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27일 오전 11시, 청와대 분수 앞에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지금 당장! - 초중고학교 페미니즘 교육 청원 의무화 청와대 청원에 대한 입장 발표와 정책 제안> 기자회견이 진행되었습니다.
지난 2월 5일 종료된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교육 의무화> 청와대 국민청원에 21만 명이 참여했던 것을 계기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지속적으로 연대하고 있는 <포괄적 성교육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와
작년에 페미니스트 교사에 대한 공격에 맞서 새롭게 구성된 <(가)페미니즘 교육 실현을 위한 네트워크>는
두 차례의 간담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청와대 답변이 수사적인 논평으로 그치거나 1년에 몇 시간 의무교육 시행과 같이 실효성 없는 정책으로 남을 것을 우려한 두 네트워크는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에 대한 우리의 입장을 발표하고 구체적인 정책제안을 청와대에 전달하기로 결의하였고, 오늘의 기자회견을 주최하였습니다.
기자회견은 나영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나영 활동가는 "지금 사회 곳곳에서 미투 운동 확산되는 이유도 그동안 성평등 교육이 부재했기 때문이 아닌가. 성평등 교육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라며 기자회견을 시작했습니다.
먼저 기자회견 개최의 배경과 경과를 보고하였습니다.
[기자회견 개최 배경과 경과]
o 지난 2월 5일 학생과 교사 모두 학교 교육에서 페미니즘을 배움으로서 우리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여성혐오를 근절하고 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요지의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교육 의무화」 청와대 국민 청원이 213,219명의 참여로 종료되었습니다.
o 21만 여명의 청원은 우리 사회 성평등의 지평을 확장하고 나이, 종교, 성별, 성정체성에 무관하게 누구나 안전하고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o 한국 사회의 성평등을 위해 지속적인 활동을 펼쳐 왔던 여성·교육·사회단체들과 청원에 참여한 페미니스트들은 2월 12일, 22일 두 차례의 긴급 간담회를 개최하여 청원의 의미를 공유하고 성평등을 위해서는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교육이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공유하였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정책들을 토론했습니다.
o 우리는 학교 페미니즘교육의 의무화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추상적이거나 당위적인 선언 또는 실효성 없는 성교육 및 폭력예방을 위한 의무교육시간의 확대 등으로 축소되어 실질적인 중장기 계획이 제시되지 않고 마무리될 것을 우려합니다. 성평등의 실현은 사회의 가치와 철학의 변화, 정책과 제도의 마련, 법의 제·개정 등이 동반되는 과정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정부와 시민사회가 지혜를 모아내야 하며 단기적 대응과 더불어 중장기적 계획이 수립되어야 합니다.
o 페미니즘교육 의무화에 대한 우리의 입장과 정책을 문재인 정부에 직접 전달하려고 합니다. 정부와 청와대는 성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당사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관련 단체들의 정책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정부와 시민사회의 협력 구조를 마련할 것을 촉구합니다.
이어서 참가자 발언이 있었습니다.
10대 페미니스트 김민정님이 지인의 발언을 대독하였습니다.
여학생이 아니라 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고등학교를 졸업한 페미니스트입니다. 고등학교 1학년, 페미니즘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제가 살고 있던 세상이 얼마나 기형적이었는지 깨달았고, 그것을 주위 여성들과 함께 인식하고 바꿔나가기 위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저는 운좋게도 아주 안전한 곳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은 낯설었을 페미니즘이 우호적이었고 궁금해 했습니다. 젊은 여성 선생님들과 자연스럽게 페미니즘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엣 저희는 더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고 어느새 페미니즘에 관심이 없던 친구들과 함께 불편해 하고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친구들, 선생님들도 여전히 존재했고, 다른 곳에서는 폭력과 업악 속에 있는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메갈과 남혐으로 낙인찍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보면서 모든 학교에 페미니즘 교육이 절실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페미니스트 교사에게 혐오와 차별이 없는 교육을 받고 싶습니다. 약자혐오가 난무하는 학교가 아닌 모든 사람이 동등한 인간이 되는 학교에 다니고 싶습니다. 선생님들과 함께 여성문제와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교실. 불평등한 세상을 인식하고 싸우는 사람들이 숨지 않아도 되는 학교, 그것을 모든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가질 수 있길 바랐습니다. 저는 여학생이 아니라 학생이 되고 싶었습니다. 앞가리개가 붙지 않는 책상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저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더 가치 있는지 아는 어른이 되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혐오를 가르치지 마십시오, 누구나 목소리를 가질 수 있기 바랍니다. 누구나 안전하고 평등한 곳에서 교육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선언 할 필요가 없는 학교를 다니고 싶습니다.
이어서 10대 페미니스트 김민정님의 발언을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우리나라 여자 청소년입니다.
저는 어릴때부터 의아했던 것들이 많았습니다
왜 항상 히어로물의 주인공은 남자일까
왜 사람의 직업을 부를 때
여자만 여검사, 여의사, 여배우라 부르고
남검사, 남의사. 남배우라 부르지는 않을까
현모양처라는 단어는 익숙한데 왜 현부양부는 생소할까
이러한 언어의 타자화 뿐만 아니라
일상 속에서 유독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여성혐오 발언들과 차별 등이 많았습니다
인터넷 bj 들의 여성 비하 발언 유행어의 영향으로
심각한 수준의 여성 혐오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심지어 어린 나이의 초등학생들도 주위에서 너무나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일 때도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에게
얼굴이 절구로 빻았다, 얼굴을 쳐다보기 힘드니 화장 좀 해라, 다리가 코끼리 다리 같다는 둥
심각한 수준의 인신공격을 아무렇지 않게 해댔고,
그런 친구를 포함한 남학생 무리에서는 즐겁다는 듯이 시시덕거리고 노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발언들을 하는 것이 자신들 딴에는 즐거운 놀이였고,
누가 더 웃긴 말을 해서 친구들을 웃게 하나 시합하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발언을 들은 친구들은 다이어트를 하고, 화장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거울을 보는 횟수가 잦아졌고, 과도한 수준의 다이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런 발언에 문제를 제기해도
“너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생리해?”
