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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사법 체계와 공모자들을 관통하는 잘 만든 다큐멘터리, 그녀가 말했다
  •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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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녀는 만났어요? 혹시 그 사람 살인자에요? 강도에요? 아니면 강간 피해자에요?”

조디의 딸이 영국 출장을 가서도 별다른 수확이 없는 것에 대한 조디의 좌절어린 얼굴을 보자 영상통화에서 무심코 한 말입니다. 조디는 연락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하비의 합의 대상자를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러 영국까지 날아갔지만, 외출한 대상자와 바로 만날 수 없어 말만 전하려던 참에 그의 남편조차 아내의 비밀을 몰랐다는 것만을 알아내고 고뇌하던 찰나였습니다. 조디는 딸에게 이런 말을 가르친 적이 없어 어디서 들었는지 묻자, 딸은 학교 얘들이 누구나 할 것 없이 그냥 다 하는 말이었다며 눈치를 본 후에 사과합니다. 이 말은 영화 내내 피해자가 침묵하는 것이 당연했던 미투 이전의 정국을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들도 알 만큼 구조적으로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이 사회의 불문율이라는 사실이 딸의 입을 통해 한 꺼풀 벗겨진 셈이죠.


메건 튜히 기자와 조디 캔터 기자를 연기한 캐리 밀리건(오)과  조 카잔(왼)의 모습

 100여명 이상의 피해자들의 고소 ·고발이 이루어졌던 하비 웨인스틴 사건을 뉴욕타임즈의 탐사보도 기자가 파헤치는 과정을 다룬 이 영화는 다소 예상치 못한 첫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한 젊은 여성이 96년 크로아티아에서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영화 촬영현장을 보게되는데요. 곧바로 그는 현장에서 보조를 서며 장비를 같이 나르고, 음향을 체크하는 일들을 하게되면서 사회초년생으로서 커리어를 시작합니다. 다소 불친절한 전개를 가진 이 첫 화면은 영화의 끝 부분에 가서 해당 피해자가 실명을 밝히고, 모든 인터뷰 자료의 기사화를 허용하는 전화를 남기면서 왜 이 화면으로 시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줍니다.1  해당 화면이 지나가고 몇 초 뒤 2016년의 뉴욕 한복판에서 한 여성이 당황과 모욕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울부짖으며 전속력을 다하여 뛰쳐나오는 장면이 교차하면서 머릿 속에 해당 인물을 각인하게 됩니다. 관람객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여성이 방금 웃는 얼굴로 열의를 다해 현장을 씩씩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전개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는 이 화면을 통해서 하비 웨인스틴의 성추문이 20년이 넘는 긴 역사동안 이어져 왔음을 충분히 짐작케 합니다.

 영화 내내 답답했던 지점이 몇 가지 있는데요. 그 지점을 살펴보니, 제가 이 영화에 기대했던 점과 실제 이 영화의 줄거리가 조금 달랐다는 데에 있습니다. 저는 해당 특집 기사를 작성하기까지의 기자로서의 고충을 겪었음에도 알려지지 않았던 동료 여성들의 노고와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촉발시키고자 이 영화가 제작되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영화는 현실을 숨기지 않고 보여주었습니다.  우선, 조디 캔터 기자가 EEOC(연방 평등 고용 위원회)에 담당자와 문의한 씬에서 고용주의 성범죄 사실을 구직을 희망하는 예비 고용인들이 절대 알 수 없게 되어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개인 정보 보호를 목적으로 공익을 침해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주는 부분에서는 통쾌했지만, 성범죄 기록을 표집한 메타 데이터를 이용해 아무런 보강 정책도 내놓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 실망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다음 순간의 답답함에 비하면 새발의 피라고 느꼈습니다.

 피해자들이 20년 넘게 이 순간을 기다려왔다고 대답하며 울음을 터뜨리거나 아예 다른 국가로 이주해서 커리어를 포기하고 살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공인의 성범죄 사실을 공연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합의서를 작성하고 거액의 합의금을 받았기 때문에 입막음 당한 것이지요. 강간 등의 혐의로 그를 고소하더라도 성범죄 사건은 재판정 밖에서라도 합의금을 받아야 하는 것이 미국의 관례처럼 되었기에 정의 구현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답답한 상황은 국내에서도 합의로 끝내고자 스토킹하는 피의자들의 집요함과 별반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피해자들은 하비의 입김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해 가난한 상태에서 자신을 대리해주는 변호사에게는 소송료의 60%에 해당하는 비용을 지불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합의서를 쓰고 합의금을 받았습니다. 이 합의금은 그 시절 재무 담당관의 입을 통해서 명백한 공금 횡령이지만, 하비는 자신이 차린 회사의 이사회로부터 징계 조치나 해고 등을 통보받지 않았다는 양심고백으로 흘러나옵니다. 합의서의 내용은 황당무계하지만 공포 그 자체로 다가옵니다. ‘가족이나 친구, 애인 등 어떠한 이에게도 발설해서는 안 된다. 또한, 앞으로 생기거나 생길 가능성이 있는 언론에도 제보하지 않는다’가 단서 조항으로 달려 있던 것이지요. 해당 사건 증거물로 제출되었던 모든 영상, 음성파일과 DNA 대조 분석 등의 실질 자료도 법원의 것이 되고 기간이 만료되면 자연스레 폐기 수순을 밟으니 그들은 다시 재판할 기회를 잃게 됩니다. 기네스 펠트로 등 유명한 할리우드 여배우들조차 그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털어놓았지만, 그들과 달리 단역이거나 조연에서 주연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신인 배우들의 공론화는 ‘주연을 얻기 위해 꼬리 친 것 아니냐’는 집요한 꽃뱀담론에 밀려 법적 대응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지목되기도 합니다.

