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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성별화된 폭력으로서의 스토킹-2002. 겨울
  • 2005-09-16
  • 4376


성별화된 폭력으로서의 스토킹
- 구애형 스토킹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으로 -
글/ 안수진

스토킹은 새로운 사회현상에 따라서 생긴 신종 언어이다. 아직까지 스토킹에 대해 정확하게 합의된 개념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어떤 목적에서건, 상대방이 거부 의사를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쫓아다니거나 괴롭히는 행위"를 뜻한다. 스토킹이 성립되려면 적어도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피해자의 '거부 의사'이며, 나머지 하나는 '가해 행위의 반복성'이다. 스토킹은 직접 대면을 통해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전화·이메일·편지·팩스 등 각종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이용한 심리적 괴롭힘의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고, 폭력·성폭행·감금·살인 등 물리적인 괴롭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특히 구애형 스토킹은 사회문제나 범죄로 부각되지 않고 단순히 열정적이고 집요한 구애 행위로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구애형 스토킹에 대한 통념은 여성들의 스토킹 경험을 무화시키고, 스토킹을 사회로부터 탈맥락화시켜 사적인 일로 치부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스토킹 피해자는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위협과 불쾌감을 조성하는 행위들을 개인적 수준에서 대처하거나 그대로 참아낼 수밖에 없다.
스토킹의 가해자와 피해자는 매우 젠더화되어 있다. 물론 스토커는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인 경우도 있으며, 동성들 간의 스토킹 사례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의 대다수는 여성이며, 가해자는 남성이다. 실제로 최근의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피해자의 78%가 여성이었고 가해자의 87%는 남성이었다(주희종 1999). 이러한 이유로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여성 폭력 금지법'(Violence against Women Act) 안에 스토킹에 대한 조항을 두고 있다. 이러한 스토킹 가해/피해자의 수치는 스토킹이 주로 여성을 대상으로 하여 행하여지는 성범죄만큼이나 젠더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젠더화된 스토킹 형태는 특히 구애형 스토킹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구애형 스토킹을 둘러싼 언설들은 다른 여성 문제들이 우리 사회에서 무화되는 방식과 비슷한 방식으로 스토킹을 정당화하고 있다. 예를 들어서, 성희롱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남녀차별금지및구제에관한법률'과 '남녀고용평등법'이 제정되기 전까지는 직장내 성희롱은 현실에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었지만 사람들의 의식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아 왔다. 단순히 직장 동료들끼리의 친근함의 표시로 여겨져 왔던 행위가 여성계의 꾸준한 여론화 작업과 법의 선포로 '성희롱'이라는 명명의 과정을 거치게 되면서부터 여성의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스토킹에 대한 심각성이 공유되지 않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의 여성에 대한 남성 스토커의 행위는 단순히 열정적인 구애 활동쯤으로 여겨지고 있을 뿐이다.
스토킹이 여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의 스토킹 연구는 실태 조사나 가해자를 병리화시키는 의학적 측면이나, 개인의 프라이버시권에 대해 설명하는 법적 측면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왔다. 기존의 스토킹 연구들에서 성별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기존 연구들에 있어서 성별은 단지 발생률이나 가해율을 측정하는 변수로만 사용될 뿐 스토킹 경험 자체가 어떻게 성별화되어 있는지에 대한 연구는 아니었다. 스토킹을 성중립적으로 설명하는 이러한 접근 방법은 여성이 처한 부정의한 현실과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여성의 관점에서 스토킹을 새롭게 조명해야 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남성이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사랑을 강요하는 구애형 스토킹이 어떠한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합리화되는지를 분석하고, 여성 피해자가 남성과 어떤 지점에서 스토킹을 다르게 경험하고 있는지를 밝혀냈다. 또한 그 동안 구애형 스토킹이 여성들의 애매한 태도 때문에 발생하며, 스토킹 피해자들은 수동적일 것이라는 막연한 통념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이에 본 연구의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집착적이고 폭력화된 사랑을 낭만적 사랑으로 인식하는 사회문화와 연애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평등한 남녀관계는 스토킹을 정상화된 구애방식으로 여기게 만든다. 낭만적 사랑의 문제점은 사랑이 전적으로 감정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그릇된 믿음을 가지게 만든다는 점이며, 스토킹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까지도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사랑 방식일 뿐이라고 믿게 만든다는 데 있다. 결국 구애형 스토킹은 인간관계의 상호성을 무시하고, 상대방의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강요하는 것이다. 또한 물질적인 공세로 이어지는 연애의 이벤트화와 기존의 강한 남성상에 여성을 잘 배려해주는 세심한 성격이 첨가된 신남성상의 대두 역시 일방적인 선물이나 이메일, 전화 등의 행위를 기반으로 하는 스토킹을 열렬한 구애행위로 낭만화한다. 특히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남성과 내숭떠는 여성이라는 성별화된 각본과 사랑 지상주의를 끊임없이 유포하는 대중매체에 의해서 남성에 의한 구애형 스토킹은 미화된다.
