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성폭력상담소는 비동의 강간죄 관련 문화 및 담론 형성, ‘적극적 합의’ 개념 홍보 등 꾸준히 ‘성적 동의’와 관련한 활동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이어왔습니다. 그 활동의 일환으로, 이번에는 실제로 여성들이 친밀한 관계에서 ‘성적 동의’를 어떻게 고민하고 있는지 알아보고자 현실의 여성들을 찾아 나서기로 했는데요. 여성들의 경험과 관점에서 ‘성적 동의’의 의미를 재구성하기 위해 연애, 썸, 결혼 등 친밀한 관계에서 동의가 고민된 경험이 있는 10~50대 여성 15명을 심층 인터뷰했습니다.
인터뷰 결과 공유회가 10월 26일, 저녁 7시 창비서교빌딩 50주년 홀에서 열렸는데요. 상담소 일정을 끝내고 상담소의 모든 활동가들과 자원활동가 가을, 너굴까지 행사 현장으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저곳 행사 포스터를 붙이고, 마이크를 세팅하고, 통역사분들을 맞이하며 행사 준비를 하는 동안 설레기도, 떨리기도 했는데요. 감사하게도,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저희가 준비한 이야기를 들으러 와주셨습니다.
사회를 맡은 김혜정 활동가는 당일 ‘군형법 제92조의6 추행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 결정과 법무부의 이른바 ‘한국형 제시카법’(고위험군 가해자 조치) 추진이 예고된 상황을 언급하며, 현 시점에서 ‘성적 동의’를 함께 고민하고 질문해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함을 환기해주었습니다.
본격적인 결과 공유회는 성문화운동팀의 신아와 동은 활동가의 발표로 시작되었는데요. 실시간으로 수어통역과 문자통역도 함께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이 연구물이 상담소의 어떠한 활동 맥락에서 출발했는지, 그리고 이 인터뷰의 목적에 대해 설명했는데요. 인터뷰의 목적은 크게 세 가지, 1) 동의를 중심으로 친밀한 관계와 데이트 관계를 성 정치화하고, 2) 여성들의 해석투쟁을 드러냄으로써 3) ‘동의’의 의미를 재규정하고 성적자기결정권의 확장을 탐색하고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에 참여해주신 분들에 대한 정보를 소개해주었는데요. 다양한 연령대의 인터뷰이를 모집해 진행했기 때문에 더 폭넓은 양상을 보여줄 수 있는 인터뷰였습니다.
성문화운동팀이 공유해준 인터뷰 결과에는 15명의 풍부한 내러티브가 담겨 있었는데요. 그들의 내러티브에는 ‘동의’에 대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의미들이 다양하게 교차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인터뷰이들은 남성의 성적 욕망에 맞추거나 순응했던 경험에서 부담감이나 압박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는데요. 한편으로는 파트너와 동의에 대해 합의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노력한 경험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 속에서 포착되는 ‘동의’의 의미는 표면적이고 고정적인 계약이나 약속이기보다 특정한 관계 속에서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성적 동의’에 대한 논의가 성적 영역 외의 삶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권력 관계와 주도권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인상깊었습니다.
발표가 끝난 후에는 세 분의 토론이 이어졌는데요. 먼저 서울여자대학교 교양대학 김신현경 교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발표에 대해 현재 비동의강간죄 담론에 드러나는 단순한 해석들에 비해 훨씬 내적으로 복잡한 논의를 드러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 자체가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상상의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함께 고민해나갈 문제도 언급해주셨는데요. 사회 전반적으로 기울어진 권력관계 속에서 여성이 갖는 위치성이 친밀한 관계에서의 섹슈얼리티와 어떻게 영향을 주고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셨습니다.
다음으로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 나무 활동가님은 ‘장애여성의 동의를 묻지 않는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해주셨는데요. 성적 경험에서 장애여성들은 언제나 피해자로 위치할 뿐, 적극적으로 자신의 몸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탐색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선택을 통제하기보다,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정책, 제도, 그리고 고민을 나눌 커뮤니티가 단단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이 가장 와 닿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발언하신 서교인문사회연구실 호연 연구원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이번 연구를 진행하며 여러 번 자문도 받고, 함께 스터디도 진행하며 많은 도움을 받은 분입니다. 먼저 ‘동의’가 매번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맥락 하에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다시금 짚어주셨습니다. 특히 이번 연구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적극적 합의’의 원칙(“모든 과정에서 항상”)의 요건이 현실에서는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이러한 성적 동의에 대한 경험이 어떻게 해석되는지에 따라 이후 성적 실천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여성들의 ‘해석 투쟁’을 지원할 수 있는 성교육에 대해 고민해나가야 함을 강조해주셨습니다.
토론에 이어 플로어에서 질의응답을 받기도 했는데요. 여성으로서 즐거운 섹스를 위해 위험을 넘어 나아가지 않고 오히려 성적 욕망에 수동적이거나 무관심해지는 것에 대한 고민, 과거에 겪은 폭력을 친밀한 관계에서 익숙하게 다시 겪고 받아들이게 되는 문제, 그리고 장애여성의 성적자기결정권에 대한 공유가 부족한 현실에 대한 공감을 나누어주셨습니다. 토론자분들, 그리고 플로어의 참석자분들께서 나눠주신 생각들은 발표한 결과들을 넘어 서서 더욱 확장된 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논점들이었습니다.
친밀한 관계에서 ‘동의’에 대한 고민은 여성들의 보편적 고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겪고 해석하는 ‘동의’는 언제나 동일하지 않고, 상황과 맥락에 따라 관계 속에서 언어 또는 비언어를 통해 형성됩니다. 이번 결과 공유회는 현실의 여성들의 성적 경험에 나타난 다양한 의미의 ‘동의’, 그리고 여성이 즐겁고 만족스러운 성적 경험에 대한 논의를 나눌 수 있어 의미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동의를 질문하고 위험 너머 나아갈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발걸음에 여러분도 함께 해주세요!
<이 글은 자원활동가 가을 님이 작성해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