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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담회<피해와 생계 사이, 직장 내 성폭력을 말하다> 후기
  • 2018-05-02
  • 2737

올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의심에서 지지로, 함께 하는 성문화운동(이하 '의지로')> 프로젝트를 새롭게 시작하였습니다.


<의지로> 프로젝트는

성폭력과 '피해자다움'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깨고 

가해자의 언어와 전략을 분석·비판하여 

피해자에게 향하는 의심을 가해자에게 되돌리고 

피해자가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는 든든한 지지망을 형성하기 위한 대중인식 개선 사업입니다.


2018년도 <의지로> 프로젝트는 365mc와 한국여성재단이 후원하고 서울사회복지공동모금회가 지원하는 2018 여성이 안전한 세상 만들기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의지로> 프로젝트에서 진행하는 첫 행사로 2018년 4월 12일 목요일 오후 2시 창비서교빌딩 50주년홀에서는 집담회 <피해와 생계 사이, 직장 내 성폭력을 말하다>가 열렸습니다.



이번 집담회는 #MeToo 운동을 통해 성폭력 말하기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 검찰 내 성폭력, 연극계 내 성폭력, 영화계 내 성폭력, 정치계 내 성폭력 등 다양한 업계별로 분류되고 있는 성폭력을 '직장 내 성폭력'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연결하여 보고자 기획되었습니다. 직장 내 성폭력의 보편적인 특성을 살피고 업계별로 각각 다르게 작동하는 권력 관계와 업계 구조, 문화 등을 서로 이야기 나눔으로써, 성폭력은 '괴물' 같은 가해자 개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강간 문화'와 성차별적 사회구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임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직장 내 성폭력입니다.

팀장이 부하 직원에게 성희롱을 했다면
정규직 사원이 파견 근로자에게 성추행을 했다면
연출가가 배우를 강간했다면
감독이 스탭에게 성추행을 했다면
경찰이 동료 경찰에게 성희롱을 했다면
국회의원이 수행 비서를 강간했다면
교장이 기간제 교사에게 성추행을 했다면
전속 코치가 운동선수에게 성추행을 했다면
육군 중령이 대위를 강간했다면
유명 시인이 신진 작가에게 성추행을 했다면
클라이언트가 프리랜서에게 성희롱을 했다면
자영업자가 아르바이트 노동자를 강간했다면
직장 내 성폭력입니다.

피해자가 생계를 이어가는 노동환경에서 벌어지는 
모든 성폭력이 직장 내 성폭력입니다.

(본 집담회 SNS 홍보글 중 일부)


한편으로는, 피해자에게 '왜 이제 와서 말하느냐' 또는 '(정말 성폭력 피해라면) 왜 진작 일을 그만두지 않았느냐'고 질문하는 사람들에게 성폭력 피해자가 처해 있는 위치와 맥락을 알리고자 노력하였습니다.


미투(#MeToo)운동이 지속되고 있는 요즘, 상담소에는 '(피해자에게 정말 성폭력 피해가 있었다면) 왜 진작 일을 그만두지 않았냐', '이해가 안 된다'는 전화가 종종 옵니다. 이러한 말들은 통념에 근거하여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의심하거나, 성폭력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의미를 담고 있어 2차 피해를 유발하는 말입니다.

성폭력은 명백한 범죄이며, 가해자의 잘못입니다. 
따라서 가해자가 책임지고 징계 또는 처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이 일을 그만둬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성폭력 피해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것은 그 자체가 또 다른 피해입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 성폭력보다 더 큰 피해로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일을 그만둔다는 것은 삶에 큰 변화와 스트레스를 동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는 꿈을 잃는 경험, 누군가에게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지는 경험, 누군가에게는 그동안의 노력과 성취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재취업이 어렵거나 아예 직종을 바꿔야 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합니다.

피해자가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에 대하여 의심이 든다면,
혹시 여성의 생계와 노동에 대하여 가볍게 보고 있지는 않은지,
아직도 성폭력을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야 하는 정조'의 문제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강간 문화를 직면하고 개선하기보다 보고듣기 불편하다며 외면하고 쉬쉬하려고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의심을 먼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본 집담회 SNS 홍보글 중 일부)




집담회는 본 상담소 활동가 오매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기업 내 성폭력을 말하다>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제기자에 대한 기업의 불이익조치 실태와 대안 모색 :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 이가희님이 발표하였습니다.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은 회사 측에서 성희롱 피해 사실을 문제제기한 피해자에게 사직 권유, 악의적 소문 유포, 조직적 따돌림, 대기발령, 직무정지, 형사고소 등의 불이익조치를 하고 심지어 조력자도 직무정지, 대기발령 등의 불이익조치를 한 사건이었습니다. 발표에 따르면, 한국여성민우회에 들어온 직장 내 성희롱 상담 중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조치 관련 상담 비율이 2016년도에는 47.25%, 2017년도에는 41.88%를 차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측에 의한 불이익 조치는 직장 내 성폭력 해결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흔히 겪게 되는 2차 피해입니다. 이러한 현실은 피해자로 하여금 문제제기를 하기 어렵게 만들고, 설령 문제제기를 하더라도 조력자들이 나서기 어렵게 만들어 피해자를 고립시킵니다.


