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낙태죄’가 폐지된 후, 모두의안전한 임신중지를위한권리보장네트워크(이하 모임넷)가 출범하며 내건 7가지의 요구를 기억하시나요? 7가지의 요구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임신중지 관련 의료행위에 건강보험 전면 적용하라
(2) 유산유도제를 하루속히 도입하고 접근성을 확대하라
(3)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를 구축하라
(4)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종합정보 제공 시스템을 마련하라
(5)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한 교육을 실행하라
(6) 사회적 낙인을 해소하고 포괄적 성교육을 시행하라
(7)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을 위한 법 체계를 마련하라
모임넷에서 이 요구안을 만들 때 참고한 것이 세계보건기구(WHO)의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입니다. 지난 7월 5일, 이 가이드라인의 총 책임자이자 WHO 성과 재생산 권리 부서(SRH)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캐론 킴 산부인과 전문의가 한국에 방문하는 일정에 맞춰 모임넷과 캐론 킴의 비공식 간담회가 진행되었습니다.
우선,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나영님이 한국에서 ‘낙태죄’가 폐지되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낙태죄’가 폐지된 이후의 현재 상황, 재생산권 보장과 관련한 우리의 요구를 발표하였습니다.
캐론 킴은 WHO에서 진행한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주요 내용, 가이드라인을 만들 때 중요하게 고려했던 점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가이드라인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임신한 당사자의 필요와 선호입니다.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때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리고 가이드라인은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임신중지 케어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 임신중지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것뿐 아니라 피임하는 법, 합병증 관리 등 임신 중지 이후의 조치도 포함됩니다. 임신중지의 상황만이 아닌 임신이전/중지/이후의 단계를 모두 고려하는 것입니다.
가이드라인은 좀더 용이하게 임신중지가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도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지지적이고 인권을 존중하는 관점의 법·정책, 정보를 실제로 마련하고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것, 지지적인 의료체계가 보편적으로 비용적 부담 없이 접근가능할 수 있게 하는 것 이 3가지의 노력이 함께 필요하다고 합니다. 한편, 의료체계에 대해서는 보편적인 의료 보장, 보험, 1차 의료가 주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계 종사자들이 임신중지에 대한 역량을 갖추고 훈련받을 수 있게 하는 것, 유산유도제와 같은 필수의약품을 조달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등이 필요합니다.
캐론 킴은 ‘안전한 임신중지’보다는 ‘양질의 임신중지’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싶다고 하며 임신중지 케어는 안전뿐 아니라 더 효과적·효율적으로, 형평성있게, 당사자 중심적인 가치를 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가치에 따라 가이드라인은 전문의뿐 아니라 약사, 간호사, 산파를 포함한 다양한 보건의료노동자가 제공할 수 있는 다양한 임신중지 서비스와 판데믹 시기에 접근가능한 화상의료 서비스, 유산유도제 약물에 대한 추가적인 권고도 소개합니다.
캐론 킴의 발표가 끝난 후, 질의응답이 이어졌습니다. 가이드라인을 현실에서 적용하고자 할 때 정부나 의사회에서 ‘WHO 가이드라인은 저소득국가 대상이니 우리는 필요없다’고 하는 현실, 백래시 시기에 임신중지가 여성인권과 결부되어 저항감이 큰 현실, 원격진료 도입과 관련하여 디지털 헬스 케어 분야에서 기업의 지배력이 큰 한국 사회의 맥락을 어떻게 고려할 수 있을지 등 WHO 가이드라인을 한국의 상황과 맥락에 적용하는 것에 대한 깊은 논의들이 오고갔습니다. 캐론 킴은 가이드라인에서 임신중지가 의료서비스뿐만이 아닌 명백한 인권문제라고 명시했다는 것을 짚었습니다. 또한, WHO에 중저소득 국가의 요청이 많기는 하지만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은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모든 국가에 적용되어야 하는 가치를 담으려고 노력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한편, 개별국가의 상황과 맥락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WHO에 많은 요구와 파트너십으로서의 상호작용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캐론 킴은 WHO의 권고들이 모두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지금 당장 이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이행하는 것, 7개의 권고 중 단 한 권고를 가져다가 이행한다해도 변화는 시작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정부가 임신중지 권리 보장 책임을 방기하고 있기에 모임넷은 늘 똑같은 요구를 이야기합니다. '낙태죄'가 폐지된지 벌써 2년이 넘었는데 정부는 왜 논의조차 하지 않는 것일까? 언제까지 이렇게 똑같은 말을 해야 할까? 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우리들의 요구 중 단 하나가 이행되더라도 변화는 시작된다는 말이 울림을 주었습니다. 전 세계 사람들의 성과 재생산권 보장을 위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도 큰 힘을 받았지요. 이제 이 권고들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에 맞게 이행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하지만 좌절하지 않고 이 싸움과 요구를 지속해나가는 것, 시민의 힘으로 '낙태죄' 폐지를 이뤄낸만큼 언젠가 성과 재생산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오리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모두 투쟁!!
↓↓↓ WHO 임신중지 가이드라인이 궁금하다면?
이 글은 성문화운동팀 유랑 활동가가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