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10-19
- 2042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 입법예고에 관한 의견서
기관·단체명 :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자명 : 이명숙
주 소 : 서울특별시 마포구 성지1길 32-42, 2층
전화번호 : 02-338-2890
1. 제출 기관·단체 소개 및 의견 취지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는 1991년 4월 13일 개소하여,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차별과 위계가 만연한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임을 알려온 여성인권운동단체입니다. 29년간 약 8만5천여 건의 성폭력피해상담을 해오면서 성차별적 문화 개선 운동, 법‧정책 모니터링 등을 통해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 가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상담·지원 현장에서 마주하는 사례들을 통해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임신중지 전면 비범죄화의 필요성을 체감하였고, 2010년-2013년 “임신·출산 결정권을 위한 네트워크” 연대체 활동, 2012년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공동연구 『성폭력 피해로 인한 인공임신중절수술 지원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 2013년-2014년 “‘낙태죄’ 관련 법 개정을 위한 연속포럼” 공동주최, 2016년 “낙태죄 폐지를 위한 검은 시위‘ 공동주최, 2017년-2020년 “모두를위한낙태죄폐지공동행동” 연대체 활동 등을 통해 「형법」 제27장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고 성·재생산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활동을 꾸준히 지속해왔습니다.
위와 같은 활동 경험을 바탕으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 입법예고에 반대 의견을 제출합니다.
2. 전체 주요 내용에 대한 반대 이유
1) ‘낙태죄’ 존치를 전제로 하는 「모자보건법」일부개정안에 반대합니다.
2020년 10월 7일 보건복지부공고 제2020-708호에 입법 예고된 「모자보건법」 일부개정안(이하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같은 날 법무부공고 제2020-307호에 입법 예고된 「형법」 개정안(이하 ‘형법 입법예고안’)과 한 쌍으로 제안되었습니다. 형법 입법예고안은 「형법」상 ‘낙태죄’를 현행대로 존치하되, 제270조의2를 신설하여 임신중지 허용요건을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특정 사유에 해당하는 여성에게는 상담 의무와 숙려기간을 부과하는 내용을 골자로 합니다. 이를 전제로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임신중지에 필요한 상담사실확인서 발급 기관, 본인(또는 법정대리인)의 서면동의 의무,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의 예외적 허용 등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4월 11일 2017헌바127 결정을 통해 「형법」 제269조 제1항과 제270조 제1항 중 ‘의사’에 관한 부분이 헌법에 합치되지 아니한다고 선고했습니다. 재판관 4명은 헌법불합치 의견을 통해 “형벌의 위하가 임신종결 여부 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이라는 사정과 실제로 형사처벌되는 사례도 매우 드물다는 현실에 비추어보면” ‘낙태죄’는 실효성이 없다고 밝혔으며, 재판관 3명은 단순위헌의견을 통해 ‘낙태죄’ 처벌조항을 유지하고 특정 사유를 허용요건으로 두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가 낙태를 불가피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허용하여 주는 것이 되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사실상 박탈하게 될 수 있다”라고 경고했습니다.
‘낙태죄’의 위헌성을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낙태죄’를 폐지하는 것입니다. 정부는 형법 입법예고안이 기존 임신중지 허용요건을 확대하여 「형법」상 ‘낙태죄’의 “위헌적 상태를 제거”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헌법불합치 결정의 취지를 왜곡하고, 그동안 당사자로서 ‘낙태죄’와 관련된 경험을 용기 내어 이야기해온 여성들의 목소리를 묵살하는 기만입니다.
형법 입법예고안과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국가는 여전히 국민의 성·재생산을 통제하겠다’라는 선언에 불과합니다. 형법 입법예고안은 입증 불가능한 주수 기준으로 임신중지를 처벌하며, 여성에게 상담 의무와 숙려기간을 부과해 임신중지를 불필요하게 지연시키고 사실상 어렵게 만듭니다.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종합상담기관 설치·운영·지정 및 상담사실확인서 발급을 필수가 아닌 임의로 규정하고 의사가 자의적으로 진료 거부를 할 수 있도록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등 임신중지 관련 서비스의 접근성을 현저히 낮추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국가는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는커녕 임신한 여성이 상담 기관과 의료 기관을 전전하며 개인의 노력으로 필요한 서비스 제공자를 찾아야 하는 예측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아가게 될 것입니다.
