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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교육

여성주의적 담론생산을 위한 연구와 반성폭력을 위한 교육 사업을 공유합니다.
[2008]성판매 여성의 낙태와 재생산권
  • 2008-10-10
  • 3036
성판매 여성의 낙태와 재생산권: 다양한 삶의 조건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막달레나의집 현장지원센터 주희

 
현재 한국사회에서 낙태는 범죄 행위이다.¹ 법의 언어를 빌어 여성들에게 피임을 열심히 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하지만 여성이 피임에 관한 주도권을 갖는 것이 어렵다는 논란은 차치하고라도 성공률이 100%인 피임법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사회에서 낙태가 범죄라는 명제는, 아이 낳을 계획이 없는 여성은 남성과 섹스를 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근엄한 경고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아이 낳을 계획과 무관하게 남성과의 섹스가 ‘일’인 여성에게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일까? 출산으로 연결되지 않는 섹스를 하곤 하는 ‘이런 여자’에게 ‘아버지’는 경고조차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여자’는 출산으로 이어지는 섹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쉽게 간주되기도 한다.

비르지니데팡트는 지형의 실상은 전혀 고려되지 않고 오로지 지배층의 정치적 의도에 의해 구획된 아프리카 지도를 그리는 방식으로, 여성의 몸에 ‘어머니-창녀’라는 이분법의 선이 그어져 있다고 이야기했다. 가부장제 정치학에 의하면 ‘어머니’와 ‘창녀’는 멀리 떨어진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여자들이다.

이에 대해 ‘많은 성판매 여성들이 어머니이다.’ 혹은 ‘어머니이기 때문에 섹스 노동을 지속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기 보다는, 사실 남자들도 ‘어머니’와 ‘창녀’를 구분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실제 우리 동네에는 mother fucking, 혹은 친구 어머니와의 섹스를 동경하는 성적 판타지를 가지고 업소를 찾는 남성이 상당히 많다. 이들 남성들은 이곳에서 애인을 찾는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성적 대상화된 상대와 성적 모험을 하기 위해 업소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²

이처럼 성판매 여성의 낙태는 보통 너무나 당연시 되어 재생산권 자체를 부정당하는 식으로 여성들의 낙태와 재생산권 논의에서 소외된다. 또한 “니들에게 낙태권을 허하면 맘대로 몸 굴리고 다니게?”라는 댓글이나 부르는,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여성주의자들의 정치적 논의를 희석시키는 사례로 오인되기도 한다.
 
성판매 여성의 재생산권으로서의 낙태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일’, 섹스 노동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업주의 손에 이끌려 허름한 병원에서 낙태 시술을 받고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강제적으로 ‘일’을 지속하는 여성들도 많지만, 또 한편에선 많은 여성들이 노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상황/결심 때문에 스스로 낙태를 선택하고 있다.

물론 이들의 상황/결심 자체에 포악한 일수업자라든지, 악덕업주, 기둥서방 등 폭력적인 권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지독한 불경기 탓에 선불금이 없어지거나 선불금의 액수가 적어졌기 때문에 많은 성산업 종사 여성들이 일수를 쓰고 있다. 매일 일정한 액수의 돈을 갚아나가야만 하는 일수 빚의 특성상, 매일의 일수 도장은 삶의 근면함을 증명하는 칭찬 도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높은 일수 이자를 받아먹는 일수쟁이들은 “나 돈 없어서 쩔쩔매고 있을 때 돈 빌려준 (고마운)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한 “나는 남의 돈을 빌려 썼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스스로의 평가, 신용에 대한 프라이드는 여성들이 자아를 구성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이러한 외부적 상황-내부적 결심은 그들이 노동을 지속해야만 하는 당위를 만들어내고, 이들은 열 달 동안 돈을 벌지 않을 수 없기에 낙태를 선택한다.

실제 한 여성은 돈을 벌기 위해, 일수 빚을 갚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거의 일 년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피임약을 먹다가 그만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기도 했다. 너무 오래 생리를 하지 못해서 피임약을 복용하는 것과 상관없이 피가 터진 것이다. 처음엔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었지만 이 사건을 자신의 근면성, 책임감을 증명하는 징표로 여긴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노동을 지속하고자 하는 개인의 현실적 결단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외부적 상황-내부적 결심에 의해 낙태를 결심한 데에도, 그 이후에도, 문제는 빈곤에서 기인한다. 이들은 가난하기 때문에 ‘시장’에 나와 있는 다양한 산부인과 병원의 수준을 선택하는 것에 제한이 있다. 많은 동네 여성들이 이용하는 단골 병원은 접근하기 편리하나 시설과 평판이 좋지 않다. 인터넷으로 가격과 품질을 꼼꼼하게 비교해 가면서 콘돔과 화장품, 옷 등을 구입하는, 더 이상 정보력에서 소외되지 않은 많은 여성들이 산부인과 병원의 시장 경쟁력 차이를 모를 리 만무하다.

최근 동네 언니와 강남의 산부인과에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이 언니가 감동하는 부분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고민을 함께 나누어 주는 친구가 있다는 점이 아니라 유명 연예인들이 아이를 낳는 병원에서 검진을 받고 왔다는 점이었다. 홈페이지에서 그 병원의 주요 고객인 유명 연예인들의 얼굴을 확인했다면서 드러내는 기대는, 세련된 담당의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이어졌다. 내가 그랬듯이 고급스러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잠시 주눅 들어 보이기도 했지만, 비가 엄청나게 쏟아지는 날 둘이 작은 우산 하나를 쓰고 강남의 병원에 갔던 기억을 ‘호강한’ 기억으로 재현해 내고 있었다.
 
이처럼 여성주의 정치학은 가부장적 법에 대항해 ‘여기 낙태를 경험한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전시하는 것을 넘어서, 여성들 간의 정치한 차이, 차이를 발생시키는 다양한 권력들에 대해 고민해야 할 것이다. 다채로운 여성들의 인생에는 임신, 출산, 낙태를 덜 중요한 것으로 만드는, 더 중요한 여러 옵션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낙태는 범죄행위이다’라는 명제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은 많겠지만 ‘성판매 여성의 낙태도 범죄행위인가?’라는 질문에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많을까? 이런 면에서 가부장제에서 제외된 여성의 이야기를 통해 낙태와 재생산권에 대한 논의를 확장시키려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시도는 흥미롭다. 이제 남은 것은 이러한 조각 이야기들이 모여 만든 찬란한 무지갯빛 연대일 것이다.
 
 
 
각주-------------------------
1모자보건법에서 강간에 의한 임신, 산모와 태아의 ‘건강’상의 문제 등에 한해 낙태를 제한적으로 허용하고 있지만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하고, 낙태를 금지하는 현행 형법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2이런 맥락에서 많은 ‘이성애자’ 남성들이 mtf 트랜스젠더와의 섹스에 열광하고 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계간지 「나눔터」61호(2008년 가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