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인권·국제 연대
🌱릴레이 정치 에세이는?
페미니스트들이 선거를 앞두고 느끼는 고립감에서 벗어나 각자의 삶 속에서 길어올린 우리가 바라는 가치, 정책, 정치에 대한 글입니다.
🔅돈 안되는 것들이 지지받는 세상, 어린 것들이 존중 받는 세상을 원해
가을(한국성폭력상담소 콩깍지 프로젝트)
“근데... 돈은 어떻게 벌려고요?”
대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분과 점심식사를 하다가 시민단체 활동가로 지내고 싶다는 내 말에 돌아온 대답이었다. 대학원 과정 내내 나를 쫓아다닌 물음은 앞으로 연구자로 살 것인지, 활동가로 살 것 인지였다. 학부에서 총학생회를 비롯한 활동에 열정을 쏟았을 땐 이론 없는 실천이 위험하다 느꼈는데, 막상 대학원에 들어와 보니 내가 실천 없이 연구만 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알게 됐다. 한국성폭력상담소과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WeTee의 구성원으로 활동하며 현장에서 대화하고 연대하는 일들이 얼마나 심장 뛰고 값진 일인지 여실히 느꼈다. 여전히 연구도 나에겐 중요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나의 방식이 꼭 엉덩이 붙이고 앉아 하는 공부만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그래서 지금은 스스로를 ‘연구활동가’로 이름붙이며 연구와 실천을 병행하며 지내고 있다.
지난 3월 8일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제39회 한국여성대회 참여자들이 거리 행진을 하고 있다.
그런데 어딜 가든 이런 나를 의아해하는 시선들이 있다. ‘연구 실적 내기도 바쁜데, 왜 굳이 활동을 하려고 해?’, ‘젊은 나이에 일찍이 엘리트코스 밟으면 성공할 수 있어’, ‘인문사회 대학원 나와서 어떻게 돈 벌지를 생각해야지.’ 연구만큼 실천도 중요하다고, 그래서 느리더라도 나만의 길을 가겠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나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붙은 시선들이다. 이런 시선들이 단지 나의 피해의식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돈 안 되는 것들이 지지받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빠르고 효율적으로 성공적인 ‘갓생’을 사는 것이 칭송받는 세상에서 실적 경쟁을 미뤄두고 돈 안 되는 사회운동을 하며 천천히 가겠다니. 이런 세상에서 내가 지지받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시민단체들의 회계 투명성을 명목으로 감시와 견제를 강화하고, 집회·시위의 자유를 억압하려는 지금 시대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돈 안 되는 사회운동을 한다고 했을 때 누군가에게 돈은 어떻게 벌거냐는 질문을 듣는다면,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의 탓이라고만 할 수 없다. 생산적인 것, 돈 되는 것만을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와 문화 탓일 것이다. 목숨 걸고 달려야 하는 ‘빠른배송’, ‘새벽배송’이 국제적 자랑이 된 나라, 돌봄노동이나 아르바이트, 비정규직 노동자는 다른 노동보다 하찮은 취급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사회, 무엇이든 안전보다는 빠른 게 장땡인 구조, 돈 없이는 돈 안 되는 것들을 꿈꿀 수 없는 세상이라 그럴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생산적이지 않은 것들을 쓸모없다 여기는 세상에서 나이가 어린 사람들은 이 사회가 규정한 시기 이전에 돈벌이를 할 수 없는, 그래서 가치 없는 사람들로 여겨진다. 어린 사람들을 ‘미래세대’라고 칭하는 것이 ‘지금은 쓸모없고 나중에 쓸모 있어질 사람들’이라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유다. 우리가 어릴 때 듣던 ‘어른이 되면’이라는 말은 때론 우리를 꿈꾸게 하기도 했지만 나의 권리와 행복들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지 않았던가.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WeTee의 겨울 다락방 소모임 <학교에서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은>에서 참여자들이 학교에서 겪는 어려움에 관한 포스트잇을 붙이고 있다.
최근 내가 활동하는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WeTee에서는 <학교에서 활동가로 살아간다는 것은>이라는 주제로 소모임을 가졌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청소년이 어리다는 이유로 그들의 말과 행동이 미성숙한 것으로 여겨지고 무시된다는 것에 크게 공감했다. 예를 들어, 학교의 가장 중요한 일들은 학생들을 빼고 논의된다는 것, 언제나 교사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운신할 수 있다는 것, 나의 목소리가 어른들에겐 하찮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일들이다. 2018년 이후로 활발해진 ‘스쿨미투’ 물결 속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학교로부터 들어야 했던 말은 “너희가 아직 어려서 그래”였다. 자신의 성적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을 고민하고 정체화하는 청소년기의 성소수자들이 지겹게 듣게 되는 말 역시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이다. 최근 일 년 사이 서울시와 충남에서 일어난 학생인권조례 폐지 움직임 역시 나이 어린 사람들을 무시하는 문화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지금의 어른들은 학생으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마저 없애려 하고 있다.
나 역시 청소년이었을 때, 그리고 20대 여성으로 사는 지금까지도 단지 어리기 때문에 감내해야 했던 부당함을 기억한다. 억울한 상황에서 아무리 항의해도 무시당하다가 어른이 나타날 때서야 조용해지던 상황들, 아직 어려서 결혼할 생각이 없는 거라는 말들, ‘어린 애가 기특하다’, ‘은근히 할 말 다 한다’, ‘당돌하다’는 미묘한 나이 차별적 시선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어리게 보진 않을까 몸을 꼿꼿이 세워야 했다.
그때의 내가 원했던 건 나를 기특하고 당돌한 미래세대로 봐주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동등한 주체와 의지를 가진 ‘현재세대’로 인정하는 사회였다. 그런 사회였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평등한 대화를 나누고, 나의 당연한 권리들을 존중받고, 나의 행복을 나중으로 미루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쓸모없어 보이지만 소중한 것들을 들여다보고, 어리지만 가치 있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세심하고 따뜻한 연결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