2) ‘낙태죄’는 전면 폐지되어야 합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도 임신중지를 비범죄화해야 합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는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하여 임신된 경우”를 임신중지 허용요건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상담·지원 현장에서 마주하는 사례를 살펴보면, 성폭력 피해자가 합법적으로 임신중지를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임신중지 허용요건에 해당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먼저 성폭력 피해 사실을 입증하라고 요구받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처벌 가능성과 사회적 낙인 때문에 임신중지 서비스 제공을 아예 전적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의료기록 누락 및 조작 등을 제안하며 터무니없는 고비용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한편, ‘낙태죄’는 여성을 성폭력 및 각종 범죄 피해에 노출합니다.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처벌조항은 성폭력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남편 또는 남자친구에 의해 협박 수단으로 악용되며, 헤어진 이후에는 괴롭힘의 수단, 가사·민사 분쟁에서의 압박수단 등으로 악용됩니다.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여성은 「형법」상 ‘낙태죄’로 인해 충분한 정보와 안전하고 합법적인 서비스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법 시술을 도와주겠다는 남성에게 속아 성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사기꾼에게 가짜 유산유도제를 구매해 성분을 알 수 없는 약물을 복용하기도 합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가 2012년 여성가족부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성폭력 피해로 인한 인공임신중절수술 지원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는 “예외적 사유안에서의 지원 기준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이에 해당하지 않는 유형의 피해자 및 여성 일반의 권리를 제약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어 인공유산의 합법화 없이는 성폭력 피해자의 인공유산과 관련된 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따라서 낙태죄를 비범죄화하고 인공유산이 합법화되어야만 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가능하다” 라는 연구 결과를 남겼습니다.
3. 조문별 의견 및 이유
가. 인공임신중절의 정의 개정(안 제2조제7호) "인공임신중절수술"에서 수술을 삭제하고 약물·수술 등 의학적 방법으로 시술방법을 구체화하여 시술 방법 선택권 확대 |
임신중지를 전면 비범죄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전제로, 시술 방법을 수술로 제한하지 않고 약물·수술 등 의학적 방법을 포괄하여 의료접근권과 선택권을 확대하는 데 찬성합니다. 현행 법체계는 임신중지를 불법과 합법으로 나누고, 합법적인 임신중지 시술 방법을 수술로 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산유도제 도입에 법적 장벽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폭력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려면, 근본적으로는 임신중지를 원칙적 금지하는 ‘낙태죄’를 폐지해야 하며, 유산유도제를 정식 도입하고 의료인을 교육·훈련하여 다양한 시술 방법을 지원해야 합니다. |
나. 중앙 임신ㆍ출산 지원기관의 설치ㆍ운영(안 제7조의2) 위기갈등 상황의 임신ㆍ출산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중앙 지원기관을 설치하여 임신ㆍ출산 긴급전화 운영 및 온라인 상담을 제공하고, 임신ㆍ출산 종합상담기관 지원 및 관련 기관 간 연계체계 구축 등의 역할 부여 |
‘임신·출산’에 관한 업무만 수행하고 ‘임신중지’에 관한 업무는 명시하지 않는 ‘중앙 임신·출산 지원기관’의 설치·운영에 반대합니다.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여전히 ‘임신·출산’을 정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고, ‘임신중지’를 그와 동등한 권리로서 보장하지 않는 입법 태도를 보입니다. 안 제7조의2에 따르면, 중앙 임신·출산 지원기관은 1. 임신·출산 등에 관한 긴급전화 및 온라인 상담, 2.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 지원 및 종사자 교육, 임신·출산 관련 기관 간 연계체계 구축, 4. 그 밖에 임신·출산 지원 및 생식건강 증진과 관련한 업무를 수행합니다. 