“남자애들 원래 장난이 많잖아, 너가 이해해” 라는 말이 돌아오곤 했습니다.
분명 제가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아 내가 예민했나? 내가 이해를 해줘야 하는 상황인가? 하며
제 잘못인 냥 자기검열을 해야만 했고,
저 혼자 느끼는 불편함을 묻어두어야만 했습니다.
학교 밖에서도 이러한 일들은 존재했고,
여성들은 끊임없이
뚱뚱하지 않아야 했고, 못생기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런 사회에
목소리를 내고 싶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공격을 받았던 사례가 빈번했기에, 그리고 저는 사회적 약자였기에,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여성혐오가 어디있냐, 나는 여자 좋아한다, 여혐하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 하지만
그러기엔 제 주위에 강자들에겐 보이지 않고, 약자만 느낄 수 있는,
알게 모르게 많이 잡혀있던 여성 혐오 문화가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대표적으로 유독 여성에게만 가해지는 여성성 강요가 있죠.
여자는 예뻐야 한다며 여성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봤을 외모 지적
학교에서도,
남학생의 교복과 같은 사이즈임에도 불구하고,
허리 라인이 들어가 딱 붙는 셔츠에, 불편한 치마,
손을 들기도 짧고 불편한 꽉 끼는 교복으로 디자인된 여학생의 교복과
‘순결, 긴 머리, 집안일을 하는 가정적 이미지’ 등등
성역할을 분리하는 삽화 등이 실린 교과서
문학 지문에서도 여자를 때리고 욕설을 내뱉는
여성 혐오 미화내용인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도
그 사회에서는 그 행동이 당연했다는 듯이
잘못됐다고 꼬집는 내용 없이 교과서에 실려 있습니다.
사회시간에도 여성이 사회에서 겪는 유리천장과 같은 사례를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성교육, 가정시간 때에도 임신-출산 과정만 가르치고
여성에게 너무나 중요한 출산 임신의 고통과 후유증은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또, 학교 성폭력 성추행 예방 교육에선
피해 예방 교육을 실시합니다.
피해자가 조심한다고 해서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고,
애초에 가해자가 없다면 피해자도 존재하지 않을 상황에
왜 가해 예방 교육이 아닌 피해 예방 교육을 중시하는 것일까요.
남녀평등을 중시하는 교육과정에서 너무나 모순된 점 이었습니다
열아홉 살인 저는 살아오면서 “오 여자 치고 기계 잘 만지네?
여자가 조신하지 못하게 뛰어 다니냐, 여자답지 못하다”
라는 말을 빈번하게 들어오며 여성다움을 요구 받으면서 ,
이해 할 수 없는 여성다움에 갇혀 살아야만 했습니다.
이럼에도 남녀가 평등하다고, 혐오란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학교에선 “남녀는 평등해야 한다. 성차별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학교를 포함해 사회 전체에 이렇게나 많은 성차별, 혐오가 뿌리잡고 있고
보이지 않는 사회적 위계 질서가 잡혀있습니다.
강자는 약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여성이라는 이유가 아닌, 인간으로서
필수 과목인 도덕과 같이 페미니즘을 가르치고
우리는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들은, 여성의 시선으로 사회를 볼 줄도 알아야 하며
페미니즘에 관한 부정적이고 잘못된 견해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겐 올바른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페미니즘 교육을 위해선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합니다.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늦은 시간에 밤길을 조심하고,
짧은 치마를 고민하며 입는 사회는
이제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와 권리가 주어지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21만 여명의 청원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실시되고
교육을 통해, 성 평등을 넘어 누구나 안전하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길 바랍니다.
다음으로 10대 페미니스트 이연주님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위한 정책제안>
01. 우리는 ‘섹스(Sex)’, ‘성’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특정한 이미지를 연상하도록 교육받았습니다. 어딘가 붉고, 부끄럽고, 불쾌하고, 야한. 그 연상은 다시 '낄낄거림', '수군거림', '과시적인 농담' 과 같은 태도로 이어지고, 계속해서 이 태도는 ‘뒤’, ‘비밀스러운’, ‘조심스러운’ 분위기를 형성합니다.
그 모든 연상들은 기존의 성 담론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우리의 통념은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덮어놓고 가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스치듯 지나친, ‘풋풋’하고 ‘건전’하며 ‘순수’해 ‘보호’받아야 할 ‘미성년자’의 이야기에 대해서 말입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당신의 아내를 “집주인 아주머니”라 부르던 목소리, 남학생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지는 얼굴과 몸매평가, 웃음과 함께 내뱉어지는 일본 야동 속 ‘앙 기모띠’라는 말들, 기계과로 진학하고 싶다는 여학생의 말에 “여자와는 안 어울린다”던 대답들. 일상적이고 익숙하게 내뱉어지는 그러한 말, 낄낄거림, 행동 속에서 문득 두려워졌습니다. 학교 안, 그리고 청소년들의 성적 담론이 그저 “자극적인 성행위에 대한 환상으로만 점철되어 왜곡되고 외설적인 몸과 행위만이 남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그 일상적인 두려움 앞에서 이제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발화와 인식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2. 그렇다면 우리, 즉 왜곡된 성 담론에 위치한 청소년은 어떤 모습일까요.
