스트 디자인 소셜 클럽)의 운영진이고, 종종 디자인 수업을 열기도 합니다.
희원 저는 희원이라고 하고요. 오풍에서는 에디터 직무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협동조합을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서 현장 중심의 연구를 하기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활동가로도 일을 했던 적이 있어서 이런저런 경험들 속에서 텍스트를 가지고 하는 일을 합니다.
산 네, 반갑습니다. 저희 소식지를 읽는 회원님들에게 오풍이 올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협업이 뭔지 설명해주시겠어요?
희원 저희가 ‘상호돌봄의 디자인’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요. 보통 디자인 의뢰라 하면 디자이너에게 어떤 내용을 전달하고 구현된 어떤 모양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디자인이라는 게 사실 맥락이 중요해요. 어떤 것에서 시작했고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이해해야 목표 달성을 위해 디자이너가 자신이 가진 레퍼런스나 전문성을 바탕으로 의견을 내고 교류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런 부분을 고려하지 않으니 클라이언트와 갭도 많고 충돌도 생기는 거예요. 그래서 전체 프로젝트의 맥락 속에서 같이 참여하면서 디자인할 수 있게끔 해보면 어떨까, 질문을 던져보게 됐어요. 예를 들면, ‘웹자보가 필요하니까 이렇게 만들어주세요’하는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목표를 갖고 있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떤 기획을 한 거고, 그러면 그 과정에 디자이너가 함께 의견을 내고 교류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종류의 논의를 가능하게 하려면 프로젝트 사전부터 대화를 많이 하고 서로 모르는 부분을 인정하고 맞추는 시간, 그리고 향후의 일정이나 방향에서도 협의할 수 있는 시간이 있어야 해요. 이렇게 클라이언트와 디자이너가 서로의 의견에 의존하는 상호 디자인 협업 방식을 생각해보게 된 거예요. 근데 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으니 단체들에 ‘해보자!’고 제안해서 시도해보고 있는 것이 지금까지 진행된 이야기입니다.
산 필요성을 느끼고 그걸 실현한 게 참 멋지고 대단하네요. 무언가 필요하다 생각만 하는 것과 그걸 충족시키고자 실행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니까요. 처음 메일로 제안하셨을 때, ‘돌보는 디자인’이라는 문구가 있었던 기억이 나요. 설명에 따르면 서로 모른다는 걸 인정하고 사전에 대화를 많이 하고, 협의하는 과정에 필요한 발판을 함께 만들어 일하는 것인데, ‘돌봄’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인아 이전에 희원이 ‘돌보는 디자인’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어요. 디자인이 여러 인풋과 아웃풋이 있어야지만 진행될 수 있는 일인데, 단순히 디자이너가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떤 아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이 많은 것 같아요. 결과물을 만드는 것 이외에도 디자인에 필요한 소통, 준비물 만들기, 서류 작성 등 필수적인 업무가 많은데, 그것들이 디자이너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평가절하되어 있어요. 전에 다른 스튜디오에서 일했을 때 그런 일을 여성 디자이너들만 하는 걸 관찰한 적이 있고요. 디자인할 때 분명 필수적인 업무인데 이렇게 저평가되는 것이 돌봄노동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작업을 누군가에게 미루는 게 아니라 같이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고요. 그리고 클라이언트와 스튜디오의 관계로 넘어오면, 아무래도 제가 디자인 과정에 대해 더 잘 알기 때문에 리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과부하가 생기는 경우가 왕왕 있었어요. 매번 다른 클라이언트와 일을 하는데 다들 디자인 과정에 대한 이해도가 다르니까 받는 돈에 비해 훨씬 저를 착취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부분을 해소하고 싶기도 했어요. 그리고 그런 부분을 나누면 서로 이해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 그런 맥락에서 제안했던 것 같아요.
산 그렇군요. 지금까지 상호돌봄의 디자인을 해보면서, 이 ‘상호돌봄’이 어느 정도 실현이 되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어느 단계까지 간 것 같다거나.