기관명부터 세부업무 내용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임신중지’는 상담·지원의 목적에 포함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신중지를 여성이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로 존중하지 않고, ‘위기·갈등’ 상황에서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비규범적 행위로 간주하는 것입니다. 중앙 지원기관을 통해 여성의 재생산권과 결정권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기관명, 업무 내용 등에 ‘임신중지’도 명시적으로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중앙 지원기관은 임신중지에 관한 상담·지원·그 밖에 업무를 수행할 법적 근거가 없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설령 임신중지에 관한 상담·지원을 부차적으로 수행한다고 하더라도, 입법예고안 자체의 한계로 인해 구조적으로 임신·출산을 중심으로 하는 상담·지원 체계가 구축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담자는 임신의 유지와 출산에 편중된 정보 및 서비스를 제공받을 가능성이 크고, 자칫 원치 않는 출산을 종용하는 상담·지원으로 이어질 우려가 있습니다. |
다. 임신ㆍ출산 종합상담 제공(안 제7조의3, 제7조의4) 보건소에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을 설치하여 임신으로 인한 위기갈등상황의 여성과 가족에게 정서적 지지, 지원정책 정보제공 등 임신 유지 여부에 관한 사회·심리적 상담을 제공하고, 임신의 유지·종결에 관한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할 수 있도록 함. 또한 비영리법인 등이 임신의 유지 여부에 관한 상담을 제공하고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하고자 하는 경우 보건복지부장관 또는 시·도 지사로부터 지정을 받도록 하여 상담기관의 접근성 제고 |
‘낙태죄’를 존치하고 여성에게 상담 의무 및 숙려기간을 부과하는 형법 입법예고안을 전제로, 여성에게 의무화된 상담을 제공할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을 설치·운영·지정하고 상담 여부를 증명하기 위한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상담 의무와 숙려기간은 의료접근권을 제한하고 임신중지를 불필요하게 지연시킵니다. 심지어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의 설치·운영·지정 및 상담사실확인서 발급을 필수로 따라야 하는 강행규정이 아닌 ‘할 수 있다’라는 임의규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이 설치 또는 지정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이론상으로는 상담만 제공하고 상담사실확인서를 발급해주지 않는 것도 가능합니다. 안 제14조의3에 신설된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 예외적 허용’ 조항까지 겹치면 의료접근권과 건강권은 심각하게 침해됩니다. 임신중지 허용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여성들은 서비스 제공 여부를 알 수 없는 상담 기관과 의료 기관을 전전해야 하며, 그로 인해 임신중지가 지연되는 부담과 위험은 개인이 져야 합니다.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담 기관이 과연 법적으로 의무화된 상담의 수요를 충족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안 제7조의3에 따르면,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은 1. 모성 및 영유아의 건강에 관한 교육 및 홍보, 2. 피임 등 생식건강 증진에 관한 교육 및 홍보, 3. 임신·출산 등에 대한 정보 제공 및 심리지원, 4. 임신의 유지·종결에 대한 상담, 5. 그 밖에 임신·출산 관련 서비스 연계 등 업무를 수행합니다. 임신중지에 필요한 상담 제공은 주요 업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안 제7조의3은 보건소가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을 설치·운영하는 대신 모자보건기구로 하여금 해당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정된 인력과 예산으로 임신·출산·임신중지 등 다양한 욕구를 가진 수혜자를 대상으로 각종 업무를 수행하면서 임신중지에 필요한 상담을 수요에 맞게 제공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폭력 피해자 상담·지원을 주요 업무 중 하나로 수행하며, 2019년 상담통계에 따르면 1년간 1,419회(1,028건)을 상담했고 그중 성폭력 상담은 1,293회(912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전화 상담 대기에 관한 문의가 빗발치고, 대면 또는 법률 상담은 한 달 이상 예약이 밀리곤 하는 현실입니다. 한편, 최근 보건소는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모자보건사업 등 일부 업무를 잠정 중단하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비상사태에는 상담 및 의료서비스 접근권이 더욱 제한될 것입니다. 