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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성관계 욕(complain)하기>>-2002. 가을
  • 2005-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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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욕(complain)하기-성관계와 성폭력
-변혜정(상담소부설 성폭력문제연구소 소장)

나와 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성 이야기를 같이 할 수 있냐고...... 성은 일기장에나 쓸 수 있는, 사적인 경험이며 아름답게 간직 할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성 경험에 대해서는 이야기 할 수 없으며 오히려 나에게 성을 연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물었다. 지금의 자신의 일상이 편안하냐고, 굳이 성 경험에 국한하지 말고 자신의 경험을 한번 돌아보자고 말했다.
.......그녀는 항상 행복한 것은 아니지만 노력하는 것이 삶이 아니겠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성폭력에 대해서는 단호했다. 성폭력 피해자는 불쌍하며 가해자는 나쁜 놈이라는 주장을 강력하게 했다. 동시에 성폭력을 당하면 가만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피해자들이 많이 말해야 하며 그것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그녀는 (성폭력특별)법의 강력한 시행과 예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강하게 주장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단지 한 여성만의 대답이 아니었다. 많은 여성들이 이와 비슷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성폭력과 성관계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인가?

이렇게 자신의 경험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 여성들도 있었지만 동시에 많은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이 성폭력인지 아닌지를 궁금해했다. 자신들의 경험이 굉장히 불쾌하기 때문에 성폭력인 것 같은데, (성폭력 임을 입증할 수 없기 때문에) 성폭력이 아닌 것 같다고, 무엇이 성폭력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면서 영화 속의 여러 사례, 예를 들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가 처음에 레트 버틀러에게 성폭력을 당한 것이냐고 물었다. 자신은 영화나 소설 속에서 이야기되던 그런 수많은 사례들 때문에 처음엔 그것이 사랑이려니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성폭력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오하라가 강간을 당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 오하라가 행복하게 보이기 때문에 아니 오하라가 그 남자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에 강간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영화 속의 스칼렛 오하라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않다고 말했다. 자신과 남편과의 관계 그리고 성경험., 어떻게 남편을 만났는지, 자신의 행복하지 않았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연구자가 묻지 않아도 그녀는 계속 이야기했다.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했다. 자신과 남편과의 관계는 가해와 피해의 관계는 아니지만 '성폭력스럽다'고 그녀들은 결론짓는 것 같았다. 성폭력은 행위의 문제(원하지 않는 성기삽입 여부)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라고 과감히 말하기도 했다. 관계 때문에 그렇게 성관계를 해버리는 관계, 성관계를 해버리는 것이 더욱 편안한 관계, yes·no를 말하는 것이 굉장히 우스운 관계라고 말했다. 거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폭력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닌 관계......

그렇다면 스스로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여자만 성폭력(아니 문제적인 성관계)을 이야기할 수 있는가? 성관계와 성폭력은 자로 줄긋듯이 구분될 수 있는가? 노력하면 행복하지 않는 성관계도 좋아질 수 있는가? 과연 여성들에게 성폭력은 무엇인가? 더 넓게 물어보자면 여성들에게 성(sexuality)은 무엇인가? 이제까지 여성의 성은 일탈적인 성-매매춘, 포르노그래피, 성폭력, 혼외 관계 등을 통해서 말해졌다. 그래서인지 일탈적이지 않는 성에 대해서는 '사적'이라는 미명아래 말해지지 않는다. 물론 여성들도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신의 경험이 정상(?)이라고 생각하거나 불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의 경험을 말할 언어가 없다. 그럴 자리가 없다. 무엇을 기준으로 언제, 어디서, 누구와 자신의 경험을 말할 것인가? 단지 불행한 이야기를 불행하게 함으로써만이 말할 수 있었다. 성폭력을 이야기한 여성주의 역사에서도 여성의 성을 말하기보다는 가해자인 남자의 성을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을 이야기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묻기에는 너무 할 일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여자들은 특히 결혼 한 여자들은 남편(남자친구)을 욕하거나 시댁을 쉽게 욕한다. 정말로 밉기도 하겠지만 버릇처럼 그녀들은 말한다. 그녀의 주요한 삶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사적인 경험인데도 그들은 곧잘 말을 한다. 그래서인지 만나면 이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화도 풀고 분풀이도 하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사람이 욕한다는 것은 욕망 한다는 것과 통한다. 자신의 욕망이 그 무엇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 불평도 하고 욕도 한다. 자신이 처해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기대에 못 미칠 때 자아와 구조와의 충돌에서 욕을 하면서 그것을 삭히기도 하며 변화를 모색한다(물론 욕만 하면서, 움직이기 않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여성들은 성관계/성경험에 대해서는 욕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다. 사적이기도 하고 비밀스럽기도 하겠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는 자신의 그 경험이 왜 문제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폭력에 대해서만 특수한 의미를 부여하며 말하기 시작했다. 자신과는 다른 경험을 하고 있는 불행한 피해자로서 말이다.

그런데 반-성폭력 운동 10년여의 역사 속에서 타자의 성폭력이 말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서도 조심스럽게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여성들이 성의 문제가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같게 인지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여성들의 감정과 그리고 그 감정을 불러일으킨 경험이 조금 궁금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성폭력의 경계를 허물면서 자신의 성경험에 대해 문제제기를 시작했다. 그 경험을 성폭력으로 이름 붙이든 아니든 간에...... 자신과 상대방과의 관계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 관계의 하나로서 아니면 전부로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이 처해 있는 맥락에서 권력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잘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자신을 옥죄이는 그 권력에 대해서 의심하기 시작했다. 성적주체로서, 성적권리를 가진 자로서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벗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의 옷을 만들기 시작했다.

'스칼렛 오하라는 자신의 욕망을 선택한 것이지요. 그녀는 강간당한 것이 아니라구요. 자신을 솔직하게 던진 매력적인 여자로 생각해요.' 라는 도발적인 언설로서 기존의 상상력에 다시 한번 도전하면서 말이다. 얼마만큼이나 나는 나의 관계맺음에 대해 욕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