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이 문화라면 바뀌어야할 것은 모든 것이다
- 2016 강남역에서 2018 미투를 지나
2016년 5월 17일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살해됐다. 가해자는 범행동기로 ‘평소 여자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재판부는 1심 판결문에서 “김씨는 여성 혐오라기보다 남성을 무서워하는 성격 및 망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피해의식으로 상대적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행했다”며(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고합673), 여성혐오가 아니라 가해자의 정신질환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 사건을 다르게 이해했다. 여성이기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꼈던 상황과 익숙한 두려움을 떠올렸다. 항상 들어왔던 ‘몸단속 잘해라’, ‘위험에 대비하라’, ‘제대로 처신하라’는 말들을 떠올렸다. 여성들은 또다시 개인적으로 두려움에 위축되고 안전을 확보하는 일 대신, 사회에 공기처럼 존재했던 여성혐오 문화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여성혐오라는 오랜 관습, 여성폭력과 차별이라는 오랜 구조를 더이상 용납하지 않겠다고 나선 여성주체들은 한국 사회에 대해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2016년 여성혐오를 멈추라고 말했던 여성들은 2018년 성폭력·성차별 없는 세상을 외치고 있다. 피해자들의 용기 있는 말하기, 지지와 환대의 응답, 크고 작은 백래시의 흐름 속에서 여성들은 미투운동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성폭력은 비정상적인 사람에 의해 범죄가 일어날 법한 장소에서 범죄를 유발할만한 행동과 표현을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관계 맺는 사람에 의해 한낮의 공공장소나 일터 등에서(심지어 장례식장에서도)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여성들은 경험을 통해 그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다른 여성들의 경험도 이해할 수 있었다. 한 정신질환자가 아니라 여성혐오 문화를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의 구조적 원인으로 지목했던 것처럼, 여성들은 가해자 처벌을 넘어 ‘강간문화’가 철폐되어야 한다고 외쳤다.
강간문화는 성폭력 사건이 발생하고 지속되는 조건이며, 언어, 규범, 제도, 몸의 습관 등을 통해 드러난다. 성폭력과 연애를 분간하지 않는 태도, 피해자에 대한 불신과 비난, 여성과 동등한 동료로서 관계 맺지 않고 여성을 성애화된 존재로 대하는 조직 관행, 남성의 성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므로 한 번쯤 성폭력을 저지를 수도 있다고 용인하는 분위기가 이 문화를 유지한다. 동의 과정 없이 여성의 ‘안돼’를 ‘돼’의 의미로 받아들이거나, 무시하고 밀어붙이는 게 강한 남성이라거나, 여성이 옷을 야하게 입거나 술에 취한 것은 동의의 뜻이라고 하는 등, 여성을 타자화하는 남성중심적인 상식들도 이 문화를 유지한다. 강간문화는 사건의 해결 과정에도 영향을 미친다. 성폭력 피해자의 주변인이(친구, 직장동료, 가족 등), 수사관과 재판관이, 법·제도가 강간문화를 대변하는 것은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로 나타나며 사건 해결은 요원해진다.
현재의 강간죄는 상대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이 있었는지가 범죄 성립의 기준이다. 이는 성폭력은 피해자가 저항하면 일어날 수 없을 것이란 잘못된 통념, 여성은 자신의 몸을 순결하게 유지해야 한다는 여성에 대한 오래된 규범과 연결되어 있다. 사이버성폭력범죄의 처벌근거인 카메라등이용촬영죄는 촬영된 신체 부위가 수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부분이었는지 여부를 국가가 판단하고 있어, 성폭력은 피해자의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규범을 재생산한다. 성폭력 역고소를 부추기는 변호사들은 여성은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이용해 남성으로부터 이익을 취할 것이라는 꽃뱀 신화를 확대·재생산한다. 이렇게 부추겨진 명예훼손이나 무고죄 등의 역고소는 신고율을 낮추고 성폭력 피해자가 지원제도를 이용하기 어렵게 한다. 여성이 성폭력을 신고했을 때 미온적인 태도로 사소한 일,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반응하며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는 수사기관은 성폭력을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냉소 혹은 좌절하게 한다.
반성폭력 운동은 구조적이고 일상적인 문화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성 규범과 지식, 성폭력의 개념과 판단 기준, 타인에 대한 윤리를 피해자의 관점에서 다시 쓰자는 것이다. 피해자 관점은 피해자의 말만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피해자의 말이 형식적으로만 들리기 쉬운 사회에서 피해자의 입장과 피해자와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들이 갖고 있는 해석의 합리성을 적극 수용해야 함을 말한다. 그동안 그리고 지금, 자신의 경험을 세상에 말하고 성차별·성폭력 없는 세상을 외치는 다수는 여성이다. 변화해야 할 세상은 가해자 개인만 축출되면 사건 해결이 끝나는 사회가 아니라, 성평등의 관점으로 모든 공간의 성문화가 재조직되는 사회이다. 강남역 여성 살해 사건 이후 여성들은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며 연대하고 있다. 달라진 여성들의 말하기에 한국 사회는 귀 기울이고 있는가. 변화를 위한 논의를 시작하고 행동하고 있는가. 이전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다. 성폭력이 문화라면 바뀌어야 할 것은 모든 것이다.
2018.05.17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