국가가 충분하고 신속한 상담 제공을 보장할 수 없으면서 여성에게만 상담 의무를 부과해서는 안 됩니다. 임신은 정지된 상태가 아니라 연속적 발전과정에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임신중지가 지연될수록 여성의 건강권은 침해될 것이고, 특히 형법 입법예고안처럼 주수 제한이 있는 경우에는 순전히 행정적인 이유로 합법적인 임신중지를 못하게 될 위험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내용적 측면에서도 상담의무는 사실상 원치 않는 출산을 종용하려는 목적으로 규정되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듭니다. 형법 입법예고안은 “임신한 여성이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숙고”할 것을 규정하고 있고,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상담은 임신한 여성이 심리적 지지와 임신, 출산 및 양육 등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고 임신의 유지 여부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제공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임신중지에 필요한 상담이지만 정작 임신중지에 관한 정보는 상담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임신의 지속, 출산 및 양육에 편중된 정보를 제공하여 특정한 선택을 유도하고자 하며, 임신중지에 대한 책임은 여성이 “스스로 결정”했다며 개인에게 돌리고자 하는 의도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통해 “임신중지에 관한 법과 정책은 여성의 건강권과 인권을 보장해야” 하며, “안전한 임신중지를 제때 제공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규제나 정책, 제도적 장벽은 제거해야 한다.”라고 권고했습니다.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 유엔 자유권위원회, 세계산부인과학회 등 여러 국제기구도 상담의무, 숙려기간 등을 철폐하도록 거듭 권고해왔습니다. |
라. 원치 않은 임신 예방 등 지원(안 제12조제3항)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피임교육 및 홍보, 임신·출산 등에 관한 정보제공 및 상담, 인공임신중절관련 실태조사 및 연구, 국민의 생식건강 증진 사업 등 추진근거 마련 |
안 제12조 제3항에 규정된 사업의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임신중지를 여성의 권리로 보장하지 않고 예방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현행 「모자보건법」 제12조를 존치하고, 정보제공 및 상담 사업에 임신중지에 관한 내용을 명시적으로 포함하지 않는 예고 사항에 반대합니다. 「모자보건법」 제12조는 국민의 생식건강과 성·재생산권을 보장하기 위한 내용으로 개정돼야 합니다. 현행 「모자보건법」 제12조는 “인공임신중절 예방 등의 사업”을 제목으로 하며, 제12조 제1항은 “여성의 건강보호 및 생명존중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인공임신중절의 예방 등 필요한 사업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의 권리로서 안전한 임신중지를 보장해야 하는 원칙과 모순되며, 임신중지에 관한 사회적 낙인을 강화할 우려가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2020년 10월 12일 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이 대표 발의한 「모자보건법」 개정안(이하 ‘권인숙 의원안’)은 안 제12조의 제목을 “재생산건강 증진 사업 등”으로 개정하고, 안 제12조 제1항은 “피임, 임신·출산, 안전한 인공임신중단을 위한 상담, 정보 제공, 교육 등 필요한 사업을 실시”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고 국민의 재생산건강을 증진하기 위한 교육 및 홍보, 정보제공 및 심리상담 지원, 실태조사 및 연구, 그 밖에 재생산건강 증진 사업은 분명 필요합니다. 이러한 사업은 국민의 권리를 평등하게 보장려는 목적으로 실시되어야 하며, 임신·출산뿐 아니라 임신중지에 관한 내용도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입니다. |
마. 인공임신중절수술의 허용한계 및 형법 적용배제 규정 삭제(안 제14조 및 제28조) 합법적인 허용범위(주수, 사유, 절차요건) 관련 조항을 기본질서법인 형법에 규정하고 모자보건법에서는 삭제하며(제14조), 합법적 허용범위에 대한 형법의 적용배제 조항 삭제(제28조) |
「형법」상 ‘낙태죄’가 전면 폐지된다는 필수 조건하에, 원칙적 불법을 전제로 규정된 「모자보건법」 제14조 및 제28조 삭제에 찬성합니다. ‘낙태죄’는 전면 폐지되어야 합니다. 「형법」에 임신중지 처벌조항을 유지하면서 현행 「모자보건법」 제14조 및 제28조 등에 규정된 합법적인 허용범위를 「형법」으로 옮겨 규정하는 것은 기존 ‘처벌과 허용’ 프레임을 유지하는 것으로,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에 어긋납니다. 국가가 국민의 성·재생산을 통제하고 여성의 권리를 침해한다는 ‘낙태죄’의 위헌성은 해소되지 않은 채 남게 됩니다. |
