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상담소 소식
매월 세 번째 금요일에는 여성주의 수다 모임 <페미니스트 아무말대잔치>가 열립니다.
모임 자체는 매월 정해진 일정에 따라 12월~2월에도 꾸준히 진행했는데,
참여자들이 저마다의 사정으로 연말 연초를 정신없이 보내느라 후기를 잘 챙기지 못했어요.
오랜만에 후기를 올립니다.
이번 달 모임은 3월 21일(금) 오후 7시, 온라인 화상회의(ZOOM)로 모임을 진행했습니다.
참여자는 앎, 이음, 나타샤 총 3명이었습니다.
매월 그랬듯이 서로 근황을 나누며 자유롭게 수다를 떨었습니다.
가장 기억 나는 대화 주제 세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윤석열 퇴진을 위한 각종 집회가 수개월간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각자 겪은 일이나 느낀 점을 이야기 나누었습니다.
수많은 시민사회단체와 개개인이 모이다 보니 부딪침이 생기기도 하고, 같은 구호를 외치는 동지라고 생각했던 집회 구성원에게 혐오 표현이나 차별적 발언을 듣는 상황에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한편, 겨울철부터 투쟁을 지속하다 보니 점점 신체적으로 면역력이 떨어지거나 허리, 무릎 등 통증을 호소하는 사람이 늘어가고 정신적으로도 알게 모르게 피로감이 쌓이고 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매주 ‘민주주의를 구하는 퀴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민구페퀴넷)’와 함께 피켓 액션을 진행하고 있는데요, 최근 강조하고 있는 구호는 ‘탄핵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차이를 넘어 연대하면서 지치지 않고 투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나누었습니다.
혹시 집회 현장에서 한국성폭력상담소 깃발이나 민구페퀴넷의 피켓을 본다면 반갑게 인사 나누고 서로 아자아자 격려해 주면 좋겠습니다.
참고로 한국성폭력상담소 깃발은 이렇게 생겼어요.
3.8 세계여성의날 맞이 한국여성대회 부스에서 전시한 민구페퀴넷 피켓 중 극히 일부를 소개합니다! 하나같이 예쁘고 멋있지 않나요? (사진: 정멜멜)
둘째,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오랜 시간 나누었습니다.
우리 사회는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해야 ‘자기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하고,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나약한’ 사람 또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 통념과 편견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임에서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던 웹툰 「어느날 갑자기 가슴이 커짐」에는 희귀 질환을 겪은 당사자가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자신의 건강에 나타난 이상 신호를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장면에 ‘왜 더 빨리 병원에 가지 않았나?’ 묻는 댓글이 달리자 또 다른 댓글이 ‘작가님도 후회하고 계시다’라는 취지로 대신 답변해 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은둔형 외톨이의 성장과 변화를 다루는 웹툰 「아르마딜로」에도 매번 주인공이 답답하고 민폐라는 댓글이 달리곤 합니다. 작품에 몰입하여 나름대로 작중 인물을 걱정하는 마음으로 쓴 댓글이겠지만, 한편으로는 신체적·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고 더 빨리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는 작중 인물을 훈계하고 비난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실정이다 보니, 몸이 아파서 예전만큼 오랜 시간 일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만큼 성과를 내지 못할 때, 또는 우울증이나 무기력증이 심해서 일상적인 생활도 꾸려 나가기 어려울 때, 내 건강 상태를 주변에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요청하기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
최근 큰 수술을 받고 치료 중이라는 한 참여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질병권(잘 아플 권리)’를 선언한 『아파도 미안하지 않습니다』와 『아픈 몸, 무대에 서다』라는 책이 떠올랐습니다.
『우울: 공적 감정』이라는 신간도 읽어보고 싶습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우울’이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문제나 병리적인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공적 감정이라고 말하는 책이라고 해요. 12.3 계엄 이후로 ‘내란성 우울증’이라는 말이 유행하는데, 지금 시기에 읽으면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을 것 같아 바로 주문했습니다.
