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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가해 중심 사회에서 피해생존자 중심의 사건지원이란
  • 2005-09-16
  • 3756



[피해의식이라는 오래된 문제와 가해자중심주의]

지나친 피해의식이라는 익숙한 말이 있다.
이 익숙한 관용어구는 보통 여성들이 (혹은 여성들과 같이 은폐되어 있지만 명백한 차별을 받는 집단들이) 자주 듣게 되는 말이다. 지나친 피해의식이라는 말은 피해자들에게 심리적으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나치게 과민한 것은 아닌지, 자신이 뭔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끊임없이 검열하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그런데 보통 차별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집단들은 차별 당하는 집단이 차별을 받을 수밖에 없는 수많은 이유들을 들이댄다. 밤에 늦게 돌아다녔다던지, 치마를 너무 짧게 입었다던지, 순결하지 않았다던지 등 차별받지 않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거나 혹은 차별을 스스로 원했다는 식의 이유들 말이다. 그러나 차별 받는 집단들은 차별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므로 차별 받는 이유에 대해 듣는 것만으로도 차별적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내가 혹시 차별 당할만한 짓을 하지는 않았나? 내가 충분히 싫다고 말했는가? 라는 식의 자책감은 피해자들이 겪는 이중적 고통 중에서도 오래되고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들이다.
여성들이 자신이 겪는 차별과 폭력이 성별 때문이라는 인식을 하고 그것을 발화하게 될 때 흔히 "과민하거나(그래서 남성들의 사회/조직생활에 걸맞지 않거나)"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하거나(결벽증이 있는 공주병환자거나)" 혹은 "여자답지 않다"(페미니스트거나 여자로서 매력이 없거나) 등등의 비난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여성들의 피해의식에 대한 오래된 놀림과 비난들, 여기에서부터 가해자중심주의가 시작된다. 그 피해가 오래된 것일수록, 그리고 부정적인 인식이 오래된 것일수록, 피해와 피해의식을 구분하고 지배적/남성중심적인 탈을 쓴 "객관성"와 "이성"은 더욱 효력을 발휘한다.

이러한 가해자중심주의는 피해와 피해의식을 구분하여,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감정이라는 이분법안에 여성들을 가두는 동시에 가해자들이 저지른 가해순간의 주관적인 판단들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게 하는 효과를 거둔다. 그리고 "지나친 피해의식"이라는 말은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두 가지 선택을 안겨 준다. 한 가지는 더더욱 피해자가 되는 것, 다른 한 가지는 입을 다물고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상태"를 가장하는 것이다. 이때 피해자는 피해자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신 안의 자책감들과 싸우면서, 자신이 이성적이며 객관적이라는 증명을 해내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지 못할 바에는 입을 다물어라-라는 것이 바로 가해자 중심주의가 가지는 지나친 피해의식에 숨어있는 경고인 것이다.

[가해자 중심주의에서의 피해자 '되기'의 문제]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 중심의 사건지원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그동안 성폭력 사건이 철저하게 가해자 중심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비판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피해자 중심주의'가 그동안 피해자에게 법적, 심리적 지지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 대한 반성과 비판의 맥락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잊어버리고, 피해자 중심이라는 말 자체에만 집중해서 피해자가 자기 마음대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상상을 하기 때문이다. 성폭력에 대한 문제만큼 피해자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은 범죄가 없다는 현실을 쉽게 무시하고 말이다.
사실 피해자 중심으로 지원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는 현실 자체가 그동안 가해자 중심으로 성폭력 사건이 해석되고 설명되고 처리되어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성폭력 범죄는 유일하게 피해자가 피해를 입은 사실 자체를 비난받는 범죄이다. 또한 성폭력 범죄는 거의 유일하게 가해자가 피해자의 신변을 밝힐 것을 협박할 수 있는 범죄이다. 발생율이 세계 2위인데도 신고율이 6%에 머물러 있고, 피해자가 겪는 이후 후유증에 대한 사회제도적인 뒷받침이 없는 현재의 상태는 성폭력 사건을 해결보다는 은폐하기 쉬운 구조라는 것을 보여준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비난하기만 해도 가족과 공동체 내에서 쉽게 자신의 가해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비난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성적으로) 결백한 피해자라는 것이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았을 때 가족과 공동체는 피해자를 지지하지 않는다. 사실 피해자에게는 성적 자기 결정권이 있는 주체로서의 피해자라는 위치보다는 성적으로 무지한 피해자라는 위치를 선택하는 것이 더 안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가해자 중심적인 사회에서 원하는 피해자가 되는 순간 피해자는 성적자기결정권의 침해를 감수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사건을 개념규정한다는 의미]