희원 어느정도 ‘실현이 됐다’기 보다는, 이 원칙을 지키려 하면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 상황에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을 감추려는 방식이 아니라 같이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상담소랑 했던 협업에서, 사전에 논의가 되게 길었어요. 거의 여름까지 이 프로젝트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 계속 이야기를 주고받고, 서로 이해가 안 될 때는 새로운 방식으로 얘기하려 하고, 상담소 활동가분들이 프로젝트의 중간 결과물도 공유해주고. 아까 말씀드렸듯 프로젝트에 함께 개입하면서 할 수 있었어요. 근데 이게 1년 동안 진행되는 연간 사업의 틀 안에서 기간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것도 알게 되었고, 몰랐던 부분을 알게 되는 것 자체도 새로운 협업 과정의 일부인 것 같아요.
산 말씀을 듣고 나니, 상호돌봄의 디자인을 구상하고 나서 이 과정을 제안할 상대를 결정할 때 두 분이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아요. 꼭 한국성폭력상담소에만 한정하지 않고, 여성단체와 오풍의 협업이 어떤 의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인아 님은 FDSC의 구성원이시기도 하니,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갖고 활동하는 단체와의 협업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기대를 했는지 얘기해주세요.
인아 처음 제안할 때 꼭 여성단체여서 연락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비영리 단체로 넓게 생각하려고 했어요. 상호돌봄의 디자인이 어쨌든 상업 디자인에서는 떨어져 나와 다른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영리기업과 실험하는 건 맞지 않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이전에 같이 협업했던 비영리 단체 중에 제 제안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같이 만들어 나가는 것을 잘 해주셨던 곳을 위주로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중에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있었고요. 그리고 처음에 상호돌봄의 디자인을 제안할 때 가졌던 생각인데요, 어차피 비영리 단체는 저희에게 큰돈을 줄 수 없는 게 너무나 자명하잖아요. 그런데 영리 기업과 같은 프로세스로 일을 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이런 것을 탐구해보기에도 비영리 단체가 좋겠다는 생각이었고요. 그래서 초반에는 제안이 잘 받아들여지면 크라우드 펀딩 같은 형식으로 자금을 조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었어요. 여력이 안 되어 못 했는데, 실제로 이 협업을 해보니 시간을 진짜 넉넉히 잡아야겠더라고요. 처음에는 1년이 긴 시간이라고 느꼈는데, 지금은 그냥 얘기 정도만 할 수 있는 기간 같아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3월에 제안해서 4월, 5월부터 일을 시작했으니 1년이 채 되지도 않았고요.
산 장기적으로 지켜보고, 고쳐가고, 꾸려가는 프로젝트가 되겠군요.
인아 맞아요. 돈이 없으니 시간이라도 확보해야죠.
산 저희 팀은 아직 오풍과 함께 작업한 적이 없어서, 제가 사전에 성문화운동팀에 몇 가지 질문과 에피소드를 받았어요. 인상 깊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가져왔습니다. 처음에 웹페이지 내용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각자 생각하던 상이 달라서 갈피를 못 잡았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오풍에서 퍼소나 워크숍(Persona Workshop)을 제안해주셨고, 이후 ‘이지혜’라는 퍼소나를 통해 다른 홍보물이나 캠페인 기획까지 착착 진행할 수 있었다고요. 성문화운동팀에서는 이 워크숍이 프로젝트의 한 전환점이 된 것 같다고 얘기해주어서 인상 깊었는데, 퍼소나 워크숍은 어떤 건가요?