바. 인공임신중절에 관한 의사의 설명 의무 등(안 제14조의2) 1) 여성의 인공임신중절에 관한 의학적 정보 접근성을 보장하고, 반복적인 인공임신중절 예방을 위해 「의료법」에 따른 의료행위 설명 외에도 피임방법, 계획임신 등에 관한 시술 전 의사의 충분한 설명의무를 두고, 자기결정에 따른 인공임신중절임을 확인하는 서면동의 규정 마련 2) 심신장애로 의사표시를 할 수 없는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로 본인 동의를 갈음할 수 있도록 함. 또한 만 16세 이상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미성년자가 법정대리인의 동의받기를 거부하는 등 불가피한 경우 임신의 유지·종결에 관한 상담사실확인서 만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만 16세 미만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법정대리인의 부재 또는 법정대리인에 의한 폭행·협박 등 학대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받을 수 없는 경우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의 임신 유지·종결에 관한 상담사실확인서 만으로 시술할 수 있도록 함 |
본인 또는 법정대리인의 서면동의를 필수로 규정하는 데 반대합니다. 형법 입법예고안이 ‘낙태죄’를 존치하고자 한다는 사정과 아직 임신중지에 대한 사회적 낙인이 존재하는 현실을 고려하면, 서면 동의 의무는 접근성을 해치고 임신중지에 대한 책임을 여성 개인에게만 돌리도록 작동할 가능성이 큽니다. 미성년자는 원칙적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전제로, 만 16세 이상 미성년자에게는 불가피한 경우 상담 의무를 부과하고, 만 16세 미만 미성년자에게는 법정대리인의 부재 또는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폭행·협박 등 학대상황에 있는 경우에 한하여 이를 입증할 수 있는 공적 자료의 제출과 상담 의무를 부과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아동·청소년이라고 하더라도 임신의 유지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다면 원칙적으로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필수로 규정하면 평소 본인과 법정대리인의 관계, 의사소통이나 의사결정에서의 불평등성, 동거 또는 인근접거주 여부, 이해관계의 일치 여부 등에 따라 임신중지가 지연되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될 수 있습니다.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가해자들은 피해자에게 “‘일탈계’ 운영 사실을 부모나 주변인에게 알리겠다”라고 협박하여 조직적으로 성착취했습니다. 왜 피해자들은 법정대리인인 부모에게 바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까요? 우리 사회에서 특히 아동·청소년이 성과 관련된 경험을 법정대리인에게 알리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두려운 일입니다. 안 제14조의2에 따르면, 16세 이상의 미성년자는 불가피한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시술할 수 있지만, 본인의 서면 동의와 상담의무가 요구됩니다. 상담의무의 문제점은 앞서 “다. 임신ㆍ출산 종합상담 제공(안 제7조의3, 제7조의4)”에 대한 의견에서 살펴보았으므로 생략합니다. 심지어 만 16세 미만의 미성년자는 법정대리인이 부재하거나 법정대리인으로부터 폭행·협박 등 학대상황에 있는 경우에만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 시술할 수 있는데, 본인의 서면 동의와 상담의무가 요구될 뿐만 아니라 학대를 입증할 수 있는 공적자료를 제출해야 합니다. 법정대리인의 학대를 신고해 「아동학대범죄의처벌등에관한특례법」에 따른 경찰의 응급조치결과보고서, 긴급임시조치결정서 또는 법원의 임시조치결정서, 보호처분결정서, 피해아동보호명령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와 같은 공적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만 16세 미만 미성년자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우며, 국가가 학대상황에 있는 아동·청소년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비현실적입니다. 2019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발표한 연구보고서 『경찰의 가정폭력 사건 대응 실태와 개선방안』에 따르면, 2017년 경찰의 가정폭력범죄 신고건수 대비 검거건수 비율은 13.8%에 불과했습니다. 검거 사건 중 경찰이 응급조치를 한 비율은 73.5%, 긴급임시조치를 한 비율은 3.1%, 임시조치 신청을 한 비율은 11.1%였습니다. |