여학생은 여성으로서의 억압과 청소년으로서의 억압이 교차되는 지점에 서 있는 존재입니다. 여성의 순결함과 청소년의 성에 대한 무지함이 뒤섞인 통념은 여성 청소년으로 하여금 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를 가지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비단 여성 청소년 뿐만이 아닙니다. 왜곡된 성 담론에는 체화된 젠더권력과 맨박스에 대해 의구심을 가질 기회가 전무한 남성 청소년 또한 존재합니다. 이처럼 ‘무성’을 강요받아온 청소년은 ‘성’을 특별한 것으로 치부하고 일상과 분리시킵니다.
학생의 ‘무성’이 ‘정상’이라 일컬어지는 통념은 청소년들 사이의 음담패설, 성 담론의 음지화를 낳으며 이는 곧 성추행, 성희롱, 성폭행 등의 강간문화로 연장됩니다. 자신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에 대해서 고민하고 고려하는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기에 기존의 성적 문법을 답습하며 인식을 이어나갑니다. 특정성별의 특정 부분을 부각하는 말들을 문제의식 없이 뱉으며, 그것을 유희로 여기며, 고착화된 성별 이분법 문제를 재생산해 나갑니다. 학교 내에서 이루어지는 일상화된 성폭력은 성에 대한 ‘무지’를 강요받아온 그릇된 통념에서 시작됩니다.
03. 기존의 성적인 통념과 성별 이분법적인 위계 사고 속에서 자신을 정체화 하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그렇게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는 발현되지 못한 채, 사적인 영역으로 일축되거나 묵인되거나 부정당해야 했습니다. 우리는 무지하길 강권 받아왔습니다. 청소년을 ‘미성년자’ 라고 칭하며, 아직 미성숙할 것을, 그리하여 ‘성적’인 무엇도 갖추지 않은 ‘풋풋’한 상태로 존재할 것을 말입니다. 그렇기에 성담론에서 청소년들의 주체성을 요청합니다. 따라서 구조화된 성차별을 타파하기 위한 페미니즘 교육에서 청소년을 성 담론장의 주체로 세울 것을 요청합니다.
청소년 시기부터 우리는 이분화된 성을 넘어 다양한 성 스펙트럼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성행위를 개인화하고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통념에서 벗어나 더 넓은 범위에서 성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즘 교육은 억압과 성별 이분법적인 위계, 차별/폭력적 상황, 맨박스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해주는 필수적인 교육입니다.
04. 저희는 요구합니다.
첫째, 교직원을 대상으로 성폭력예방교육 외에 성교육이 주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요구합니다. 교직원에 의한 성폭행, 성희롱, 성차별 등에 의해 상처 받는 피해 학생이 생기지 않도록 성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학생들의 올바른 성 가치관과 성인권감수성이 확립하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교사 대상 성교육을 강화해야합니다.
둘째, 지금까지의 성교육이 '생식기'만을 배우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앞으로의 성교육은 생식기를 가진 '사람'에 대해 배우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셋째, 연속적이고 체계적인 성교육으로 개편되기를 요구합니다. 청소년기의 위험한 성 문화와 인식 속에 건강한 지도가 이루어지도록 형식적이고 비현실적인 성교육에 변화가 필요합니다. 또한 성교육 시간의 이벤트성을 극복하고 모든 학교가 성교육 의무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넷째, 차별과 억압으로 얼룩진 기존의 성 담론을 벗어나 청소년 스스로 섹슈얼리티를 고민하고 다양한 성 스펙트럼을 이야기하며 새로운 성 담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학생 성 자치기구를 개설하는 등 청소년들이 자체적으로 성 담론을 생산 할 수 있는 다양한 지원 방안을 모색할 것을 요구합니다.
‘19세 미만의 청소년은 시청이 불가합니다.’ 와 같은 기존의 성적 문법 속에서 차단시켜온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되찾아야 할 것을 믿습니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섹슈얼리티와 기존의 성적인 통념들을 혼동하지 않을 교육을 갖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상 해야 합니다. 청소년의 섹슈얼리티를 고민할 수 있는 교육을.
청소년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필수적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꽃페미액션에서 활동하고 있는 10대 페미니스트 변예진님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불꽃페미액션과 한국다양성연구소에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변예진 입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청소년 당사자로서 페미니즘 성교육이 왜 학교에 필요한지 그동안 제가 직관적으로 느꼈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하려 합니다.
개인적인 사유로 초등학교와 중학교 두 곳을 다녔습니다. 많은 학교를 방문했고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10여 년간에 공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 학교를 다녀도 교육은 비슷했고, 학교 분위기와 학급 분위기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제가 받아온 교육에는 여러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찾아낸다면 더 많겠지만, 크게 나눠 이성애적이고, 유성애적이고, 한편으로는 청소년과 여성에겐 성엄숙주의적이며, 이분법적이고, 남성중심적이었습니다.