희원 보통 마케팅에서 많이 나오는 기법인데, 저희는 꼭 그렇게만은 생각하지 않고요. 어떤 서비스나 제품을 만들 때, 소비자층을 광범위하게 설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정말 이것을 쓸 것 같은 구체적인 인물을 정해보는 워크숍이에요. 적극적 합의라는 개념이 아주 오래된 개념은 아니고, 지금도 여러 가지 맥락이 겹치며 역동적으로 구성이 되고 있는 개념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이걸 전달하는 작업(웹페이지 제작)을 하려는데, 각자의 머릿속에 있는 ‘어떤 맥락으로 전달할 것인가’를 확인하기가 너무 어려운 거죠. 그렇다고 결과물 1안, 2안, 3안 계속 공유하고 수정하면 너무 힘든 일이 되는 거고요. 그래서 같이 합의하는 공통의 상이나 콘셉트를 먼저 정해야 할 것 같았어요. 그게 꼭 퍼소나일 필요는 없지만, 이번 프로젝트 같은 경우에는 우리가 어떤 인물을 생각하고 이걸 진행하는지 먼저 정하는 게 이어지는 작업에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퍼소나 워크숍을 통해 ‘우리가 누구에게 웹페이지를 전달하려고 하는 걸까?’라는 질문에 구체적인 인물을 만들어보기로 했죠. 이 인물은 연애, 섹슈얼리티와 관련해서 어떤 경험이 있는지, SNS는 뭘 쓸지, 이 사람의 욕구는 무엇이고 적극적 합의와 연결할 지점은 무엇일지 등을 정리했어요. 그전까지도 저희가 적극적 합의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고 읽고, 성문화운동팀에 이렇게 표현하면 될지 물어보고 피드백을 받고 그런 소통의 과정이 계속 있었는데요. 워크숍 과정에서 적극적 합의의 어떤 측면에 대해 성문화운동팀에서 무기, 자기계발서, 돋보기 등 풍성한 은유가 나왔고 저희도 이해가 잘 되어서, 그다음부터는 ‘그럼 이번에는 자기계발서 톤일까요?’ 같은 식으로 소통이 더 수월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날 워크숍이 정말 재밌었어요. 같이 인물을 상상하고 아이디어를 내고, 트위터 프로필은 뭘지 상상하고... 이런 것들을 나중에 하나의 문서로 정리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산 처음에는 적극적 합의에 대해 오풍에서도 자료를 찾아보면서 조금씩 이해를 맞추고 소통하다가, 퍼소나 워크숍을 통해서 그게 공통의 상으로 정립되게끔 크게 한 걸음 뗀 거네요.
희원 네.
산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저희 팀도 요즘 우리 상담소의 이미지와 톤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저도 한 번 알아봐야겠습니다. 마케팅 기법의 하나라고 하셨지요?
희원 네, 그쪽에서 많이 쓰기는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정책 만들 때도 많이 써요.
산 누군가의 관심을 끌어야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쓸 수 있군요.
희원 네. 예를 들면, 취약한 상황에 있는 사람을 구체적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더 와닿게 설명하고 싶은데 실제 당사자를 이용할 수는 없잖아요. 아무래도 개인정보나 인권 문제로요. 그럴 때, 자신이 만났던 다양한 사람과 경험을 가지고 하나의 가상 퍼소나를 만들고 활용하는 겁니다.
산 그러면 희원 님은 에디터로서 결과물의 풍성함을 위해 이런 여러 가지 기법을 평소에도 많이 찾아보시는 거예요?
희원 방법론은 필요하면 찾아보고요. 인아 씨는 어떤가요? 평소에 이 기법을 써야지 하면서 찾아보기도 하시나요?
인아 네! 저는 항상 공부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당연합니다(웃음)
산 자기계발, 저도 해야 하는데. 어렵죠(웃음) 다음 질문은 성문화운동팀의 질문인데요, 가볍게 생각해주세요. 오풍에게 적극적 합의는 어떤 의미인가, 무엇인가!
인아 적극적 합의란 존중이라고 생각합니다(웃음)
희원 음,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되게 귀한 경험이라고 느꼈어요. 작성하신 교안, 진행했던 워크숍 내용을 들으면서 와닿았던 게 있었는데요. 대뜸 섹슈얼리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가지고 하는 게임으로 어떻게 나의 경계를 표현하는지 연습해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적극적 합의가 그런 역량을 기르는 일이구나 생각이 들기도 해요. 정의는 못 내릴 것 같아요. 이 개념에 대해 애정이 많이 생겼어요. 그런 실천을 실제로 해볼 수 있는 교육 공간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는데요. 그와 동시에 법적, 사회적, 물리적인 다양한 영역에서 여성은 여전히 성폭력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한 상황인데, 적극적 합의가 얼마나 절실한 개념인지를 알고 그걸 연결한다는 점도 그렇고요. 그런데 이걸로 콘텐츠를 만드는 건 정말 너무 어렵고... 올해 써 본 모든 콘텐츠 중 가장 어려웠어요. 아직 이 개념에 대해 충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아서 더 그런 것 같아요. 지금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어디든 잘 쓰잖아요. 그게 꼭 좋지만은 않지만요. 하여튼 그것처럼 적극적 합의도 사람들이 조금만 알기 시작하고 겪어보면 더 쉬워질 것 같아요. 아직 그 감각이 없는 상태에서는 ‘적극적 합의란 적극적으로 합의하는 것입니다’를 넘어 말하기 어려울 수 있는 것을 알려야 하고.
