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작년 7월부터 올해 4월까지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자원활동가로 지낸 가을입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며 실천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던 차에 학교 인권센터를 통한 자원활동 기회로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자원활동을 하는 동안 주 1회 출근을 하며 내부활동을 보조하고, 상담소의 대외활동들도 함께했는데요. 우선 내부활동 중 가장 먼저 했던 업무는 2023년 후원의 밤 행사의 연락망을 구축하고 컨택하는 일이었습니다. 여성과 관련된 사회적 가치들을 추구하는 기업들의 사업들을 살피고, 사회운동단체들과 국회의원실에 연락을 돌리며 사회 속에서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어떠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있고, 또 상상할 수 있는지 알게 된 경험이었습니다.
자원활동 중간 중간 성문화운동팀에서 진행한 인터뷰 프로젝트의 속기록을 작성하기도 하고, 인터뷰 결과공유회 행사를 보조하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내부행사가 어떻게 구성되고 공유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외에 집회, 축제, 기자회견 등 행사 후기들을 작성하는 일들도 종종 있었는데요. 후기를 직접 작성할 때마다 각 행사가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다른 이들에겐 어떤 의미로 남을 수 있는지 정리할 수 있는 글쓰기 작업이라 즐거웠습니다.
내부활동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21대 국회 성폭력 관련 법안 발의 현황을 리스트업하고 관련 보고서를 작성한 일입니다. 하반기 내내 작업했을 정도로 오래 걸리기도 했던 일인데요. 21대 국회에서 어떠한 법안들이 발의되었고, 그 중 어떤 법안이 통과되고 통과되지 않았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사회적 이슈들이 제도정치에서의 담론과 법안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엑셀에 정리한 원자료를 바탕으로 저의 해석을 담아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성폭력 관련 주요 법안과 주된 담론의 흐름을 보고서로 정리하고 전체 활동가분들에게 공유하는 자리도 가졌습니다. 신기하게도 활동가분들이 활동을 하시며 갖게 된 인사이트들이 법안으로 증명되기도 했고, 반대로 데이터를 살펴보아야만 파악되는 법안 흐름들이 보이기도 했습니다. 21대 국회 법안 데이터를 기반으로 22대 국회에는 어떠한 성폭력, 성평등 법안을 촉구해야 하는지도 고민해보게 한 경험이었습니다.
21대 국회 성폭력 관련 법안 발의 현황 공유회
내부활동 이외에도 상담소의 다양한 대외활동들을 함께했는데요. 우선 본격적으로 자원활동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저는 퀴어문화축제·퀴어퍼레이드에 꼭 참여하고 싶어 퀴어문화축제에서 활동가분들이랑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었었는데요. 성소수자 의제에 관심 갖고 연구주제도 성소수자의 청소년기 학교 경험으로 정했던 시기라 저에겐 활동가분들과 함께 하는 퀴어문화축제·퀴어퍼레이드가 더욱 뜻깊었습니다. 전년도에 혼자 갔을 때보다 훨씬 더 기분 좋은 연대의 감정을 느끼고 30도가 넘는 더위가 잊힐 정도로 마음이 선선해졌던 날이었습니다.
강간죄 개정을 촉구하는 국회 토론회에 참관했을 때는 열심히 필기를 하다 꼭 하고 싶은 질문이 생겨 용기내어 질의를 하기도 했었는데요. 강간죄 개정이 단순히 법의 글자를 바꾸어 가해자 처벌 방식의 변화에 대한 문제가 아닌, 크고 작은 사회적 담론을 변화시키는 일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작년 여름에는 신림동 공원에서 또 한 명의 여성이 출근길에 성폭력과 살해를 당하는 일이 있었는데요. 한국성폭력상담소와 피해자 추모 집회에서 행진을 하며 여전히 바뀌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절망을 나누었습니다.
이외에도 시간이 될 때마다 상담소의 대외활동들에 참여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친족성폭력 생존기념 축제를 참여했을 때입니다. 무엇보다 그날은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민들의 거리에서 행진을 하며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집회에서 행진을 하다보면 생각보다 우리에게 관심을 갖고, 우리를 지지해주는 이들의 얼굴이 잘 보인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런 현장에서 친족성폭력 문제가 단지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일이 아닌, ‘정상가족’에 대한 프레임을 강요하는 가부장적 사회의 문제임을 외쳤다는 게 가장 의미 있었습니다.
올해 들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활동은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총선기획단 <페미니스트 콩깍지 프로젝트>에 참여한 일이었습니다. 총선을 앞두고 성평등 의제를 중심으로 정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는데요.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구체적인 문장들로 그려나가보고, 제도정치는 어디쯤 와 있는 것인지 함께 고민해볼 수 있었던 기회였습니다. 3월 여성의날에는 여성의날 행사에서 부스를 열기도 했는데요. 많은 분들과 콩깍지가 고민했던 가치들을 나눌 수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콩깍지 프로젝트를 하며 가장 뿌듯했던 일은 우리가 만든 정치 가치 문장들로 정치 에세이를 썼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가 마음에 들었던 ‘돈 안 되는 것들이 지지받았으면 좋겠어’와 ‘나이 어린 사람들이 존중받았으면 좋겠어’라는 두 문장을 주제로 에세이를 썼는데요. 운 좋게도 저희의 에세이를 여성신문에 기고하게 되어 우리의 이야기를 널리 나눌 수 있었던 것도 뜻깊었습니다. 콩깍지 프로젝트에서 느꼈던 따뜻한 연대 덕에 앞으로도 이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은 모임들을 내 삶 속에 만들어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 가을의 에세이 보러가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의 함께 한 10개월은 저에게 여러모로 큰 의미였습니다. 연구자로 살 건지 활동가로 살 건지 하나만 선택하라는 압박에 이제는 당당히 ‘저는 활동 없이 연구 할 수 없는 연구활동가’라 대답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활동가분들과 함께 하며 피부로 느끼고 심장이 끓었던 순간들 속에서 끊임없이 다짐해온 저의 결론입니다. 저에게 커다란 보라색 우산이 되어주신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분들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표하며, 우리는 또 현장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며 작별을 고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