이런 공통점은 가부장적 교육제도권 내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었으며, 이에 내면화된 저도 마찬가지로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유치원땐 생물학적으로 여자, 여자 체육복, 화장실 간판도 분홍색, 치마 입기, 공주놀이, 소꿉놀이를 즐겨하는 것 등 작은 것들로부터 규정된 성별 정체성을 배우게 됐습니다
동성 친구들은 공주놀이는 하는 동안 이성 친구들은 밖에서 줄넘기를 했고 저도 따라 줄넘기를 했습니다. 치마를 입어 속옷이 보였고 친구들은 속옷 보인다며, 색깔이 뭐냐며 성희롱을 했습니다. 성희롱에 개념을 모르고 놀리는 것에 울분이 나 선생님께 일렀지만 걔가 괴롭히는 것은 너를 좋아해서라며 이해하고, 안에서 놀자며 들어가 인형으로 달래주었습니다. 이렇게 성역할을 배워왔고, 성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유치원을 보내고, 제가 직접적으로 위계질서를 느꼈던 것은 초등학교 시절입니다. 한 살 어리게 입학했고, 다문화가정으로서 나이주의와 정상가족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기에 이상한 애로 주목되며 따돌림을 받았고, 선생님의 연민의 관심은 오히려 부담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정상이 무엇이고, 정상에서 벗어나면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지’를 생존적으로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고학년으로 올라와 성교육을 받았습니다. 수업이 진행되자 남학생 무리는 시작부터 웃는 소리가 들렸고, 여학생들은 부끄러워했습니다. 화면에 띄워진 여성과 남성에 몸을 바라보니, 매번 미디어에서 접하고 봤던 몸이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몸, 뚱뚱한 몸 등 다양한 몸은 성교육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성에 있어 수치심을 받아온 저는 나체로 띄워진 여아의 몸을 보니 스스로가 부끄러웠습니다. 남아의 성기는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여아의 성기는 직접 볼 수 없는 내부를 보여줬습니다. 이어 남자는 성욕이 많고, 손잡는 것도 위험하다며 단 둘이는 같이 있으면 안 된다는 말을 했습니다.
중학생이 돼 교복을 입었습니다, 여러 사이즈가 없었고 팔을 움직이기도 불편했습니다. 활동하기 불편한 나머지 남학생에게 와이셔츠를 샀습니다. 언어체계도 달라졌습니다. 전학 갔던 중학교에서 오자마자 들었던 소리는 니애미 창년이었습니다. 복수하기 위해 욕을 배우기 시작했고 창년, 쌍년, 니애미, 엠창, 걸레, 보지년 등 단어를 알게 됐습니다. 일상 속에서 차별적이고, 혐오적인 발언이 잦게 벌어졌습니다. 선생님께서 제게 성관계를 했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고, 성관계를 했단 이유로 친구를 욕했고, 월경을 할 땐 꼭 숨겨야 했으며, 섹스를 잘하게 생겼다며 놀림을 받았고 그 때문에 섹스에 대해 예민해져 혼절순결을 약속했으며, 제게 커밍아웃한 친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보내기도 했습니다. 이런 문화에 익숙해져 졸업했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뒤 페미니스트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호기심에 페미니즘 수업을 듣게 되며 익숙했던 것들 안에 여성혐오를 알아봤고, 다양한 경험들을 나눴습니다. 함께 나눈 경험담은 제 개인적인 일이 아니라 구조적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육을 받은 뒤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배웠던 것은 여성혐오였고, 온갖 혐오들이 맞물려져 있었단 것을 알았으며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며 불편한 감정을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등학교도 여성혐오는 계속 됐지만 문제제기를 하는 용기와, 비판할 수 있는 장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제 엉덩이를 툭 치시던, 예전 무용과는 걸레였다는, 머리를 기르고 꾸미면 엄청 예쁠 거라던, 짧은 머리에 바지를 입던 저게 성정체성에 혼란이 오는 것은 아니냐던, 선생님들 저는 매번 답답하고 힘들었지만 페미니즘 교육을 받은 뒤 여성으로서의 고통과 권리를 말하고 전할 수 있는 언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저는 제 주변 사람들의 조력과 연대로 인해 말하기 가능했고, 수월했습니다. 더 많은 이야기에 함께하기 위해선 학교가 조력의 역할을 이뤄내고, 학교 내 학생들이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인권감수성이 길러져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학교 내에선 페미니즘 교육, 페미니즘 성교육을 받을 접근성이 너무 낮습니다. 제가 보낸 학교생활을 되돌아보며 간절하게 느끼는 것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선생님들도 인권 교육이, 페미니즘 교육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며 다양한 관점에서,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듣고 말할 수 있는 이야기의 공간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페미니즘 성교육을 학교 내에서 듣고 싶습니다. 더 이상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 교실을 위해,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자긍심을 가지기 위해, 청소년의 주체적 권리를 위해, 다양성을 인정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알아가고, 여러 불평등 구조를 주목할 수 있는, 자신의 몸에 주인이 될 수 있는,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페미니즘 성교육이,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이해의 차원을 넘어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페미니즘 성교육이 필요합니다.
페미니즘교육의 부재가 어떤 사회를 만들었는지 체감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맞서고 있는 20대 페미니스트의 발언도 이어졌습니다.
페미당당에서 활동하고 있는 20대 페미니스트 우지안님의 발언이 있었고,
저는 학교 안에서 청소년 시기를 보낸 사람이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5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청소년이었던 시절을 자주 돌아보게 됩니다. 너의 청소년은 어땠니? 하고 물어본다면 가장 강렬했던 기억들은 그 때 받았던 상처들인 것 같아요.