내 몸은 정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이미지 제작: 조짱, 제공: 다른몸들, 출처: 비마이너
셋째, 최근 온라인을 떠들썩하게 했던 연예계 이슈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당사자 중 한 분이 고인이고, 고인이 생전에 자기 경험을 어떻게 해석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특정 사건과 인물에 관하여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재단하기보다는 이번 이슈를 계기로 공론화된 주제(‘그루밍 성폭력’, ‘슬럿 셰이밍’ 등)에 관해서 포괄적인 의견을 나누고자 했습니다.
그루밍 성폭력에 관해서는,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을 무조건 피해자화하지 않으면서 그루밍 성폭력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무엇일까 토론하였습니다. 단지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라는 이유만으로 그루밍 성폭력으로 판단하면, 자칫 ‘보호주의’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아동‧청소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은 취약한 상황일 때 보호가 필요한데, 아동‧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당사자의 자기 경험 해석을 존중하지 않고 함부로 판단하거나 통제하려고 한다면, 아동‧청소년의 성적 권리와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타자화하게 되지는 않을까? 고민되었습니다.
한편,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 영향력, 경제력 등 권력 차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당사자의 자기 경험 해석과 별개로 그루밍 성폭력으로 볼 수 있다’라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바네사 스프링고라의 『동의』, 웬디 C. 오티즈의 『기억의 발굴』, 린이한의 『팡쓰치의 첫사랑 낙원』 등 피해당사자가 직접 쓴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 당사자가 피해 당시에는 연애 또는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성폭력 피해였음을 깨닫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 일부는 피해 당시 자신과 가해자와 관계를 몰랐거나 막지 못한 주변 어른들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제3자의 관점으로는 그루밍 성폭력으로 보이는데 당사자는 연애 또는 사랑이라고 믿고 있을 때, 제3자가 어떻게 판단하고 개입할 수 있을까? 권력 차이를 중심으로 그루밍 성폭력을 판단한다면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뿐만 아니라 비장애인 성인이라도 피해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갔습니다.
명쾌한 정답은 찾지 못했지만, 모임에서 페미니즘 관점으로 함께 고민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이런 주제에 관해 더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20년에 미성년자의제강간죄 연령 상향을 계기로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했던 이슈대응 집담회 <동의> 자료집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동의> 자료집 다운로드 ☞ https://www.sisters.or.kr/data/report/256?category=A01 ☜
‘슬럿 셰이밍’은 저도 생소한 용어였는데, 의역하면 ‘잡년(으로 몰아가서) 망신 주기’라는 뜻 같아요. 주로 여성이나 성소수자를 공격할 때, 보수적인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옷차림이나 태도, 과거 성 이력 등을 문제 삼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것을 말하는 용어로 저는 이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성폭력 가해자가 피해자를 ‘문란한 여성’으로 몰아가며 피해자의 진술 신빙성을 부정하거나 혐오 세력이 퀴어문화축제를 ‘음란한 축제’로 몰아가며 반대하는 게 대표적인 ‘슬럿 셰이밍’에 해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슬럿 셰이밍’에 관해서는 참여자들 간 의견이 다르지는 않았고, 함께 분노하며 더는 이런 전략이 사회적으로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모았습니다.
[리포트+] "저를 세뇌했어요"…'그루밍 성범죄' 피해자들 폭로 어려운 이유는? 카드뉴스 중. 출처 : SBS 뉴스(취재: 유덕기 / 기획·구성: 송욱, 장아람 / 디자인: 정혜연)
다음 모임은 2025년 4월 18일 오후 7시에 진행할 예정입니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다양한 주제와 의견을 들을 수 있어, 새로운 참여자가 많이 와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달에 만나요~
참여 신청하기 ☞ https://bit.ly/2025상담소소모임 ☜
이 후기는 본 소모임 참여자 앎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