사. 인공임신중절 요청에 대한 거부·수락(안 제14조의3) 의사의 개인 신념에 따른 인공임신중절 진료 거부를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인공임신중절 수락 또는 거부로 인한 불합리한 처우를 금지하며, 여성의 시술접근성 보장을 위해 의사는 시술요청을 거부하는 즉시 인공임신중절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을 안내하도록 규정 |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는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국민은 평등하게 안전하고 시의적절한 의료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따라서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다루는 의사는 사회적 책무가 막중하고 공공성이 강하게 요구되는 전문직입니다. 이에 「의료법」 제15조는 의료인 또는 의료기관 개설자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나 조산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의사가 개인의 호불호, 종교적·정치적 신념, 사회적 신분 등에 따라 진료를 거부할 경우 모든 국민에게 필수적으로 보장되어야 하는 건강권과 의료권이 침해되고 사회적 혼란과 부정의를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임신중지만 예외적으로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진료 거부를 허용하는 것은 여성에 대한 차별입니다. 임신중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여성만 요청하는 의료행위이며,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는 완벽한 피임방법은 없으므로 여성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의료서비스입니다.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임신중지 진료 거부의 예외적 허용은 여성의 결정권, 재생산권, 건강권, 의료접근권 등을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합니다. 진료 거부 시 상담 기관 안내의무는 실효성이 없는 조항입니다. 안 제14조의3은 의사가 임신중지 요청을 거부하는 경우 여성에게 중앙 임신·출산 지원기관의 긴급전화 및 임신·출산 종합상담기관에 관한 정보를 안내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형법 및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임신중지를 하고자 하는 여성은 먼저 상담 기관에서 의무화된 상담을 받고 24시간 이상 숙려기간을 가진 후 의사를 만나게 되는데, 진료 거부를 당하면 다시 상담 기관을 안내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여성에게 필요한 정보는 상담 기관이 아니라 안전하고 신속하게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해줄 의료 기관입니다. 의사 개인의 신념에 따른 임신중지 진료 거부를 인정하는 해외 입법례를 보더라도,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처럼 아무 조건이나 제약 없이 진료 거부를 허용하는 규정은 이례적입니다. 예를 들어 영국은 의사 개인의 진료 거부는 인정하지만, 의료 기관 전체가 진료 거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제한합니다.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할 다른 의료인이 없으면 진료 거부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맨섬에서 의사는 진료 거부 시 여성에게 임신중지 할 권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야 하고, 여성이 관련된 정보와 서비스에 지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의료 기관으로 연계해야 합니다. 단, 여성의 생명이나 건강이 위험한 응급상황에는 진료 거부를 할 수 없습니다. 아일랜드에서도 의사는 응급상황에는 진료 거부를 할 수 없고, 진료 거부 시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른 의료 기관으로 연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의사는 진료 거부 여부를 정부에게 알려야 하며, 정부는 임신중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기관의 정보를 국민에게 공개합니다. 반면에 안 제14조의3은 여성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고 있습니다. |
4. 결론
정부의 형법 및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은 여성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에 대한 고민 또는 고려, 임신중지 결정 과정에서의 안전과 권리 보장은 없고, 의심과 통제로 점철된 개정안입니다. 이는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취지에 정면으로 위반됩니다.
따라서 형법 입법예고안과 모자보건법 입법예고안을 즉각 철회하기 바랍니다. 「형법」은 제27장 ‘낙태죄’를 전면 폐지해야 하고, 「모자보건법」은 임신중지 비범죄화를 전제로 여성의 성·재생산권, 결정권, 건강권, 안전한 의료서비스 접근권 등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해야 합니다.
2020. 10. 19.
한국성폭력상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