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회견문]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 진술녹화 증거능력 폐기처분한 헌법재판소 규탄한다
[기자회견문]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 진술녹화 증거능력 폐기처분한 헌법재판소 규탄한다
2021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는 19세 미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의 진술이 수록된 영상물에 관하여 조사 과정에 동석하였던 신뢰관계인 등이 그 성립의 진정함을 인정한 경우 이를 증거로 할 수 있도록 정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2012. 12. 18. 법률 제11556호로 전부개정된 것)」 제30조 제6항 중 ‘제1항에 따라 촬영한 영상물에 수록된 피해자의 진술은 공판준비기일 또는 공판기일에 조사 과정에 동석하였던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 또는 진술조력인의 진술에 의하여 그 성립의 진정함이 인정된 경우에 증거로 할 수 있다’ 부분 가운데 19세 미만 성폭력범죄 피해자에 관한 부분(이하 ‘해당 조항’)이 헌법에 위반된다는 위헌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 재판관 6인(유남석, 이석태, 이은애, 이종석, 김기영, 문형배)은 해당조항이 피고인의 방어권, ‘반대신문권’을 제한하여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리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강력하게 규탄한다. 해당 조항은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가 피해경험을 반복해서 진술하는 것을 최소화하고, 법정 진술 및 반대신문을 받는 과정에서 입을 수 있는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도입됐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그동안 반성폭력 운동을 통해 가해자중심적인 형사사법체계를 바꾸고, 피고인 방어권 보장 뿐 아니라 피해자 보호 및 권리 보장도 중요한 인권이자 국가의 역할임을 강조해온 시대적 변화를 역행했다.
사법부는 피고인의 방어권을 명목으로 이루어지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얼마나 더 용인할 셈인가? 이미 우리는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을 상담·지원하면서 가해자가 방어권을 구실로 피해자에 대한 통념과 ‘꽃뱀 신화’를 강화하고, 피해자의 사적 정보를 파헤치고 유포하며, 성폭력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왜곡·훼손하고, 권력적인 위치를 과시하면서 피해자를 겁박하고 처벌의지를 좌절시키며 정의로운 문제해결을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을 보아왔다. 아동·청소년 피해의 경우 가해자가 친족, 교육자 등 가까운 관계에 있는 비율이 높아, 피해자의 약점 또는 양가감정을 이용하거나 주변인을 통해 계속해서 회유 또는 압박하는 등 2차 피해를 일으킬 가능성이 더 많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피해자들이 처한 현실을 철저하게 외면한 것이다.
이제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들은 수사·재판 과정에 반복해서 불려나가 피고인과 피고인 변호사의 공격적인 반대신문에 답변해야 하는 현실에 놓이게 되었다. 아동·청소년이나 장애인 성폭력 피해자의 경우 수사재판과정에서 발생할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진술을 최소화한다는 그간의 사회적 합의 과정을 뒤로 하고, 성폭력 사건과 무관한 과거 이력에 대한 질문, 피해에 대한 의심,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피고인 측의 반대 신문에 고스란히 노출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과거 영상 진술녹화를 통해 비로소 피해경험을 진술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었던 19세 미만 성폭력 피해자들이 가해자가 재심을 청구하면 지난한 수사·재판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위헌 결정에 반대의견을 제시한 헌법재판소 재판관 3인(이선애, 이영진, 이미선)은 “헌법상 재판절차진술권의 주체인 형사피해자가 궁극적으로 그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형사소송절차 진행 도중 오히려 2차 피해를 입는 현상을 방지하여야 할 공익 또한 매우 중대하”고, “2차 피해로부터 미성년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하여 마련한 장치가 피고인의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보다 신중하게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위헌결정의 중요한 근거로 제시된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은 공정한 재판과 재판의 결과적 정확성을 보장하는 도구적 의미를 가질 뿐, 공정한 재판의 절대적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견도 함께 제시했다.
성폭력 사건에서의 실체적 진실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을 보장한다고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의 입증 책임을 피해자에게 묻고, 일관되고 명확한 피해진술 마저도 그 진위여부를 의심하며, 고정된 피해자상에 부합하지 않으면 피해자가 아니라고 규정하는 현실에서 실체적 진실을 어떻게 판단하려는가? 피고인의 반대신문권만을 강조하며 피해자의 권리를 빼앗는 이번 위헌 결정이 피해자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정당화하고 용인해주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 심히 우려스럽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용기있는 고발로 한걸음 더 나아간 역사를 퇴행시키는 결정이자, 일반 시민의 상식에서도 크게 벗어난 중대한 오점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2021년 12월 23일, 2018헌바524판결을 기록하고 기억하겠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사회를 해당 조항이 없었던 19년 전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지만, 우리 삶은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2021년 1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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