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는 (잠재적) 회원들이 상담소에 소속감과 친근감을 느낄 수 있도록 연2회 회원놀이터를 기획하여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에는 <반려 식물 키워 볼까?>라는 제목으로 반려 식물을 심거나 분갈이하는 회원 공방을 진행했었죠. (상반기 회원놀이터 후기 https://stoprape.or.kr/1135)
하반기 회원놀이터는 지난 11월 6일(토) 오후 2시, 카페 슬금슬금에서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 수다모임 <나의 자기방어 말하기>라는 제목으로 진행됐습니다. 상담소는 그동안 비정기적으로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는데,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로 거듭난 여성/소수자들이 훈련이 아닌 실전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고 싶었습니다.
사실 이번 회원놀이터 홍보물에 실린 예시들은 상담소 활동가들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어요.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을 배우고 나면 일상 속에서 대응이 필요한 상황을 더 기민하게 인지하게 되잖아요. 특히 저는 활동가로서 '여성들의 안전을 위해 내가 나서야 해!'라는 책임감과 '나는 상담소 활동가니까 이 정도는 대응해야지! 여차하면 내 뒤에 상담소 있다!'라는 근자감으로 더 적극적으로 나서는 경향이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 112 문자내역을 보면 온갖 사건 사고를 신고한 기록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중이에요.
이렇듯 스스로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라고 자부하고 있는 저도 막상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 닥치면 늘 어렵습니다. 무슨 상황인지 확인하고, 신고해도 될지 또는 신고해야 할지 파악하고,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기다릴지 아니면 직접 개입해야 할지 판단하고, 만약 직접 개입한다면 낯선 사람과 언어적, 비언어적, 심한 경우 신체적으로 맞서야 하는 과정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요? 아무리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해봐도 그때그때 상황이 다 다르다보니 매번 우왕좌왕합니다. 돌아서면 항상 아쉬움이 남고요.
'이런 경험이 나 혼자만의 경험일 리 없다'라는 생각으로 활동가들과 이야기해보니, 다른 활동가들도 제각각 이야기 보따리가 터져나오더라고요. '이거다! 회원들과 이 주제로 이야기 나눠봐야겠어.' 그렇게 평소 진행했던 '여성주의 자기방어훈련'과 조금 다른 형태인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 수다모임'을 기획하게 됐어요.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 수다모임 <나의 자기방어 말하기>는 총 7명의 참여자와 함께 진행됐습니다. 아이스 브레이킹을 겸해 먼저 다양한 감정이나 느낌이 적힌 자기표현카드를 하나씩 골랐습니다. '설레다', '편안하다', '피곤하다', '짜증난다', '낯설다' 등 각자의 상태를 점검하고 서로 자기소개를 했습니다. 나이도, 직업도, 참여 동기도 다양한 참여자들이 평등하게 이야기 나누기 위한 '한국성폭력상담소 이 공간의 약속'도 다 같이 낭독했습니다.
이어서 '공포굴리기'라는 워크지를 통해 내가 이야기 나누고 싶은 자기방어 경험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키워드를 적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서로 그림을 보여주면서 본격적인 수다가 시작됐어요. 친한 친구가 부적절한 발언을 했을 때 관계가 깨지는 건 바라지 않지만 아무 말 없이 참고 넘어가기도 힘들었던 경험, 같이 일하는 사람이 자꾸 명령투로 지시하려고 들며 나를 존중하지 않았던 경험, 지하철 안에서 다른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술취한 남성을 제지한 경험, 문제 상황에 강하게 대응했다가 더 큰 물리적 폭력을 당해 두려움이 생긴 경험……다양하면서도 공감가는 사례가 정말 많았습니다.
저는 데이트폭력을 목격하고 112에 신고했던 경험을 그렸는데, 오히려 피해자분이 '제발 그냥 가세요'라며 목격자인 저를 말리고, 가해자는 뻔뻔하게 제 눈 앞에서도 피해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상황이었어요. 저는 너무 놀라서 말로만 하지 말라고 소리쳤는데, 가해자를 막으려면 몸싸움을 벌였어야 하는 건 아닌지 나중에도 그 상황이 계속 생각나더라고요('가해자가 차라리 나를 때렸으면 나는 합의도 안 해줄 거고 더 확실하게 처벌할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도 들었고요.) 다행히 경찰이 빨리 출동해서 피해자는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제 안에는 '더 잘 대응할 수 없었을까?'라는 찜찜한 마음이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돌아 보면 제가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것 같아요. 이번 회원놀이터에서 다른 참여자의 경험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로소 '그때 나는 최선을 다했어'라고 스스로를 칭찬해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최선을 다해 충분히 잘 대응하고 있었어요.
특히 한 참여자가 반려견과 산책하던 중 인도에 주정차된 오토바이를 보고 운전자에게 항의했던 경험을 이야기했을 때 저도 큰 힘을 받았습니다. "솔직히 쫄았거든요."라는 그 참여자의 말에 불현듯이 깨달았어요. '아, 나도 그때 쫄았었구나.' 활동가니까 쫄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쫄았고, 그래서 자존심도 상하고 잘 대응하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던 거예요. 그런데 다같이 이야기해 보니, 당연히 쫄만한 상황이잖아요. 보복에 대한 두려움도 생기고, 나 혼자만 위험한 게 아니라 내가 보호하고 싶은 존재(피해자 또는 반려견)가 더 위험해질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으니까.
'쫄아도 괜찮아. 그럼에도 용기내어 대응했으니까 잘 했다, 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어 활동가인 저에게도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나의 자기방어자 선언'을 쓰거나 그려서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회원소모임은 일회성 행사에 그쳤지만, 일상 속에서 훌륭하게 대응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자기방어자들이 외롭지 않게 더 자주 만나고 서로 으쌰으쌰 힘을 줄 수 있는 기회가 더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이 후기는 성문화운동팀 활동가 앎이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