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 말하기’의 거듭되는 진화, 어디까지 갈 수 있나?
지난 11월5일(목) 상상마당에서 진행된 제6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이하 말하기대회)를 보면 ‘성폭력말하기’가 어디까지 진화할 수 있는가?를 되묻게 된다. 2003년에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제1회 말하기대회는 “들어라 세상아! 나는 말한다!”라는 컨셉으로 비장하고 애끓는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처음에는 듣기참가자들의 주민등록번호까지 일일이 확인하면서, 철저한 보안과 비공개로 진행된 말하기대회는, 4회 때에 이르러 “그녀들, 광장에서 별별 말하다”라는 컨셉으로 탁트인 광장 진출을 시도하게 된다. 5회 때가 되면 ‘언어’를 매개한 ‘말하기’만을 시도하던 말하기대회는, 피해생존자의 말하기와 이를 음악과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아티스트와의 만남으로 문화공연으로서 ‘말하기’라는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2009년 6회에는 피해생존자들이 공연하는 노래와 연극, 춤이 어우러지는 흥겨운 문화공연으로 거듭나면서, ‘언어’를 공유하지 않아도 더 뜨거운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성폭력말하기’의 경계를 질문하고 있다.
직접 노래를 만들고 공연하는 여성주의 문화창작자로서 피해생존자들!!
피해생존자들이 자신들의 성폭력경험을 직접 노래로 만들고 공연한다는 기획을 세우면서, 한국성폭력상담소 내부에서도 여러 가지 우려들이 있었다. 많은 듣기참여자들 앞에서 말하기참여자들이 그저 자신의 사연을 말하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 자리인데, 과연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고 공연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말하기참여자들은 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뿐만 아니라, 즉석에서 함께 연극을 할 것을 제안하고, 스스로 즉흥춤도 추며,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영상을 촬영하면서, 이런 걱정과 우려가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피해생존자들은 단지 ‘나약한 피해자’로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직접 공연하는 “여성주의 문화창작자”로서, “끼있는 언니들”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울지 말아야지’ 다짐해도, 무대에 서면 절로 눈물이 나오는 자리...
성폭력을 당한 이후에 틈틈이 기록했던 자신의 일기를 읽던 한 참여자는 끝내 낭독을 다 마치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서른이 훌쩍 넘어 비로소 여덟 살의 아이였던 자기 자신에게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화해의 손길을 구하는 한 참여자는, 울지 않겠다고 원고를 미리 작성해왔지만 역시 마지막 대목에서 눈물을 흘렸다.
사실 나도 그녀들과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작년 제5회 말하기대회 “언중유희 - 이리 오너라 씹고 놀자”에 참여자로서 무대에 섰던 순간, 무슨 말을 해야할 지 가슴이 탁 막혀오던 기억이 있다. 나 또한 남들이 생각하듯이 무대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던 ‘전형적인 피해자’의 모습은 연출하지 말자고 다짐했건만, 그 전날 밤 찬찬히 읽을 때는 그저 밍숭맹숭하기만 하던 내 원고가 무대에서 수많은 시선을 마주하고 읽어내리자니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기어코 말하기대회의 무대까지 올라와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을 토해내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고, 이 와중에도 또박또박 ‘말’을 뱉어내는 나 자신이 기특해서이기도 하다. 나는 작년 5회 말하기대회가 인연이 되어서, ‘버라이어티생존토크쇼’(http://blog.naver.com/vstalkshow)라는 성폭력피해생존자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또다른 ‘말하기’를 하기도 했다.
무대에서 울다가 코를 훔치면서 “멋있게 눈물이 흐르지 않고, 콧물만 나네요.”하고 농담을 건네던 참여자. 목메인 소리로 펑펑 울다가 “울어도 할 껀 다 합니다”하고 너스레를 떨면서, 이내 즉흥춤을 보여주던 참여자. 그녀들의 눈물만큼이나 값진 그녀들의 농담과 유머 또한 그녀들의 ‘말하기’를 더욱 빛나게 했다.
성폭력 피해생존자들, 자신의 ‘피해자정체성’을 성찰하다.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다가 성폭력사건의 해결과정에서 노동운동을 그만두게 된 한 참여자는, 시간이 지나서 과연 자신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운동을 그만두게 된 것일까?를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어쩌면 스스로 ‘피해자정체성’에 머물면서 자신을 방어하고 있지는 않았는가? 하는 호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한 참여자는 10년도 훨씬 더 지나서 가해자를 만나러 가는 자신의 여정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지금 와서 대체 원하는 게 뭐냐?”고 호통치는 가해자의 격한 목소리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사과는 아니야/ 아무리 받는다 해도 모든 것은 그대로일뿐/ 진정 내가 원하는 건 너의 죽음도 아니야/ 똑같이 되돌려줘도 모든 것은 그대로니까/ 귀찮아 이 슬픈 진행은 언제쯤 멈춰질 수 있을까?”라는 그녀의 대답은 미처 가해자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진다. 피해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자신들의 자리에서 스스로 ‘피해’의 의미를 성찰하고, 자신의 ‘성폭력경험’을 재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가해자들에게, 혹은 세상에게 되묻고 싶다.
당신들은 과연 무엇을 성찰하고 있느냐? 고.
혹시나 그녀들의 성찰에서 자신의 변명꺼리를 찾고 있는 것은 아니냐? 고.
‘성폭력 피해’로부터 살아남은 여자들에게 보내는 지지의 글
사람들이 ‘험한 일 당하셨는데 힘내시라!’고 악수를 건넬 때면 내가 무슨 죽을 일이라도 당한 것인가 싶어 외려 짜증스럽다가, 사람들이 ‘별 일도 아닌데 얼른 털고 잊으시라!’고 인사치레를 할 때면 당신이 내 마음을 어찌 알아서 그리 함부로 속단하는가 화가 치민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뒤틀린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서 몸도 마음도 탈이 난다.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며 살아가는 일상들이 남들과 그리 별다를 것도 없다. 다만 나는 남들보다 훨씬 긴 촉수가 한 가닥 있어서, 그 긴 촉수가 건드려질 때마다 파르르 떨면서 화내며 울며 욕하며 지랄하게 되는 것뿐이다.
당신들이 원하는 나의 평화는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이지만, 가끔씩 당신의 평화가 아닌 나의 평화를 위해, 당신들이 침묵을 지켜줬으면 바랄 때도 있다.
이 모든 험난한 마음씀의 과정을 지나서 인생의 구비를 돌아돌아, 결국에 살고자하였던 여자들에게 내가 건넬 말은 ‘그래, 수고했소’ 밖에 별달리 없다. 죽기 위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죽기를 선택하는 처절한 노력도 종국에는 살기를 희망하는 처절함과 맞닿아있다.
그녀들의 살아남기 위한 처절함은 언젠가 빛나서, 나른하고 평온한 일상으로 그녀들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하므로 지금, 인생이 더디 간다고 해도 서두르지 말자. 쉽게 포기하지 말자. 인생의 샛길을 천천히 음미하며, 어깨 좁히고 담담하게 빠져나가자. 아직도 지나간 날들보다는 살아가야할 날들이 많다.
(이 지지의 글은 제6회 성폭력피해자생존자말하기대회 공연자료집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