이 학교에 내 편인 선생님이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학교를 내 공간, 내 상처를 말할 수 있는 공간으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때 받았던 상처들이 지금까지 제 삶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것은 제가 특별히 약한 사람이어서라거나, 제 개인적인 돌출들 때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느끼는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한 이유는 학교는 공동체를 배우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학교는 가족을 떠나 가족 이외의 타인을 접하고, 너도 이 곳을 꾸려가는 한 명의 구성원이자 주체라는 것을 배우게 되는 공간입니다. 청소년들은 가장 많은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교실은 일상적인 공간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에 다니면서 제가 이 곳의 구성원으로서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거나, 나의 문제가 개인적인 것이 아닌 공동체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학교라는 공간을 생각할 때면 제가 학교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 개인은 외따로 있고, 나 vs 학교, 나 vs 교실, 나 vs 다른 사람들 이런 식으로밖에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작게는 일상적인 불편부터, 성폭력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도, 어떤 아이가 아웃팅을 당해 전학가고, 어떤 친구가 자살했을 때에도 언제나 문제는 그 사람 선에서 끝나곤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대, 정말? 하는 속삭임들만 서로의 귀에서 귀로 전달되곤 했으나 그런 문제들은 언제나 뒤편에서 얘기되어야 하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상처를 치유하려 노력하고, 함께 애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학교에서 함께 사는 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교실, 학교라는 공간이 공동체라는 생각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교육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파편화된 개인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습니다. 내 문제가 내 공동체의 문제가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학교를 졸업했을 때에도 내 문제가 이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회는 학교를 그런 공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교실이 공동체가 되기에는 입시가 너무 바쁘고, 학생들은 다른 생각에 빠질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러한 고민들은 언제나 나중에, 대학 가고나서, 로 미뤄지고, 문제들은 당사자 개인들만의 것으로 남아버립니다. 교실은 우리가 일상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생활공간이었지만 수업 외에 부분들은 모두가 부차적인 것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 사회에서 한 개인으로만 외로이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의 문제가 곧 공동체의 문제라고 말해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학교는 성평등한 곳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고 완벽히 성평등한 곳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사회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학교는 성평등에 대한 가능성을 말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성평등에 대해서, 사회적 약자의 존재와 약자를 약자로 만드는 구조에 대해서 알려주어야 합니다. 학생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인 좌표가 어딘지 알려주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겪었던, 들었던 성차별들을 생각해봅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교사가, 또래 학생들이 가해자였던 성폭력 사건들이 있습니다. 일상에서 숨쉬듯 접하는 적대적인 분위기, 예를 들어 외모 평가, ‘김치녀’라는 외침 같은 것들. 더불어 양말과 머리끈, 속옷 색깔까지 규정하는 성차별적인 교칙들을 겪었습니다. 사건들이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끔찍한 일’, ‘개인적 일탈’로 규정되는 데에서 그친다면 피해자의 치유 또한 개인적 일이 되어버리고, 이후에 개인적 일탈은 반복될 것입니다. 고발할 만큼의 문제가 아니어도 그것이 너 혼자 참으면 되는 일, 우리 모두의 문제가 아닌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세월호 사건 이후 교육에 대한 생각을 부쩍 더 자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세상을 물려주어서 미안해’라고 말하던 어른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교육이 변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 학교는, 그리고 나아가 사회는 언제나 나중에, 기다리라고 말하는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여성을 위해서만, 학교를 바꾸기 위해서만 페미니즘 교육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페미니즘 교육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듣고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말하는 교육입니다. 저는 때문에 페미니즘이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모두를 위해, 지금 당장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합니다.
20대 페미니스트 안나님도 진솔한 경험을 바탕으로 발언을 해주었습니다.
학교에 다니는 내내 한 선생님께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하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남자는 크게 상관없지만, 여자는 남자를 정말 잘 만나야한다고요. 능력 없고, 폭력적인 남자를 만나는 순간 여자는 인생이 휘청이고 혹시 결혼이라도 하면 남자에 비해 재혼도 힘들다고요. 그래요 현실적으로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선생님은 3년 동안 그 말을 여학생들에게 수백 번씩 늘어놓으면서 단 한 번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만약 그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다 여자인 너희를 위해서 라며 조심해라, 남자 잘 골라라 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습니다. 데이트 폭력과 가정폭력을 여성이 조심하고 남자를 열심히 고르기만 하면 피할 수 있나요? 그리고 만약 선생님말씀을 따라 열심히 고른 남자가 내게 폭력을 휘둘렀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선생님 말대로 그 인생은 끝난 건가요?
과연 그 선생님은 남학생들에게 가서 폭력적이가나 무책임한 남편이 되지 말거라 라고 가르쳤을까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저 여학생들에게만 조심하라는 말뿐이었습니다.
저는 가정폭력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집에 가면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새 아빠가 있던 고등학교 시절 저는,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남자 잘못 만나면 여자 인생은 끝이라고 말하는 선생님께 뭐라고 대답해야했을까요. 선생님 말씀대로 엄마와 제 인생은 휘청였지만 끝나지 않았고, 저는 이렇게 이 자리에 있습니다. 저는 여학생들에게 무작정 조심하라고 말하는 선생님이 아닌 어떠한 일 때문에 휘청이더라도 네 갈 길을 가라고 말하는 선생님, 그리고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되지 말라고 가르쳐줄 선생님이 필요했습니다.
저에게는 조심하라는 말대신 그 누가 너를 때리고 상처 입혀도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네가 조심하지 않아서가 아니라고 말해줄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했습니다.
