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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1일 "명랑하라 팜프파탈"
  • 2008-01-18
  • 3442
 
다음 소설읽기모임에서는 시를 읽기로 했습니다.
김이듬의 시집 '명랑하라 팜므파탈'!!
 
유령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드러머와 나,
화장실에 고양이를 가두지 마세요,
 
제목의 시들과 함께 합니다.
2008년 1월 31일(목) 늦은 6시
상담소 2층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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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레싱 「다섯째 아이」
 
날짜 : 2008. 01. 17(목)
장소 : 상담소 2층
참여 : 지선, 새벽빛, 오매, 당고, 새빛 (불참 : 여름) (정리 : 새빛)
 
문체 : 줄거리 요약 식의 말하기(보여주기가 아닌)문체에서 건조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받았고 사건 전개가 빨라서 빨리 읽힌다. 고슴도치의 우아함이 독자와 작가의 주고받기식 묘사였다면 이 책은 전지적 시점의 일방적인 작가 말하기 식이어서 재미가 없었다. 사실주의적인 묘사와 말하기를 통해 신비스럽고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극대화 되었다. 무서워서 오래 들여다보고 싶지 않아서 빨리 읽힌 것도 있었다.
 
내용 : 많은 문제의식을 갖고 출발한 작품이며 많은 물음표를 던져준 작품이다. 임신, 출산, 수유, 양육, 가족관계에 대한 섬세한 포착이 있었다.
 
* 벤은 누구인가? 
 
(호감을 느꼈다는 여름에게 묻고 싶습니다. ^^) 작가가 해리엇의 시선으로 벤을 세부적으로 해부하는 듯한 왜곡되고 과장된 시선이 공포스러운 존재로 느끼게끔 만들어 주었다. 지금의 종족과 전혀 다른 미개한 종족인 것처럼 설정한 것은 문명인과 비문명인의 극명한 대결구도를 통해 우리가 문명인임을 상대적으로 부각시켜주어 스스로를 다시금 문명인으로서 되돌아보게 만들고 그러나 그 속에 공통적으로 또아리를 틀고 있는 인간 근원의 공포나 분노, 잔인함으로 때때로 두 종족을 일치화시키면서 비문명화된 벤을 비웃던 우리들이 비웃음거리가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준다. 벤의 비문명성은 관계맺기 능력이나 인간으로서의 온기나 인간적인 시선이 결여된 것으로 표현되고 있고 뱃속에서부터 해리엇을 해하는 것을 통해 문명화되는 것(사회화)을 거부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벤을 통해 행복한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파괴되는 것으로 전통적인 가족의 가치가 우스개로 전락한다.
 
* 벤이 다섯째 아이로 설정될 수밖에 없는 이유 
 
가정의 단란함이 무리없이 지속될 수 있다고 생각한 완전한 가족구성으로 최대 아이의 수가 네 명이 한계라고 생각한 것일까? 작가가 어느 정도 완성된 모습의 가정을 보여주고 싶어서 네명째까지 약간 무리를 두면서(네째 아이도 피임에 실패한 채 예상보다 일찍 태어났다.)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벤이 다섯째 아이이며 네째 아이에 연이어 피임에 실패한 예고없는 아이라는 설정은 불행의 씨앗일 것이라는 복선을 깔아준다.
 