산 공감해요. 개인적으로 적극적 합의라는 것이 결국 상대와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필요한 하나의 스킬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성과 관련되지 않은 부분에서는 상대의 의사를 물어보는 것이 너무 당연한데, 이걸 성에 적용해 풀어나가야 하니까요. 당연한 것을 설명하는 건 그것대로 사람들이 너무 뻔하다고 생각하고, 근데 성적으로 너와 내의 관계 내에서 설명하려면 그것 자체로 어려워지고. 그래서 웹페이지가 더 기대되기도 해요.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 볼게요. 성문화운동팀도 저도 오풍을 통해 퍼소나 워크숍이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상담소 활동가들이 오풍과의 협업을 통해 확실히 여러 성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새롭게 배우는 것도 있고, 새로운 혹은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보게 되기도 하고. 혹시 오풍은 상담소와 협업하면서 개인적이나 조직적으로 성장한 게 있을까요? 성장까지는 안 가더라도 이런 것은 좀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것이요.
인아 아까 여성단체의 의미를 물어보셨는데, 저는 사실 이 프로젝트를 하기 전에는 여성단체라면 다 비슷한 줄 알았어요. 다른 분야의 시민단체도 그냥 그렇게 묶어서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이번에 같이 일을 해보니까 단체마다 조직되어 있는 형태도 분위기도 일하는 방식도 다르더라고요. 그래서 이 일이 정형화할 수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단체와 했던 방식으로 다른 단체와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게 크고 막막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저의 어떤 큰 무기로 만들 수도 있겠더라고요. 이 프로젝트를 할 때, 성장하고 싶다기보다는 이게 될지 보고 싶었던 건데, 그 과정에서 ‘여기까지는 이렇구나’라는 걸 본 것 자체가 저한테는 엄청난 소득인 것 같아요. 더 말하려고 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산 천천히 생각하세요.
인아 말하다 생각난 게 있어서 이따 말해야지 하면 늘 이렇게 까먹게 돼요.
산 저도 그래요. 이따 생각나면 다시 얘기해주세요.
인아 네. 희원의 답을 들어볼까요?
희원 저도 성장이라기보다, 상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는 일의 방식인 것 같아요. 뭐라고 딱 설명하기 어렵네요. 성장한 게 없는 것은 아닌데. 음,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퍼소나 워크숍 같은 것도 제게는 당연한 프로세스 중 하나였는데, 같이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삼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더 잘 진행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든지. 그리고 활동가분들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도 도움이 돼요. 효능감을 느끼면서 일했어요. 초반에는 어느 영역까지 내가 개입하고 피드백해야 하는지 선을 정하는 게 어려웠는데, 여러 번 주고받고 맞춰가면서 감이 생겼어요.
산 인아 님은 혹시 생각이 났을까요?
인아 네, 생각이 났습니다. 제가 디자이너로서 큰 도전을 했다는 것을 방금 깨달았습니다! (웃음) 바로 웹디자인을 했다는 점인데요. 저는 원래 전문적으로 웹디자인을 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새로 배워가며 한 것이라서 제게도 엄청나게 큰 도전이었어요. 그래서 정말 간단한 걸 해내고도 매우 큰 성취감을 느껴서 FDSC 자랑방에 올리기도 했어요.
산 아, 이런 천부적인 재능! 능력자분들과 함께하는 상담소는 행복합니다. 혹시 상담소와 협업을 해보니 이런 면이 되게 좋더라, 하는 부분이 있었나요?
인아 칭찬 시간이군요.
산 저는 지금 상담소 소속이 아닙니다(웃음) 아니라고 생각하셔요.