둘째, 스토킹을 무화시키는 문화로는 물리적 상해만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통념과 여성을 독립적 주체로서 인정하지 않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전통적으로 여성들은 가정과 사회에서 신체의 통제를 받아왔으며, 여성 비하적인 언어와 분위기에서 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몸에 가해지지 않는 비물리적인 스토킹의 경우 가해자는 물론 여성 피해자들조차도 그것을 폭력으로 인식하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폭력에 대한 제한적 인식은 스토킹을 사회문제화하기 어렵게 만들며, 피해자들의 경험을 드러나기 힘들게 만든다. 그러나 언어적 폭력, 통제, 감시등도 피해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큰 스트레스를 야기하며 한 개인의 인격에 손상을 가하는 행위이며 더 나아가 여성 집단 전체를 열등한 존재로 규정하게 만든다. 결국 피해자들은 자신의 일상이 스토커에 의해서 통제됨으로써 뜻하지 않는 방향으로 삶이 변화되는 것을 참아야한다. 그리고 개인의 권리가 집단적 이익에 양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집단적 분위기와 프라이버시권에 대한 무관심은 스토킹 피해를 묵인하게 만든다. 인권이나 프라이버시권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독립적 개체로 인정받아야 하는데 전통적으로 여성은 가족이나 남성에 귀속되어 있거나 소유된 존재로서 인식되어 왔기에 이것이 난점으로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거절은 분명한 의사 표현으로서 존중되는 것이 아니라 무시해도 좋은 것이나 혹은 협상의 대상쯤으로 취급되면서 여성의 의사를 배제한 채 이루어지는 스토킹이 일반인에게 범죄로 인식되지 않는다.
셋째, '여성다움'과 '남성다움'과 같이 성별에 따라서 고착화된 이미지들은 스토킹의 행위자라고 할 수 있는 가해자와 피해자에게도 작동되어 성별에 따라 이들은 다르게 규정된다. 언론에서 스토킹을 다루는 보도 태도에서도 이것은 확실하게 나타나는데 남성의 경우는 스토킹 행위를 중심으로 서술되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는 개인적 기질에 초점이 맞춰지는 등 사회로부터 고립된 비정상적인 개인으로서만 취급된다.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집요하게 구애를 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규정하고 있는 여성다움에서 벗어나는 행동이기 때문에 여성 스토커의 경우 남성 스토커에 비해서 더 일탈적인 사람으로 규정되고 행위 자체가 희화화되는 것이다.
또한 성 규범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이 스토킹이라는 폭력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신체적인 열세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무력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 문제에서 항상 대두되는 피해자 유발론 역시 스토킹 사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정숙하지 못하거나 평소에 남자 관계가 복잡한 여성에게만 스토킹이 발생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피해 여성들에게 더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든다. 이러한 통념들은 가해 행위를 오히려 두둔함으로써 피해 여성들로 하여금 피해 사실을 함구하게 만들고, 장기적인 정신적 후유증을 남길 수 있는 제 2차 피해를 초래하게 한다.
넷째, 스토킹 피해 여성들은 남성 피해자들과 달리 성적, 신체적인 위협을 매우 강하게 느끼고 있다. 스토킹 과정에서 여성 피해자들은 종종 가해자가 성적인 소문을 내서 피해를 당하거나, 성폭력을 위협에 노출되는 경우도 있다. 여성의 혼전 순결이나 정절이 중시되는 사회에서 피해자에게 주어지는 성적인 소문은 진위 여부와 관계없이 여성에게 있어서 강력한 낙인(stigma)이다. 특히 스토커가 과거에 피해자와 연애나 성관계가 있었던 경우에는 이것을 빌미로 협박을 하기 때문에 피해자는 사법기관은 물론이거니와 친구나 가족들에게조차 도움을 요청하기 힘들어하며, 스토커의 구애 행위를 단호하게 거절하기조차 힘들어하기도 한다. 또한 스토킹 과정 중에서 행해지는 (성)폭력에 대한 위협은 피해자의 행동반경을 제한하며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를 경험하게 만든다. 반복적이면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는 스토킹은 비물리적 폭력에 의한 스토킹이더라도 스트레스와 공포가 몸 속에 각인되어서 피해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다른 신체적인 질환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스토킹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없는 현 시점에서 피해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언어화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스토킹에 대한 그릇된 통념과 자신의 실제 경험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가면서 이 사이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경합을 벌인다. 스토킹 피해자들이 순종적이거나 거절을 못하는 여성이라는 사회적 통념은 스토킹의 원인을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에게 돌리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만나본 피해자들은 스토킹이라는 긴 피해의 시간 속에서 때로는 좌절하고 위축되기도 하지만 분노를 표출하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대처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스토킹 피해를 겪으면서 아직은 미약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 연대를 추구하기도 하며, 적극적인 권리 의식과 여성주의 의식을 수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본 연구는 구애형 스토킹 피해자의 경험 드러내기를 통하여 스토킹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기존의 몰성적인 스토킹 담론에 대응해 여성주의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앞으로 이 분야에서 스토킹 예방과 피해자 지지를 위한 실질적인 연구와 정책적 담론이 시도되길 바란다.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성별화된 폭력으로서의 스토킹 연구: 구애형 스토킹 피해자의 경험을 중심으로},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여성학과 석사학위 논문,2002-을 요약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