 피해자들이 말하고 싶었음에도 말하지 못하고 주저하자 기자들은 다 함께 뛰어들어 특정인이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용기있는 몇몇조차 피해 경험담을 구체적으로 진술하면서도 실명을 밝히는 것은 소송을 대비해야 하기에 그럴 수 없다고 거절합니다. 피해자의 편에 서서 공론화를 이끌었던 지지자들이 사이버 명예훼손 및 무고로 벌금을 내는 국내상황과 교차할 수 있는 부분이지요. 피해자의 고통이 특히 상당하다고 여겨질만한 단서로는 후에 실명을 밝힌 중국계 미국인 피해자의 진술에서 두드러집니다. 하비와 그의 어시스턴트 자격으로 동행한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그의 호텔 방에서 강간을 당하였지만, 함께 출장간 동료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동반 퇴사하였고,2 이후로 여러 회사의 면접을 보았지만 대체 왜 그렇게 좋은 회사를 퇴사했냐는 질문에 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받아주는 일터가 없었기에 하비의 영화사로 재취직했다고 진술한 점은 더욱 슬픈 부분이었습니다. 미국과 먼 홍콩 지사로 자진 발령을 요청하여 생활공간이 분리되었으니 안심하자고 생각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정신건강이 악화되었다는 일화는 권력형 성폭력이나 직장 내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과정에서 물리적 기반에 대한 안전 욕구조차 스스로 찾아야 하는 피해자의 열악한 지위를 보여주었기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분통이 터지는 압권의 씬은 바로 하비의 변호인이 기사 발행을 저지하기 위한 신문사와의 미팅자리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하비가 ‘성추행에 대한 모든 사실을 부인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상호 존중의 함의- 남성은 동의했다고 생각했지만, 상대 여성은 아니라고 느껴 정신적으로 또 신체적으로 불쾌함을 느꼈을 수 있음-을 배워가고 있기에 피해자의 불편감 호소에 고용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껴 일종의 보상을 했다’는 시혜적인 태도가 그것입니다. 이 교묘한 발언을 통해서 고용인으로서의 도덕성을 챙긴 듯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혜적 태도와 상반되는 하비의 합의금 지불 횟수는 그의 가식을 드러내는 영화적 장치 중 하나입니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인 부분은 피해 장소로 자주 거론된 특정 호텔의 복도에서 울려퍼지는 실제 현장 녹음 음성입니다. 피해자가 지속적으로 분명한 거부 의사를 표명했음에도,질문은 늘 피해자를 향합니다. 재판정에서도 이러한 화면 녹화 영상을 틀었을 때.  피의자 등은 방의 구조나 욕실의 구조 등을 설명하면서 은폐된 공간이 아니라고 하거나 저런 것은 불법 녹취에 해당하므로 증거 효력이 없다는 등의 항변을 대리인을 통해 주장하기도 하지요. 물론, 답이 없는 것 같으면 저자세로 나오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매우 잘 짜인 플룻과 연출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영관이 적어 보기 쉽지 않다는 것이 유일한 흠이겠군요.


1) 해당 피해자가 결심을 굳힌 이유는, 하비의 사주로 보이는 압박 전화를 오래 전 연락이 끊긴 동료가 로라의 추가 폭로를 막고자 그 의중을 확인하고, 기억을 왜곡하여 심리적 부담을 주려는 데 있었던 일화를 통해 추정할 수 있음.

2) 동반 퇴사한 동료도 어시스턴트를 하면서 마사지 등을 해달라는 부당한 요구와 함께 기습 성추행을 당했고, 선배들에게 말하니 하비의 옆 의자에는 앉지 말라 등의 자구책을 전달받음. 그 동료는 새벽녘에 넋이 나간 채로 충동적으로 자신의 방 앞까지 도달한 피해자의 모습을 보고 직감했고, 타 감독과의 비즈스니스 미팅 도중 뛰어들어 항의했지만 하비가 부인하여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고 주장했음. 그는 기자에게 합의서 원본을 제공하면서 취재는 급물살을 타게 됨.


<이 후기는 자원활동가 기자단 '틈'의 원영님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