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1일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안녕하세요, 벌써 3월 모임을 공지하게 된 소설읽기모임입니다.
다음 모임은
3월 11일 화요일 늦은 7시
함께 읽을 책은 박완서, "아주 오래된 농담" 입니다.
나날이 열띤 토론으로 살쪄가는 소설읽기모임-
봄 소식과 함께 즐거이 만나요!
소설모임 참여한지 몇 달만에 처음으로 모임후기를 쓰는 여름입니다. 헤헤헤. 언제나 소설모임은 여러가지 얘기가 오고가요. 소설을 읽으면서 다른 부분들을 발견하고 나누는 것이 묘미라고 할 수 있죠. 하여튼 이번 책은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 였어요. 제목이 벌써 아 기대된다 이런 늬앙스가 오죠?
단편 '침이 고인다'의 주인공 20대 중반의 학원 강사 박선생은 어쪄다 자신의 원룸에서 후배가 함께 사는 것을 허용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맘이 왔다갔다하여 후배를 갈구고 후배는 떠난다. 후배가 박선생에게 남기고 간 것은 '후배가 어릴 적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에게서 받았다는 껌의 반쪽'뿐이다. 박선생은 껌 반쪽을 입에 넣고 "세상에" "아직 달다"한다.
김애란 소설 속의 20대 여성들의 일상은 세월을 담고 눅눅해진 껌처럼 재미없고 피곤하고 찌들어 있지만 이 상황을 이겨낼 인생의 한줄기 단맛을 발견해 내고 있는 듯하다. 당고는 이러한 김애란의 소설쓰기에 대해서 '성찰적인 면에서 노쇠하다'고 이야기 했다. 어찌이리도 체념적이란 말인가. 평론가는 이 부분은 '투명한 체념의 미학'이라고 했단다. 체념은 포기라기 보다는 자존을 유지하는 삶의 방식으로 볼 수 있다 한다.
김애란의 주인공들은 다른 이야기속에 놓여있음에도 그녀들이 한줄기 삶을 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부분에서 아직은 20대 작가의 한계라는 얘기도 있었고 여성작가들이 필연적으로 '일상으로 부터 내가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 작업하는 것을 아닐가?'라는 얘기도 나왔었다.
또 나의 몸이 엄마가 팔았던 수천개의 만두로 빗어진 게 아닐까라는 부분과 엄마의 칼질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고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이 무럭무럭 자라났다는 부분은 성장에 관한 재미있고 의미있는 표현으로 꼽혔다.
김애란은 현실에 존재하는 사실적인 공간들을 소설속으로 가져오고 집과 학원 등에서 일어나는 일상의 이야기들도 채워나간다. 특히 '방'이라는 공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다. 주인공들이 가진 거라고는 이 방밖에 없는 데 (20대들이 이뤄놓을 수 있는 것은 고작 방한칸이 아닐가?) 이것조차도 언제나 불안하다.
방은 외부와 단절된 나만의 세계이고 소통불가의 영역이면서도 아직은 달고 불이 켜져 있는 곳이다. '소통불가의 공간이라는 것을 극명히 보여줘서 매력적이었다' '소통의 실패나 단절이 폭력이 되지 않는 것이 진정성있게 다가왔다'라는 의견이 있었다.
김애란은 도리스레싱에 비하면 체제순응적이라고 평가되기도 했고 정이현이 소비적인 느낌으로 허탈함을 느끼게 한 것에 반해 일상을 너머선 뭔가를 느끼게 해주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또 우리들도 경험했을 법한 일들을 '명징하게'표현하고 있다는 얘기도 나왔었다. 이주노동자를 보고 흠칫 놀라고 그들이 묵는 곳에서는 하룻밤을 자고 싶지 않다는 부분에서 어느 선 이하로는 추락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드러낸 것이 아닐가 아직은 확장되지 못한 20대 작가의 한계가 아닐가하는 얘기도 나왔다.