이러한 상황에서 피해자 중심주의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 번째는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개념 규정한다는 의미이다. 사건을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개념 규정한다는 것은 사건에 대한 "해석"이 가해자와 피해자가 다를 때 피해자의 해석을 신뢰한다는 의미이다. 가해자 중심주의의 무서운 점은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말을 할 때 우선적으로 남성의 말을 믿겠다는 사회적 합의를 그대로 보여준다는데 있다. 피해자 중심의 사건지원이란 바로 이 부분에 대한 역전이다. 예를 들어, 화간이라고 하는 가해자의 말은 피해자의 동의 없이 객관성을 획득할 수 없다. 당사자 중 한 명이 강간이라고 한다면 화간 자체가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성폭력 사건을 규정한다는 것은 이렇게 성폭력 사건에 대한 피해자가 보다 강한 객관성을 지닌 해석자의 위치를 가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혹자는 만약 누가 보기에도 명백한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가 자신이 겪은 사건을 피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 사건은 성폭력이라고 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다. 피해자는 피해를 해석할 수 있는 보다 객관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이기는 하되, 변치 않는 고정된 존재도 전능한 존재도 아니다.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개념을 규정한다는 의미는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피해자는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다른 길-회피나 부인의 길-을 선택할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가해중심사회에서의 피해자 위치가 가지는 딜레마가 피해자로서 자신을 정체화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피해자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갈등한다. 따라서 피해자 중심으로 사건지원을 지원하고자 하는 지지자들은 단지 성폭력 개념규정을 피해자만이 할 수 있거나 피해자가 규정하는 바에 따라 따라갈 것이 아니라 그 피해를 규정하고 해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에서 피해자가 겪는 고통과 상처에 귀를 기울이는 것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생존자를 돕기 위해 지원자가 가져야할 위치]

피해자 중심의 사건지원이 가지는 두 번째 의미는 사건지원의 전 과정에서 가해 자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책임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이 의미는 피해자가 가해자 중심의 사회에서의 수동적이고 무력한 피해자가 아니라, 문제를 인식하고 사건을 해석하고 해결하는 생존자가 되는 과정과 연관되어 있다.
이 부분은 특히 지원자들이 생존자와의 관계에서 문제를 겪는 부분이다. 지원자들은 생존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의 위치가 아니라 생존자가 하는 말을 잘 듣고 같이 의논해나가는 안내자의 위치에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이런 위치에 대해 생존자와 지원자 모두 혼란을 느낄 수 있다. 생존자가 만약 지원자를 지나치게 의존하게 될 때, 지원자는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 신뢰관계가 깨지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지원자가 가부장적 사회에서 진공상태에 놓여있지 않는 한 생존자가 원하는 그대로의 해결을 재빨리 할 수 있는 능력을 갑자기 가지게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어적으로 할 수 있는 것들, 안전한 것들만을 기계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지원자의 역할은 아니다. 한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한계를 깨는 것 역시 지원자의 목표 중의 하나라는 것을 전달하고, 현재 이미 그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같이 해결을 모색해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 반대로 생존자가 지원자를 전혀 신뢰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어려움도 있다. 피해자 심리의 특징 중 하나는 문제를 회피하거나 부인하고 분노를 내면화하는데 있다. 이 내면화된 분노의 대상은 흔히 자기 자신이 된다. 그리고 때로 우울증과 죄책감, 무력감 등을 극복하기 위해 지원자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자신의 무력함과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 지원자 역시 무력하게 만들면서 피해자의 위치를 전도하려 하는 것이다. 지원자로서 생존자의 분노의 표적이 되어 본 사람이라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것 역시 생존하기 위해 피해자들이 하는 극복의 행동들이다. 이럴 때 지원자는 자기 자신 혹은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쏟아내는 분노는 상황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좋은 전략은 아니라는 것을 설득하고 생존자의 우울증과 무력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글을 맺으며]

가해 중심 사회에서 피해생존자 중심으로 사건을 지원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가해 중심 사회에서 피해 경험을 드러내고 싸우는 것만큼 어렵지는 않아도 말이다. 성폭력 피해는 "나"는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을 침범시키고, "나"는 세상과 어떻게 관계맺을 수 있는가에 대한 사회화과정을 침범하는 고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자는 지지자를 만나는 기쁨으로, 지원자는 자기 성장과 성찰의 기회로 생존자를 만날 때, 그리고 그 만남이 개인성과 관계성을 복원하는 과정이 될 때, 우리는 성폭력 피해의 극복이라는 오랜 여정에서 치유의 희망을 발견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 본 상담소 소식지 '나눔터' 45호(성과인권팀 권김현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