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력’ 이용한 십대성폭력, 법원은 처벌할 수 있을까?
이 글은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2016년 3월 18일자로 기사화되었습니다.
※ 필자 하루는 한국성폭력상담소 여성주의상담팀 활동가입니다.
최근 서울동부지법 형사12부(부장 김영학)는 “취직자리 알아봐주겠다”며 17세 여성을 유인하여 성관계를 맺어 성폭력 혐의로 기소된 43세 남성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이 판결을 보며, 지난 2014년 11월 대법원이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뒤 1여 년 만에 결국 고등법원에서 무죄를 선고한 40대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이 대법원 판결로 인해 이후 하급심 판결 추세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연예기획사 대표에 의한 십대여성 성폭력 기소 사건은 검찰의 재상고로 대법원의 판단을 남겨두고 있는 상태다. 아동·청소년 성폭력의 특성에 대한 이해 없이 이뤄진 판결이 향후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하여, 제대로 된 판결과 처벌을 촉구하며 전국 350개 여성, 청소년 인권단체들이 서명운동을 진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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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이 ‘사랑’이라고 규정되는 것을 보며
앞의 두 사건은 모두 원고가 13~19세의 연령에 해당하는 십대여성으로, 현행법상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이하 아청법)이 적용되는 사건이다. 이 법률은 아동 청소년의 자유로운 성적 자기결정권과 방해 없는 성적 발달을 보호하기 위해, 반드시 폭행이나 협박이 없었더라도 아동·청소년 시기의 특수성과 성인과의 위계(位階)와 권력 관계를 고려하여 성폭력 여부를 판단하도록 마련된 것이다.
따라서 성인이 힘과 지위를 가지고 청소년이 거절하거나 반항하기 어렵도록 하면서, 자신의 성적 목적을 위해 유인하고 간음 행위에 이르렀다면, 이는 아청법상 강간에 갈음하여 처벌되는 성범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에서 법원은 성폭력이라고 주장하는 원고 측의 진술 대신, ‘사건 이후 가해자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등 성폭력 피해자로서는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다.
원고는 자신의 경험을 ‘사랑’이라고 한 적이 없고, ‘애정 행위’라 부른 적도 없는 명백한 성폭력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법원에 의해 성폭력이 아니라 ‘사랑’이고, ‘친밀한 관계에서의 언행’이라고 규정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과연 어떤 10대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자신의 피해 사실을 알리고 법적 해결을 구할 수 있을까?
십대여성 피해자의 외모와 행실을 문제삼는 법원
성폭력 사건의 유무죄 판단에서, 가해자의 ‘가해 행위’가 아닌, 피해자의 ‘저항 여부’와 ‘행실’에 주목하는 재판부의 태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주로 피해자의 진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성폭력 사건에서 법원은 통상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에 주목하게 된다.법적 공방은 가해자에게 ‘가해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입증할 것을 요구하기보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기대되는 사회적 통념에 따라 행동하지 않은 피해자를 ‘보호할만한 피해자’ 범주에서 제외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당시 ‘적극적으로 구조 요청을 하지 않은 피해자’는 현재 사법부의 관점에서는 피해자로 인정받기 어렵다.
‘보호할만한 피해자’에 대한 통념은 아동·청소년 성폭력 사건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심지어 피해자의 합의 여부와 무관하게 가해자를 미성년자 의제강간(13세 미만의 아동에 대해서는 합의 여부나 폭행, 협박 유무와 무관하게 성관계만으로도 처벌한다)으로 처벌해야 할 사건에서조차 법원이 무죄 판결을 내린 경우도 있다.
2010년 수원지방법원은 12세 여아를 집단 강간한 20대 남성 3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이 사건에서 검찰은 “피해자가 피고인들에게 16세라고 말했고, 피해자 키가 157cm 등 외모가 성숙해 통상적으로 13세 미만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미성년자 의제강간 대신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했다. 법원은 “피해자가 별다른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고, 피해 직후 스스로 옷을 챙겨 입고 나왔다”는 점을 들어 무죄를 선고했다.
13세 미만의 아동의 성을 보호하려는 법의 취지에서 벗어나, 피해자의 외모와 행실을 문제 삼아 가해자를 감싸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한편, 대구지법에서는 십대 여성에 대한 강간미수 사건에서 “피해자가 화장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있었던 점, 범행 시간이 오전 3시30분으로 피고가 그 시간까지 청소년이 술에 취해 돌아다닌다고 생각하지 못한 점”을 가해자의 감형 사유로 참작해주기까지 했다.이쯤 되면 사법부가 성폭력 가해자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두둔하고 있다는 의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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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 법원은 처벌할 수 있을까?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5년도 성폭력 상담 통계에 따르면, 십대여성에 대한 (준)강간 가해자의 62.1%(66건 중 41건)가 성인이다. 관계별로 볼 때, 전체 십대여성에 대한 (준)강간 피해 중에서 모르는 사람에 의한 피해는 4건(6.0%)에 불과했다. 십대여성의 경우에‘아는 성인으로부터 입은 강간 피해’ 비율이 확연히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법원의 관점이라면, 이중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사건은 과연 얼마나 될까? 연예인을 시켜주겠다며 접근한 연예기획사 대표, 취직을 알선해주겠다며 접근한 학원 행정원장은 모두 40대 중년 남성이었다. 피해자에게는 이들이 자신의 진로를 직접 결정하거나, 도움을 줄만한 사회적, 경제적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일단 성관계를 맺게 되면, 십대 피해자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과 조건에서는 구조 요청을 하는 것이 어렵거나 시도하기조차 어렵다.피해자는 연령, 직위, 사회적 위치 등으로 인해 가해자의 언동과 표정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을 수 있으며, 가해자에게 의존적이 되어 관계를 정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사건들에 대해, 성인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아동, 청소년을 유인해 성관계한 범죄 행위로 판단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법적 제도적 장치도 실제 십대여성들을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수 없을 것이다.
일련의 십대 성폭력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은, 과연 사법부가 성폭력 사건을 다룰만한 관점과 법해석 능력, 충분한 판단력을 갖췄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보호할만한 피해자’에 대한 환상, 성폭력 개념의 사회적 불합치, 일반인의 법감정과도 괴리된 ‘사법부만의 법감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두 개의 판결문은 시대적 걸림돌이 되고 있다.
피해자의 경험이 재판부 각자의 가치관, 통념, 관점에 따라 파편화되어 오독되지 않고, 폭력의 시점과 종점까지의 연속선에서 제대로 해석될 수 있으려면, 법원이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또한 십대의 성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감수성이 그 어느 시기보다 절실하다.
* 연예기획사 대표 사건의 처벌을 촉구하는 서명 페이지: http://goo.gl/forms/gtBOv5B0w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