현장에서 직접 성평등교육의 필요성을 체감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교사들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먼저 초등성평등연구회 솔리님의 발언이 있었고
저는 성평등한 교육을 생각하는 초등학교 교사들의 연구모임,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솔리입니다. 성평등 교육을 연구하고 고민할 뿐 아니라, 해시태그 운동 ‘#우리에겐_페미니스트 선생님이_필요합니다’와 ‘#학교에_페미니즘을’에 참여해 왔던 한 명의 페미니스트 교사로서, '초·중·고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의 20만 청원인 달성이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평등을 향해 점점 커져가는 한국 사회의 요구가 구체화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교사로서,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촉구하는 청원이 성공한 이 시점에서 '페미니즘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모든 교육과정은 목표, 내용, 방법을 포함합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어떤 내용을 담으며,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할까요? 이 세 가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페미니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것입니다.
페미니즘은 모든 성의 동등한 권리를 위한 인권운동이기도 하고, 연구자와 학제를 갖춘 학문 분야이기도 하며, 일상의 모든 장면에서 항상 의식하고 노력해야 하는 개인적인 실천이기도 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페미니즘은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치관이자 세계관입니다.
페미니즘은 구조 속에서 권력관계가 발생함을 알고, 언제나 가장 약자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교육은 학생들에게 나보다 약한 친구를 시혜적으로 '관용'하고 '배려'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무심코 던지는 장난이나 무시가 나보다 약한 친구에게는 폭력일 수 있음을 성찰하고 교실에서 가장 약자인 친구와 연대할 수 있게끔 가르쳐야 합니다.
페미니즘은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구조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교육은 학생들에게 '학교의 관행이 그렇기에, 교사가 그렇게 말하기에, 교과서에 그렇게 쓰여 있기에'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누가 정하는지 질문하고 학급과 학교의 규칙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고민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결코 완전히 아물지 않을 상처를 남긴 2014년 4월 16일의 사건을 모두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월호 이후 초등학교 1학년과 2학년 학생들은 「안전」이라는 제목의 낯선 교과서 하나를 새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과서는, 세월호에서 희생된 사람들이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 생명을 잃은 것이 아니기에, 매우 기만적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직도 많은 학교에서 안전 점검과 대피 훈련 등이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노후한 시설로 인해 학생들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데, 이런 현실에서 책으로만 안전이 중요하다고 배우는 일에 무슨 교육적 효과가 있을까요? 학생들은 오히려 '안전 수칙이란 이렇게 형식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을까요?
페미니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페미니즘 교육의 도입은 절실하고 시급한 요청입니다. 그러나 「안전」 교과서가 학생들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듯, 단지 몇 시간 이상 페미니즘 교육 시수를 의무화하는 정책만으로는 페미니즘 교육이 실현될 수 없습니다. 남학생 출석번호는 1번부터 여학생 출석번호는 51번부터 시작하도록 되어 있는 학교가 아직도 많습니다. 학생들의 등굣길 안전을 지켜주는 의무는 반강제적으로 녹색'어머니'에게 돌아갑니다. 교과서의 삽화에서 국회의원, 사업가, 농부는 늘 남자로, 가정주부, 미용사, 마트 계산원은 늘 여자로 그려집니다. 학생들이 이러한 현실에서 살아가는 가운데 "남자와 여자는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해요", "차별은 나빠요" 같은 너무나 당연한 구호만을 배우게끔 하는 일은, 차별을 개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존재하는 차별을 은폐합니다.
따라서 페미니즘 교육은 하나의 교과나 주제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학교의 모든 행정과 운영, 규칙과 절차가 성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만들어지고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태도와 학급을 운영하는 방침에 페미니즘적 사고가 배어 있어야 합니다. 사회 시간에 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배우고 도덕 시간에 일상 속에서 흔히 일어나는 차별의 문제를 배울 뿐만 아니라, 국어와 체육과 과학과 수학을 비롯한 모든 교과를 통해 페미니즘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갈 길이 멉니다. 교육부에 교육청에 성평등 전담 부서와 성평등 정책 담당관을 설치하고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것, 교육과정 개발과 교과서 집필 과정에 성인지적 관점을 반영하는 것, 교사 양성과 연수 과정에 페미니즘을 도입하는 것은 첫걸음에 불과합니다. 청와대의 답변이 페미니즘 교육 실현을 위한 첫걸음을 떼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또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으로 전교조여성위원회 뽀란님의 발언이 있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성적인 대상이 되고, 교실에서는 혐오의 대상이 됨을 확인하는 순간을 매일 마주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왜 학생들에게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 대화할 수 있는 관계로 다가가기 어려웠는지 이유를 찾기 시작하다 보면 그 끝에는 커다란 자책과 자기혐오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교사이지만 교사가 아니었고 자기 방어능력이 없을 것 같은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학교 안의 권력 피라미드 구조 안에서 소위 ‘쎈’, 힘있는 학생을 통제할 수 없는 하위층에 속했습니다. 물론 교사들 사이에도 분명히 ‘성별’과 ‘나이’, ‘결혼 여부’ 에 따라 위계가 나뉘어져 있습니다. 나는 나이가 어린 비혼 여성이라는 하위층에 속해 있어 발언할 기회가 없었고 학교 운동회나 졸업식에서 내빈에게 꽃을 달아드리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학교는 교장을 중심으로 모든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권위적인 구조였고, 학생과 학부모를 반강제적으로 동원하여 행사를 진행하는 경우가 많았고, 여교사의 치마 길이를 단속하여 학생들의 성희롱과 성추행을 예방하고자 하였습니다. 나는 학교에서 침묵하였고 가부장적인 구조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솔직히 나보다 어린 청소년들이 행하는 힘의 논리는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나는 페미니즘을 알기 전에도,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도 ‘교실에서 제대로 수업을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을 들어 학생들의 언행을 통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방법 이외에는 제 자신을 보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보다 더 하위층에 속하는 힘없고, 자기표현 못하고, 폭력을 당하는 학생들도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 되어버린 학교생활을 매우 힘들어 했습니다. 힘있는 학생들의 폭력적인 언행에 분노하지만 그것을 제지하려면 폭력으로 대응하거나 또래집단에서 소외될 각오를 해야만 했습니다. 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지만 힘없는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힘있는 학생들과 대치하는 상황을 절대 외면하거나 은폐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업에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자괴감에 빠져있었지만 학과 사무실과 학생안전인권부에 자주 찾아가 부장교사들과 교감선생님들, 교장선생님에게 어려움을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남성’ 학부모, 부장교사와 교감선생님들은 성장기 과정에 있는 ‘남성’청소년들이 본능에 따라 여성 혐오적이며 성희롱적인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서 이것이 ‘젠더 폭력’ 임을 인식하지 않고 방관했습니다. 오히려 민원이 생기지 않도록 교사의 고충을 묵살하거나 학생들의 문제 행동을 처벌하기에 급급했습니다.