김애란은 무엇보다 운율있는 언어로 신명나게 이야기를 읽을 수 있게 해주었고 사물과 공간, 인물이 동화되어 서로 화해하고 포옹함으로서 친근함을 느낄 수도 있었다.
요즘의 남성작가들은 현실의 공간을 벗어나 환상적인 곳으로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그곳에서 소통되고 있지만 여성작가들은 방으로 돌아가고 현실에서 나를 부여잡고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들의 소통을 삐그덕 거리기 까지 한다는 얘기를 했다.
소설모임에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더라도 완벽히 소통되지는 않았으리라 하지만 우리는 꺼내놓고 이야기하고 전하려고 노력했다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도록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적절한 방이 되어 주었던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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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침이 고인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20대의 이야기이고 <88만원 세대>와 함께 읽으면 갈 곳 없는 세대적 특징이 참으로 잘 나타나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김애란의 글에 대해서 가끔 매우 모범생스럽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는데 나에게 그 말은 결국 깔끔하게 잘 씌어져 있다는 뜻인 거 같다.
그녀의 소설은 문학 또는 글쓰기에 대해 매우 잘 교육받거나 훈련받았다는 느낌을 주며, 그녀가 이른바 '투명한 감성'이라고 표현되는, 매우 정제되고 깔끔한 표현들을 즐겨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이 매우 궁상맞거나 구질구질하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20대의 갈 곳 없는 삶, 희박한 존재감, 서울 변두리 또는 지방의 삶에 대해 적확하고도 섬세한 묘사를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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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침이 고인다>라는 단편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소설에 끌린 것은 바로 이 소설이 '소통의 실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과 2008년에 걸쳐 나는 어느 때보다도 개인적으로 소통의 실패를 자주, 그리고 깊이 경험했다.
상담 활동을 통해서 경험하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또는 모임에서 경험하기도 했다.
<침이 고인다>에서 주인공인 20대의 학원강사 여성은 별로 친하지 않은 후배와 우연찮게 함께 살게 된다.
자신의 방에 누군가를 들여놓고 싶지 않아 보였던 그녀가 후배와 함께 살게 된 것은, 후배가 도서관에서 인삼껌 한 통을 쥐어주고 사라져버린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내밀하고도 아픈 기억에 대해 말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배는 10년 전의 인삼껌 하나를 반으로 갈라 그녀에게 주고 후배의 상처를 얼떨결에 공유하게 된 그녀는 후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차츰 그녀를 닮아가는 후배의 모습에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한 듯한 불편함과 당혹감을 느끼며 후배를 떠나보내게 된다.
김애란 소설에는 온통 '방'이 등장한다.
그곳은 '자기만의 방'이긴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던 글쓰기를 위한 방도 아니고 자기 존재를 성장시키기 위한 방도 아니다.
그저 살기 위해 필요한 방,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방, 물이 새는 반지하나 둘이 쓰기엔 좁은 불편한 방이다.
현재 20대들이 도시에서 살아갈 때 느끼게 되는 자신의 희박하고 사소한 존재감만큼이나 부유하는 방, 안락하지도 않고 때로는 공허한 그런 방, 하지만 자존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방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 방에 다른 사람이 들어올 여지는 크지 않아 보인다.
평론가는 해설을 통해 그녀의 방에서 여자들의 연대는 실패한다고 썼다.
확실히 이들은 뭔가 적극적으로 연대하거나 운동하거나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그리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다른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떠나는 후배를 적극적으로 잡지 않으며 혼자 남겨진 자신을 씁쓸히 위로할 뿐이다.
그럼에도 김애란이 이들을 보는 시각은 매우 따뜻하며 앞으로 손을 내밀거나 이해하게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나는 혼자 생각해본다.
왜냐하면 연대하기 위해서는 소통해야 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는 아마도 소통에 실패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번 소통에 실패한다고 해서 영원히 실패한다든지, 이제 그녀의 방에 아무도 들어가거나 들여놓지 않을 거라든지, 이들의 잠시의 동거가 단물 빠진 껌에 불과하다든지 하는 도 아니면 모식의 판단은 위험하다.