희원 장단점을 얘기하는 건 너무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어떤 장점이나 단점이 있어서 협업하거나 하지 않는 건가 생각해보면, 딱히 그렇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상담소라는 곳과 함께해주는 활동가분들에 대한 신뢰가 있고, 그래서 같이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려운 부분이 있어도 그 발생 조건을 알 수 있게 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상담소와 어떤 부분에서 일하기가 힘들다고 한다면, 그건 우리가 같이 ‘해결’할 문제가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일하기 너무 좋다, 안 좋다로 판단하게 되지가 않아서... 장점을 굳이 얘기하기가 어렵다고 해야 할까요. 굳이 말하자면, 시의적절하게 꼭 필요한 운동을 하는 곳이라는 것 자체, 그리고 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라는 것 같아요. 저희가 계약과 관련한 조정을 요청하거나 협상, 협의를 요구하면 상담소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의 자리를 마련하고 이해해주는데, 이게 가능한 것이 쉽지 않잖아요.
인아 저도 희원이 중요한 부분을 짚어주었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구상할 때 비영리 단체가 가진 조건에 투덜대지 말자는 다짐이 있었어요. 비영리 단체는 금전적으로는 풍족할 수 없는 환경인데 그것에 불평하는 건 이상하잖아요. 대신 이게, 저게 나쁘다기보다 이런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가 서로 좋게 일할 수 있을까, 다른 방식은 무엇이 있을까 함께 생각할 여지가 있죠. 그리고 비영리 단체와 일하면 뭔가 계속 배우는 게 있어요. 저도 이 사회에서 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 있잖아요. 저는 말실수도 많이 하고, 강압적으로 굴 때가 많기도 해요. 근데 적극적 합의라는 개념은 저의 그런 면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는 개념이니까 당연히 배우는 점이 많아요.
산 우문현답이네요. 맞아요, 상담소도 누군가 뭘 잘하고 못하고로 협업을 결정하진 않으니까요. 일을 하는 방식을 결정하는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요. 너무 멋있는 말을 해주셨네요. 그러면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 일하면서 기억에 남을 것 같았던 인상 깊은 에피소드가 있다면 뭘까요?
희원 저도 퍼소나 워크숍기억에 남고요. 이건 에피소드라기엔 너무 작은 것 같긴 하지만, 인아 님이 초반에 스프레드시트를 활용한 툴을 예시로 든 적이 있어요. 활동가분들이 ‘그래도 디자인된 결과물이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피드백을 주셨는데, 인아 님이 디자이너는 스프레드시트로 무조건 예쁘게 만들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더라고요. 그게 인상적이었어요. 이것이 디자이너인가! 장인은 도구를 가리지 않는다, 이런 느낌이어서(웃음) 그리고 저희에게는 익숙한 툴킷이라는 용어에도 에피소드가 있는데, 협업의 마지막 순간에 ‘툴킷’이 무엇인지 서로 생각하고 있던 게 달랐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았었죠. 저희는 웹페이지 자체를 툴킷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성문화운동팀 활동가들이 전화로 ‘이제 이 웹페이지에 올라가는 툴킷은 어떤 게 필요한 거냐’고 물어보셔서 제가 살짝 급발진했었어요. “이것이 툴킷이다. 이 이상 뭘 더 어떻게 하냐.” (웃음) 그분들이 저를 워워 하면서 안심시키고 다행이라고, 또 뭘 따로 만들어야 하는 줄 알고 본인들도 걱정하고 있었다고(웃음) 그때 이미 10월 말이었거든요. 중간에 퍼소나 워크숍도 하고 회의를 2시간씩 네다섯 번씩 하고 그랬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가 결과물에 대한 상이 달랐다는 게 너무 놀라웠어요. 이렇게 얘기하니 재밌고 웃기네요.
인아 저는 희원이 그 통화를 하고 와서 제게 이야기해줬던 게 기억 나네요. 저는 중반부터 활동가님들과 회의를 잘 못했어요. 그래서 전 초반의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는데, 레퍼런스를 많이 모아서 소통했던 적이 있어요. 서로 레퍼런스를 정말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을 했죠.
산 상담소가 이야기하는 의제가 여럿 있잖아요. 혹은 인아 님이나 희원 님이 생각하는 여성운동의 의제도 있을 테고요. 혹시 상담소와 이런 의제를 같이 고민해보고 싶다, 이런 프로젝트는 함께 해보고 싶다 하는 게 있을까요?