학교는 학생의 인권과 주체성을 애초부터 박탈하고 어른의 말에 군말 없이 잘 따르는 ‘인성’이 바른 학생을 길러내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민주주의가 없는 학교에서 해당 학생들은 선도위원회에 회부되고 처벌이 내려질 때까지 그들의 행동을 ‘젠더’ 관점으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학생부장교사도 여성혐오에 바탕을 둔 학생들의 또래문화를 개선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학부모를 불러내어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하기 위해 압박하기가 일쑤였습니다. 만약 이에 순응하지 않고 자기 입장을 주장하면 개선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퇴학’ 처분이 내려진 경우가 있었고, 처분하기 전까지 학생에게 자퇴를 선택하여 진로 변경 혹은 재입학을 권고하기도 하였습니다. 나는 담임교사로서 5명의 학생이 자퇴를 선택하는 과정을 무기력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떠난 교실에서도 교사에 대한 불신, 차별과 여성혐오는 사라지지 않았고 또 다른 학생들에게도 이어졌고 혐오의 화살이 나를 향하기도 했습니다 .
작년 봄이었습니다. 수업시간에 제 지시를 따르지 않은 3명의 학생들이 여성 혐오적인 욕설을 하여 학생생활지도 담당 교사에게 데려가 지도를 부탁드리고 바쁘게 출장을 갔습니다. 교육청에서 ‘남성’ 수석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울먹이며 고민을 털어놓았는데 그때 나눈 말이 기억이 납니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제 2의 ‘어머니’가 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요.
그때는 페미니즘을 알면서도 제대로 그 문장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청소년 뿐만 아니라 교사에게도 ‘어머니’는 학생들에게 가족을 위해 희생되어도 괜찮은 존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양육의 전적인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권리를 빼앗고 통제하는 권력을 가진 존재로도 읽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특정 성별에 대한 차별과 혐오는 성별 이분법에 따른 성역할과 ‘남성’ 중심으로 문제 상황을 해석하는 관점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 안에서 관행, 문화, 규칙의 형태로 끊임없이 세대를 이어 이식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는 이를 거부하고 자기 입장을 말하거나 ‘젠더 문제’를 드러내는 구성원을 ‘정상’ 범주에서 벗어난 사람으로 분류하고 ‘예민한 또는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무시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는 ‘사랑’이란 미명 하에 통제를 정당화하고 자기결정권을 박탈하여 주변인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나는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성별 이분법’에 갇히지 않도록 자기 정체성을 탐색할 기회를 주거나 도움을 주는 교사가 아니었을 때가 많았습니다.
나 스스로도 태어나 30년 넘도록 사회에서 기대하는 여‘성’적인 성격, 외모, 역할이라는 정체성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여‘성’으로서 항상 조신해야하고, 위험한 상황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야하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자기 몸과 욕구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인정하고 제대로 탐색해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성’이라는 고정관념을 단 한번도 의심해 볼 용기를 내지 못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그 너머에 있는 무수한 가능성을 믿고 도전해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도, 우리 사회 일원인 청소년과 소수자들도 지금 당장, 교실과 수업 안에서, 젠더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어떤 이유로도 소외되는 이가 없도록 학교 안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구현함으로써 성평등을 실현해야 합니다. 여성과 소수자가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주체로 인식하여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국가에서 지금 당장, 우리의 외침에 응답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교육에서의 페미니즘 교육을 원하는 페미니스트 학부모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평등교육실현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서울남부 대표 유현경님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별 고정관념과 성차별적 성역할에 대해 지적하며, 학교와 사회에서 성평등이 실현되지 않으면 가정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자녀에게 성평등 교육을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발언해주었습니다. 아래는 본 상담소 트위터 계정을 통해 실시간으로 게시된 발언 내용의 토막입니다. (현장에서 단편적으로 받아적은 내용이므로 실제 발언과 일부 다를 수 있습니다.)
"출산하자 딸이라는 이유로 분홍색 팔찌를 채웠다. 선택할 여지 없었다. 성역할, 성별고정관념을 유치원, 학교 등에서 가르치고 있다. 가정에서 아이를 성중립적으로 키우고 성별고정관념을 갖지 않도록 노력했으나 아이는 너무나도 쉽게 사회화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성 페미니스트로서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의 발언도 있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입니다.