* 해리엇 되어보기 
 
결혼과 가정이라는 테두리로 개개인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는 것은 개개인의 각기 다른 욕망과 허상에서 비롯된 모래성임을 해리엇은 믿지 않았으므로 결혼을 매개로 타인과 일체감을 느끼며 행복을 이루려 하였고 네째 아이를 낳기까지 모래성은  단단한 벽돌성으로 실현되는 듯 보였다. 융화될 수 없었던 개별 가족(부모가 둘인 불완전한 가족조차)을 한 자리에 모아 축제를 벌이며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으로 전통적 가족의 의미는 새삼 되살아 날 수 있는 듯했다. 하지만 연달은 자연피임의 실패는 원치 않는 아이를 출산하게 함으로써 해리엇을 지치고 신경질적이게 만들었고 감당할 수 없는 벤의 탄생은 해리엇이 임신했던 와중의 심리를 반영하는 '개체-여기서는 아이이기보다 타자화되고 대상화된 돌연변이나 변종 등으로 표현된다'로 의미를 갖는다. 해리엇이 끊임없이 뱃속의 아이가 정상의 아이가 아닌 자신을 해하는 불쾌한 물질로 느끼는 것은 실제 벤이 그러한 아이였기 때문인 이유도 있겠지만 해리엇에 대한 주변인의 외면에 대한 분노와 좌절감과 고립감의 심리가 벤에게 영향을 끼치고 고통스러운 심리를 고스란히 받아야만 했던 벤의 저항일 수 있다. 이것은 벤과 해리엇의 싸움이 아니라 해리엇의 분노와 좌절감과 고립감에 대한 해리엇 자신과의 싸움이었을 수 있다는 말이다. 실제 벤이 이상적인 범위를 약간 벗어난 독특한 인물인 것은 맞다고 책 속 많은 사람들이 인정했지만 개나 고양이를 죽이거나 약탈과 강도짓을 통해서 혁명적인 일로 성취감을 맛보고 있고 집을 곧 떠날 것이며 반사회적인 그들의 무리가 될 것이라는 해리엇의 짐작이 기정화된 사실처럼 그려지고 있다는 것은 벤의 모습에 대한 해리엇의 묘사를 통해 반대로 해리엇의 확대 과장된 뒤틀린 심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벤을 병원에 유기하는 모습에서 벤에게서 극대화 되어 보여지는 원시적인 잔인함의 씨앗(격세유전론)을 문명화된 인간(친척들과 데이비드, 해리엇, 좋아하는 아이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해리엇이 다시 벤을 데려오는 모습에서 토론자들은 매우 격앙된 감정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현했는데 처음에는 양극의 모습으로 나뉘었다. 죄의식이냐 모성본능이냐.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닌 것처럼 지나친 변종이며 타인과 소통할 수 없는 구조로 태어나 엄마인 나를 해하고 전혀 소통할 수 없다면 그런 아이로 인해서 나의 인생과 다른 가족의 인생을 망칠 수 있다면 그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권리가 엄마에게 있다. 모성이 강요당하는 사회적인 인식에 의해서 엄마가 희생당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에 반해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이라는 것은 시대가 변해도 무너져서는 안되는 절대적 신념이다. 부성에 관대한 시대적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지 모성이 강조되는 시대적 인식이 결코 무너져서도 안된다. 부모로서 아이를 유기하거나 방치하거나 죽인다는 것은 어떤 아이든지 어떤 사회든지 용납할 수 없는 도덕의 선 밖의 일이다. 부모에게 아이를 받아들이거나 키우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해도 아이는 배우자나 친구와 다르게 부모와 평등할 수 있는 인격체가 아니라 보호되고 양육되어야 하는 존재이므로 독립의 시기를 맞이하기 전까지 부모의 역할과 책임은 당연하다는 입장이 있었다. 팽팽한 의견대립의 가운데 자식을 버린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느냐 나라도 키우고 싶은 자식과 키우고 싶지 않은 자식이 있을 것이라는 점에,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모자식 관계에서도 극단의 증오의 감정이 싹틀 수 있다는 점(그러한 분위기를 생산하는 다른 가족들의 역할에도 문제점이 있다)에는 모두 동의하며 또한 타인의 가정에 자신의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판해 비난할 수 있느냐는 권리에 대한 논쟁도 있었고 모든 담론은 각자의 머릿속에 물음표를 남긴 채 일단락 되었다.(논란은 감당할 수 없는 아이에 대해서 주변에서 공감해주며 버리라는 말을 할 때 나같으면 홀가분하고 한편으로 한시름 놓은 기분으로 기분 좋을 것 같다는 생각과 반대로 나 같으면 오히려 화가 날 것이고 그래도 니가 엄마인데 아이를 키울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해줄 때 나쁜 마음을 먹었던 부모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시 일깨워주어 다시 한 번 함께 살아보기 위해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말이 되어 오히려 기쁠 것 같다는 의견차이를 보이며 시작되었다.)
 