소통의 실패가 감정이나 사고나 배려의 부재나 폭력으로 읽혀져서는 안 된다.
소통이 좌절되었을 때 어느 한쪽의 폭력이나 배려 없음이나 생각 없음으로 읽히는 것은 다음 번의 소통이나 소통의 실패에 대한 성찰을 가로막는다.
나는 김애란이 집에 얹혀 살게 된 후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집주인인 선배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서술했던 것이 인상깊었다.
우리라면 누구라도 피해자의, 약자의, 좀 더 가지지 못한 자의, 동정심을 유발한 만한 사람의 시각에서 이 이야기를 재구성하려고 했을 게다.
누가, 도대체 세상의 그 누가,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겠는가? 또는 되고 싶어하겠는가?
하지만 그녀가 화자를 집주이자 선배로 설정함으로써 이 소통의 실패를 막연한 폭력의 결과나 권력관계의 문제만으로 해석하는 것을 적당히 막아주었다.
나는 최근 몇몇 소설을 읽으면서 등장인물들 간의 순간적인 합일이나 소통의 완성에 매우 불편해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그 소설들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믿을 수 없어! 이렇게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단 말이야?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너희는 정말 그런 식으로 소통하고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단 말이야?'와 같은 것이었다.
나는 진짜, 정말로 궁금했다.
내가 경험했던 소통의 실패는 무엇인가, 나는 왜 실패한 것인가, 실패한 다음은 무엇인가, 끝인가?, 아니면 이 다음에 다른 실패가 있을 것인가?, 이 다음에는 성공할 것인가? 등등이 진정 궁금했다.
소통의 실패에 대해서 가장 열심히 생각한 소설가는 김연수가 아니었나 싶다.
또 다른 버전의 소통의 실패에 대해서 김애란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반가웠다.
평론가는 해설에서 껌이라는 것은 씨읍고 있으면 단물이 나오지만 언젠가는 단물이 빠지고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 그래서 또 갈구하게 되는, 말하자면 소통을 원하다가 소통이 지겨워지고 없으면 또 갈구하게 되는 욕망의 상징이라고 봤는데,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지 않을까?
버리고 간 어머니가 준 10년 전의 인삼껌이 '아직도 단' 것은 '기억'의 문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0년 전의 기억을 꺼내어 되짚어보면 퇴색되고 누락된 것들이 많겠지만, 아직도 '달기도 하다'.
후배가 인삼껌을 가지고 주인공에게 소통을 시도한 것처럼 이 기억들을 가지고 또 다른 소통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소통은 쉽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처럼 '제발 내게 그런 슬프고 진지한 기억을 이야기하지 말아줘' 하는 기분으로 소통에 응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궁금한데? 더 얘기해 봐' 하는 기분으로 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나도 그런 기분 느껴봤어' 하는 마음으로 소통에 나서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종국에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언젠가 한번쯤은.
주인공도 언젠가는 지금의 실패한 소통의 기억을 가지고, 생각하면 여전히 단 인삼껌의 달콤씁쓸한 기억을 가지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소통을 시도할 순간이 올 것이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머뭇거리고 있지만 결코 차갑지 않다.
고민하고 고민하고 고민하고 있을 뿐이다.
실패하고 실패하고 실패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실패한 소통의 기억을 떠올리면 나는 사실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내게 나중에 씨읍어볼 인삼껌 하나도 남기고 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매우 가슴이 아프고 내가 패배자라고 느껴지고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이란 두려움에 시달린다.
하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소설 속의 그녀도, 그리고 나도, 다시 한번 시도할 거라고 짐작한다.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아마도 또다시 실패하겠지?
하지만 더 잘, 또는 좀 더 다르게 실패하지 않을까?
나는 조금쯤 기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다음 번 실패에 대해, 그리고 거기에 따라올 달콤한 기억에 대해.
댓글(1)
오.여름.너의 시니컬하고 짧은 말들속에 이렇게 깊은 생각이 있었다니. 놀라워. 글을 읽으면서 한번더 생각하게 됐어. 소통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