인아 저는 상담소에서 하신 것 중 제가 보기에 가장 좀 전통이 있고 강력한 활동이라고 한다면, 생존자 말하기 대회라고 생각해요. 생존자라는 정체성을 드러내고 당당히 두 발 딛고 설 수 있는 판을 만드는 활동인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 전통이 길어서, 그 길을 되짚고 발굴하고 시각화하는 것도 의미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다른 여성단체에서 이번에 수첩 만든 거 아시나요? 그 수첩으로 그 단체가 얼마나 오래된 단체인지를 보여주면서 예전에 했던 여성운동과 오늘날을 연결하는 느낌이 있어요. 이런 것들을 헤리티지라고 한다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생존자 말하기 대회가 아닐까 예전에 생각해본 적이 있어서요.
희원 저는 예전에 BIYN(기본소득청’소‘년네트워크)에서 『보통의 경험』을 읽었어요. 지금 읽어도 그럴 테지만 정말 필요하고 실용적이고 구체적인 내용이더라고요. 그래서 이 책이 더 많이 알려지고 팔렸으면 좋겠다, 너무 멋지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개정판이 나온다면 함께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리고 다음에는 외부 지원금이 아닌 펀딩을 통해, 소액이더라도 조금 더 제약 없이 함께해보고 싶어요.
산 두 아이디어 모두 정말 재미있겠네요. 다른 활동가들에게 제안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보통의 경험』은 상담소에도 누렇게 바랜 책 소량만 남아있는데요, 북펀딩으로 연결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희원 그 책이 툴킷이에요, 정말.
인아 그리고 제가 가장 잘하는 것은 책 디자인입니다.
희원 맞아요, 원래는 책 디자인 전문입니다.
산 그러고보니 오풍 업종이 출판업 아닌가요?
인아 맞아요.
산 FDSC 책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희원 뭔가 잘 맞는 것 같아요. 보통의 경험, 오늘의 풍경
산 그러네요, 운이 딱딱 맞네요(웃음) 이 상호돌봄의 디자인 외에, 오풍에서 디자인 업계 혹은 공동체 내에서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하는 시도가 또 무엇이 있나요?
인아 저는 올해 처음으로 수업을 만들어서 진행했는데, 이걸 좀 더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페미니스트 디자인 이론을 접한 지 몇 년 안 되었는데, 처음 이 이론을 알았을 때 충격이었던 것이 제가 한 번도 구글에 ‘페미니스트 디자인’을 검색한 적이 없더라고요. 정말 많은 글과 레퍼런스가 있는데 한 번도 안 해봐서 이런 이론을 몰랐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고, 또 다른 충격은 무료로 풀려있는 수많은 글이 다 영어라는 것이었어요.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만 이 정보를 누릴 수 있나? 그래서 그 글들을 번역하고 같이 읽는 자리를 계속 만들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FDSC 내부에서만 하다가 이번에 밖으로 가지고 나온 거예요. 그리고 저 말고도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 제가 생각한 것과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를 할 텐데, 그걸 보고 싶어요. 이번 수업에서도 학생들이 따로 모여 북클럽을 만들었어요. 어떤 학생은 학생운동에 관심이 많았는데, 코로나19를 거치면서 학생운동이 활력을 많이 잃었대요. 그래서 다시 활성화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하려 하는데 제 수업이 많이 도움되었다고 해서 정말 뿌듯했어요. 이런 걸 더 많이 보고 싶어요. 저는 절대 못 할 일이고, 그걸 통해 저도 배우는 게 많으니까요.
산 정말 멋져요. 이제 마지막 질문인데요. 인아 님과 희원 님은 5년 후의 자신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나요? 5년 후에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을지, 아니면 오풍이 어디로 가고 있을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는지요.
인아 저의 좌우명은 카르페디엠입니다(웃음) 늘 오늘을 살아와서 이후를 생각한 적이 없어요.
산 저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게 조금은 양심 없다는 생각을 합니다(웃음) 희원 님은 어떠세요?
희원 5년 후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웃음) 하지만 뭐, 인생이 여태까지 더 나빠진 적은 없었기 때문에 더 좋아질 거로 생각해요.
산 상담소도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함께 오래오래 일해요(웃음) 귀한 시간 내어 인터뷰 참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