남녀고용평등법 제14조 2항에 따르면 '사업주는 직장 내 성희롱과 관련하여 피해를 입은 근로자 또는 성희롱 피해 발생을 주장하는 근로자에게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조치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불리한 조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았고, 회사 측에서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주장하면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어려운 현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작년 연말 선고된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 대법원 판결은 '불리한 조치'의 판단 기준을 밝히고 피해자 뿐 아니라 조력자에게 가한 불이익조치에 대해서도 사용자 책임을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고 유의미한 판결이었습니다.


발표자는 불이익조치와 사용자책임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함으로써 직장 내 성폭력이 피해자와 가해자 개인 간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조직 문화가 함께 변화해야 할 문제이며 노동권의 문제임을 강조하였습니다.


<연극계 내 성폭력을 말하다>는 "연극을 꿈꾸는 당신이 범죄자보다 훨씬 소중합니다"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스트 연극인 연대 황나나님이 발표하였습니다.


연극인 1인의 연평균 총수입이 1,300만원 정도에 불과하며 그 중에서 394만원은 예술과 무관한 활동을 해서 번 금액이라는 열악한 노동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공연을 올리기 위해서는 공적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연출가를 변경하면 지원금이 취소되고 이는 공연 불가를 의미한다는  연극계 현실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연출가의 성폭력을 문제제기하면 동료들의 기회마저 박탈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문제제기하기도 어렵고, 설령 용기 내어 문제제기 하더라도 2차 피해를 입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입니다. 연출가의 권력이 클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느꼈습니다.


<학교 내 성폭력을 말하다>는 "나라는 이유로 내가 지워지는 학교에서 '나'를 말하기"라는 제목으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여성위원회 오름님이 발표하였습니다.


남학생들이 여성 교사에게 성희롱, 성추행을 일삼는 현실은 성별 권력관계가 무엇인가 고민하게 만들었습니다. 보통 교사-제자 관계에서는 교사의 권력이 더 강하기 마련인데, '비인기 과목 기간제 교사' 또는 '나이 어린 여성 교사'의 경우에는 오히려 성폭력 피해자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를 문제제기하면 교사로서 무능력한 사람으로 치부되거나 '교사로서 학생을 사랑으로 감쌀 줄 알아야 한다'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남성 교사들은 '남학생들은 원래 크면서 그런다'는 식으로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남학생들과 함께 여성 교사들을 '나이 어린 예쁜 여자, 나이 많은 예쁜 여자, 나이 어린 못생긴 여자, 나이 많은 못생긴 여자' 등으로 분류하며 여성혐오 정서를 공유하거나, 교직원 회식 자리에서 여성 교사에게 성희롱, 성차별 발언을 하는 현실은 이것이 성별 권력관계의 문제임을 더더욱 실감나게 만들었습니다. 여성 교사들이 학교에서 겪고 있는 성차별·성폭력 문제를 좀 더 적극적으로 알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치계 내 성폭력을 말하다>는 "국회 미투는 이제 시작"이라는 제목으로 국회 여성정책연구회 대표 이보라님이 발표하였습니다.


발표에 따르면, 국회는 여성의원 비율은 17%, 여성보좌관 비율은 6.7%에 불과한 압도적인 남초 공간입니다. 발표자는 우스갯소리로 '그래서 국회 앞에는 파스타집 없고 추어탕, 해장국 같은 것만 판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보좌관에 대한 기본적인 노동권조차 제대로 보장되지 않고 있는 현실과, 여성 보좌관에 대한 성차별과 성폭력을 '고도의 정치적 행위', '정무적 판단' 등의 언설로 정당화하는 정치계의 언어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습니다. 안희정 성폭력 사건이 고발된 이후로 남성 의원과 여성 비서를 무조건 이상하게(성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문제의식도 있었습니다. 현재 국회 여비서들은 #나는_여비서다 해시태그 운동을 통해 여성 비서에 대한 왜곡된 통념을 규탄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다함께 말하다 #MeToo #WithYou>에서는 질의응답을 하거나 자신의 경험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는 플로어 토론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법적으로 불이익조치를 인정받아도 직장으로 되돌아가기 힘든 피해자의 현실에 대한 논의가 있었고, 직장 내 성폭력 피해를 산업재해로 인정받는 판례를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비인기 분야, 폐쇄적 업계에서 페미니즘 어떻게 확산시켜야 할지 묻는 의견이나 결국 학교에서부터 성평등 교육 및 성·인권 감수성 교육이 실현되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사용자책임과 더불어 2차 피해를 유발하는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대응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문제의식을 나눠주신 분도 있었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를 통해 이번 집담회의 발표 자료 및 플로어토론 속기록을 PDF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현장에서 오고간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면 다운로드 받아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직장 내 성폭력'이 주제인데 직장인들이 참여하기 힘든 평일 낮 시간대에 진행되어 아쉽다는 의견을 여럿 받았습니다. 다양한 업계에서 일하는 당사자를 발표자로 섭외하는 과정에서 각자 참여 가능한 시간대가 달라 어려움이 있었는데, 조금 더 고민해보고 조율해보았더라면 좋았겠다 담당자로서 저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각자 다른 위치에서 성폭력과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기 쉽지 않은 여건을 실감했지만, 그렇기에 집담회에 다함께 모여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더욱 소중하기도 했습니다. 함께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어 든든하고 힘이 났습니다.


유사한 주제로 더 다양한 업계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다는 후속행사 요청을 많이 받았고, 현재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다음 행사에도 함께 참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본 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