“남자다운 남자”가 되야 한다는 맨박스 속에서 억압받는 남자들에게도 성평등한 사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평등한 사회에서 남성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의 짐만 들면 됩니다. ‘남자가 말이야! 그것도 못해? 남자 맞아?’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성평등한 사회에서 남성들은 ‘남자라면 당연히 군대는 다녀와야 하는거 아니야?’라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성평등한 사회에서 남성들은 집을 마련할 수 있어야만 결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압박을 받지 않습니다. 자유롭게 육아휴직을 쓸 수 있습니다.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줄어들고 질병에 적게 걸립니다.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됩니다. 페미니즘이 남성들에게 필요한 이유는 많습니다.
페미니즘은 나쁜 말이 아니며 절대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어떠한 성을 가지고 있는가가 차별과 억압의 근거가 될수 없으며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 페미니즘입니다. 여성들은 빼앗겼던 권리를 되찾고 남성들은 그동안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었던 의무감과 부담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평등은 여성 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도 해방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럼, 성평등한 사회 어떻게 만들까요? 성평등 교육으로 만들어 집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교육 시스템 안에서 성장하고 살아가는 남성들은 어떤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자연스럽게 성차별주의자가 됩니다. 이는 여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성차별과 성폭력을 매우 자주 접하기 때문에 ‘뭔가 부당한 게 있다’고 느끼는 인지부조화를 느끼는 “특별한 계기”를 만나기 쉽습니다.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폭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성평등에 대한 인식 역시 높아지고 있습니다. 반면, 성차별을 잘 느낄 수 없는 특권그룹인 남성들의 인식 변화는 제자리걸음 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들은 점점 더 여성들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고 어울리지 못하고 도태됩니다.
마찬가지로 이성애자들은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호모포비아가 됩니다. 시스젠더들은 가만히 있으면 자연스럽게 트랜스포비아가 됩니다. 획일적인 기준에 의해서 정상과 비정상이 정해져 있는 사회는 다른 사람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기 보다 사회적 기준으로 판단, 정죄하게 됩니다.
모든 사람은 차별과 편견, 부당한 특권과 억압이 뿌리깊게 자리잡은 사회에서 자랐고 오랜 시간 사회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차별적이거나 폭력적인 사고 또는 언행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이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매일같이 배우고 자신을 돌아보며 훈련해야 합니다.
미투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모든 시민들은 이제 권력과 위계로 움직이는 사회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동등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의 할 일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이 남성, 이성애자, 시스젠더, 비장애인, 중장년, 고학력, 고소득 등의 특권그룹에 속해 있는 정체성이 있다면 그 정체성에서 더 많이 고민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사회적 편견과 그릇된 위계, 그리고 권력에 대해 더 고민할 수 있도록, 지속으로 교육받고 훈련받을 계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를 개인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사회가 나서서 교육해야 합니다. 그 시작은 마땅히 공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초등학교 혹은 그 이전부터 편견과 차별이 아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제도가 마련해야 합니다.
남성들은 성평등 운동에 방어적인 자세를 취할께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남성해방을 위해 성차별주의자를 만들어 내고 있는 학교교육을 거부하고 모든 교과목에서 성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성평등 교육을 요구해야 합니다.
긴 참가자 발언을 마치고, 청와대에 제출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위한 정책 제안>을 발표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정책제안서 전문을 낭독할 수 없어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 박현이님이 요약 발표를 해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기자회견문 낭독이 있었습니다.
#모두에게_페미니즘_교육이_필요하다 기자회견문 전문보기<클릭>
<우리들의 요구>
문재인 정부는 학교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선언하라!
학교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민관의 논의 구조를 만들어라!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근절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라!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성교육표준안을 즉각 폐지하라!
1시간 30분 간 이어진 긴 기자회견을 마치고, 4명의 참가자 대표단이 청와대에 정책제안서를 전달하러 출발했습니다.
우연하게도, 기자회견이 한참 진행 중이었던 오늘 11시 50분에 청와대 국민청원 답변이 공개되었습니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 청와대 답변 보러가기<클릭>
청와대는 '올해 실태조사 등을 통해 기존 교육과정의 성 평등, 인권 내용을 분석하면서, 통합 인권교육에 어떤 내용을 포함시킬지, 몇 시간을 교육할지, 교과에 어떻게 반영시킬지 다양한 연구가 이어져야' 한다며 연구 과정에 '젠더 전문가를 비롯해서 각 분야의 전문가를 포함시키'고 '국민들과 소통하면서 사회적 합의를 거쳐 관련 법을 제정하거나 교육과정 개편에 반영될 수 있을지 검토하겠'다고 답변했습니다.
그 밖에도 '일단 실태조사를 하고 제대로 된 교재, 교육 매뉴얼 등을 보급하고, 더 많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기회를 늘리고, 장기적으로 교과 내용을 개편하는게 정부 몫이라면, 관련 내용을 적극 활용하는 것은 교육 현장의 몫이기도 합니다. 정부도 적극 독려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실질적으로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는 결정에 대해서는 답변을 보류한 셈입니다.
포괄적 성교육 권리보장을 위한 네트워크와 (가)페미니즘 교육 실현을 위한 네트워크는
학교에서 성평등을 이루고 포괄적 성교육, 페미니즘 교육이 실현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정부 및 교육부의 행보를 지켜보며 정책 모니터링, 비판, 제언 등의 활동을 지속할 것입니다.
<이 글은 본 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