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여성운동, 인권・시민사회운동, 국제연대 활동의 다양한 소식을 전합니다.
2024 총선대응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 릴레이 ‘정치 에세이’ 네번째
🌱릴레이 정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선거를 앞두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올린 우리가 바라는 가치, 정책, 정치에 대한 글입니다.
🌳개발 멈춰, 원전 멈춰, 파괴 멈춰🌳
수수(한국성폭력상담소 콩깍지 프로젝트)
지구에 머물고 있는 하나의 생명으로서 책임감을 느낀다. ‘지구야 미안해’라는 슬로건의 가벼움이 싫지만, 지구와 동료 생명들에게 깊이 미안한 것은 사실이다. 인류는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많은 파괴를 저질렀다.
나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았다. 그래도 항상 흙을 파고 놀았고, 들꽃의 이름을 외우는 걸 좋아했고, 바람이 불면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는건지 생각했다. 외증조할머니는 세상 만물 모든 것에 신이 담겨 있다고 말해주었다. 의자를 놓을 때도 의자 신과 장판 신이 아플까봐 조심했다. 돌이켜보면 매우 영적인 어린이었던 것 같다. 환경오염에 관한 기사를 읽을 때면 괴로웠다. 너무 괴로워서 몸이 아플 지경이었다. 우리가 다 죽는다는데! 나는 점차 환경과 관련된 아무런 기사도 읽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서서히 영적인 어린이에서 벗어나 이성을 믿기 시작했다. 밤도 무섭지 않았고, 멸망도 덜 무서워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개발과 파괴 현장과 다시 마주한 것은 스무살이 넘어서였다. 재개발 현장에 용역 깡패가 들어와서 모든 집기를 깨부수고 있다고 했다. ( 홍대에 이은 명동의 '눈물'…'커피점 '마리'를 아시나요?'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104566)재개발이 뭐가 문제인지, 경찰이 있는데 어떻게 도시 한복판에서 용역 깡패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건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친구들이 오라고 해서 갔다. 난리가 났다고 했다. 가보니 정말 난리가 나 있었다. 용역이 밀쳐서 다친 나는 도망가듯이 자리를 빠져나왔다. 그 가게는 정말 멀쩡했는데. 왜 가게 주인도, 손님들도 동의하지 않았는데 건물을 부순다는 걸까? 재개발은 누구를 위해 하는 거였을까?
지리산 구례군 양수발전소 개발 반대 플래카드, 출처_동아시아에코토피아
또 다른 친구들은 제주 강정마을에 가 있었다. 해군기지 건설 때문에 구럼비 바위가 부서질 위기라고 했다. 또 어떤 친구들은 설악산에 가 있었다.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짓는다고 했다. 이미 한 번 환경부가 부동의 결정을 내렸지만, 윤석열 대통령이 케이블카 사업 승인을 공약하며 사업이 다시 추진되었다. 속초시는 또 영랑호를 개발하기 위해 호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다리와 수면 데크길을 만든다고 했다. ( 모두를 위해 영랑호를 그대로 https://blog.jinbo.net/eastasia_ecotopia/37)평창에 간 친구들도 있었다.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너무 많은 산을 깎았기 때문에 올림픽으로 인한 폐허를 계속 관찰하고 알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친구들의 모든 행동에 동의하였지만, 마음 한 켠으로는 ‘바위에 그렇게 많은 의미부여를 해도 되는걸까?’, ‘산을 신격화하는 건 아닐까?’, ‘호수가 늘 그대로 있어야만 하는걸까?’ 의심했다.
그런데 친구들을 따라 현장에 갔더니 그 모든 말들이 이해가 되었다. 바위와 산과 호수는 충분히 크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여러 힘의 작용을 통해 형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힘의 지분이 너무 컸다. 이쯤 되었으면 그대로 둬도 될텐데.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굳이 파괴할 이유가 하나도 없을텐데. 그 지역에 오래 산 활동가들과 주민들은 개발이란 이름의 파괴가 어떻게 이뤄지는지 세세하게 설명해주었다. 개발을 해서 이윤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평창올림픽 이후 강원도에 투기 자본이 몰렸으나, 그 돈이 지역사회로 흐르는 것은 아니었다. 여러 센터들은 몇 백 억의 예산을 투입해 지어지기만 했으나 결국 수익이 나지 않아 민간 매각에서도 제외되었다.( 올림픽 폐허 가이드 : 평창올림픽 개최 후 5년 https://noolympic2018.blogspot.com/2023/06/5.html) 개발이 곧 파괴로 이어지는 것도 문제이지만, 개발하면 발생할 거라고 믿어지는 이윤이 발생하지 않을뿐더러, 공정하게 배분되지도 않는다는 것도 문제이다.
더 빠르고 편리한 것, 더 많은 생산을 추구하는 것은 개발이고 좋은 것이라고 배웠다. 개발과 파괴가 한 끗 차이일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할까? 기후위기와 같이 결국 파괴가 인류 뿐만 아니라 모든 생태의 목까지 조르고 있을 때에는 마냥 개발만을 선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인류가 마냥 자연은 대상일뿐이고 무한하니 마음껏 개발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건설을 목표로 하던 제국들은 파괴를 외주화했다. 남의 땅을 파내고, 강을 마르게 하고, 오염원은 옮겨두었다. ‘내게만 영향을 주지 않으면 괜찮을거야’ 라고. 그리고 이런 영향은 더욱 빈곤한 자들에게, 권리를 박탈당한 존재에게, 목소리가 없는 생명들에게 가중된다.
설악산 오색케이블카 반대 시위, 출처_동아시아에코토피아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도 마찬가지다.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것이 일본에 있다고 괜찮은 것은 아니다. 국경과 국가는 사람이 임의로 만든 개념이고, 땅과 물과 바람과 공기는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든다. 방사능도 그렇다. 원전이 만들어내는 핵폐기물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를 위해서 개발과 원전과 파괴를 멈추라고 주장해야 한다.
정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토목공사는 발전의 상징이지만 실제로 거대한 재정손실을 만들어낸다. 그럼에도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정부는 계속 토건개발에 힘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는 것에는 가만히 있으라고 하고,(또다시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1037444.html) 나중에 하면 안 되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면서( '나중에'만 하다가 결국 임기 끝까지 차별금지법 안 만들었다 https://m.khan.co.kr/national/national-general/article/202205091515001#c2b) 그대로 있어도 되는 것은 부수고 새로 짓는 것이다.
기후 우울증이라는 단어가 생겼다고 한다.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환경과 관련된 기사를 더 이상 보지 않게 된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우울하고 힘들 때 필요한 건 함께 할 친구와 동료들이 아닐까? 그러고보면 나도 친구들을 따라 서울의 재개발 투쟁 현장과, 제주 강정마을과, 강원도 속초와 평창에 갔다. 너무 절망하지도 너무 아프지도 않고 같이 지켜보자. 그러기 위해 친구들을 모으자. 우리들의 콩깍지를 만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