* 데이비드와 친척들에 대한 이해와 비판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무분별하고 문란한 그 시대 젊은이들의 성생활과 가족개념에 대항해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방법으로 가정을 만들고 꾸려나가는 방법(커다란 집과 다산으로 상징되는)으로 붕괴되는 가치를 복구하고 보전하고자 했다. 그 해결책은 이상적인 가정에의 욕망이 그야말로 이상에 불과한 환상이라는 현실적인 한계와 인간이 불완전한 유전자이기에 예기치않은 불행은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에따라 예견된 불행을 맞이한 부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데이비드는 다섯 아이를 낳은 것에 대한 대가로 경제적으로 허덕이며 밤낮으로 일하고 지나친 노동강도에 시달리며 대가를 받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대신한다.(이에 통쾌하다는 입장과 책임회피라는 입장이 반반) 벤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마음에 들지 않는 자식을 가족구성원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현대 가부장적 사고관과 일치한다) 해리엇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다. 모든 선택이나 입장이 해리엇과 같은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해리엇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지탄받아야 마땅한 모습이다. 큰집과 다산으로 상징되는 결혼과 출산을 무리하게 감행한 장본인인데 그에 대한 책임은 미미할 뿐이다.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고통을 맛보고 육아를 담당하는 체험적인 현실에 놓인 해리엇과 달리 데이비드는 한발짝 떨어져서 추상적으로 아이들에 대해 책임진다. 모성의 희생을 숭고하게 여기는 사회적인 시선에 구속되어 있는 해리엇에 비해 부성에 관대한 사회적 시선에 얽매이지 않아 데이비드는 육아에 자유로운 편이다. 그러므로 벤을 병원에 유기하는 일에 친척들의 동조에 힘입어 직접 나설 수 있었고 해리엇이 벤을 다시 데려오자 육아를 해리엇의 몫으로 돌려놓고 나중에는 아예 점점 가정에 소홀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큰 집을 벤의 무리가 점령하고 피로하고 지친 마흔다섯의 해리엇이 소극적인 모습으로 약간 그들에게서 떨어져 모든 가족들에게서 소외되어 있는 모습에서 슬픔이 느껴졌다. 큰 집과 가정에 대한 모든 책임을 마지막까지 해리엇이 지고 있는 듯 보였다. 이 모든 것이 해리엇의 선택에 대한 대가라고 하기엔 타인의 몫이 해리엇에게 이중삼중으로 가중되어 있었다. 데이비드의 모습은 가정에서 남성의 소극적인 책임감에 대한 비판을 친척들의 잔인한 소외와 무관심과 외면은 사회적 시선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여성의 시선으로 읽기
 
출산과 양육에 소극적인 남편 데이비드의 모습과 벤이 태어남으로 인해 발생한 친척들의 외면은 모든 책임을 해리엇에게 돌리는 듯 보였고 그로인해 직접적으로 아이와 관련한 유일한 책임자가 된 여성이 모든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 당하는 모습을 통해 모성에 대해 부조리한 사회적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결혼 후 여성의 역할이 단지 출산과 양육에 한정될 수밖에 없는 모습(가족들의 책임, 외면으로 인해 결과적으로 강압인 셈)이 안타까웠다. 작가는 다산에 관해서 부정적인 것일까?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기 원하는 사람에게는 다산이 부정적일 수 있다. 작가는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전통적인 사고관에 의한 가정 이루기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기 쉬운 이상적인 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성인 해리엇의 인생에서 결혼과 다산을 선택함으로써 그 대가로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뤄야 했는지 변종 벤의 출산으로 인한 해리엇을 제외한 사람들의 외면을 통해 극대화시켜 보여주고 있다. 해리엇이 결혼과 다산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행복한 가정이라는 테두리는 결코 데이비드와도 공유할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인 이상이었다는 것이 소설 속 부부간 대화의 변화를 통해 보여진다.
 
* 그밖의 문제의식 
 
벤을 몽고인으로 표현하는 데에 대한 거부감, 소설이 가지고 있는 진화라든지 사회와 가족 이데올로기라든지 인간성의 근원이라든지 하는 여러가지 축은 이 소설을 매우 다채롭고 매력적으로 만든다, 레싱의 의견처럼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가치는 과연 완전히 붕괴되어 버린 것일까 다섯째 아이를 낳았어도 가족이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었을까? 이런 미련, 정상이라는 기준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유치해지고 배타적일 수 있다. 왜? 내가 누리고 있는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 전통, 정상사회라고 규정된 이데올로기가 다른 존재를 '비정상'으로 억압하고 지하세계로 몰아넣는 무자비함을 소설은 보여준 것이 아닐까? 소위 정상 사회가 비정상에 대해 대하는 모습은 두 가지다. 벤처럼 위협적인 존재는 몰아내고, 에이미처럼 힘없는 존재는 불쌍하다며 보호하지만 결국은 인형으로 취급하는 것(?)
 

댓글(3)

  • 정리만
    2008-01-30

    옴 그날 얘기 그냥 정리만 했을 뿐인데... 빛언니 정리도 좋았어요.

  • 2008-01-30

    그르치? 이것은 그냥 정리가 아니야. 대단한 새빛

  • 새벽빛
    2008-01-25

    아.심도깊게 분석을 했네요. 새빛 멋져. 그때는 읽히지 않았던 모순들 까지 잘 잡아준듯해.수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