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정을 받은 지 5년이 되었지만, 유산유도제 도입, 건강보험 적용 등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을 위해 아무런 법정책적인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실제로 임신중지가 필요한 당사자를 만나는 현장단체에서는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고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요?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이하 모임넷)에서 이러한 현장의 목소리를 알려 임신중지 지원체계 마련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6월 14일,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낙태죄’ 헌법불합치 5년,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 모색을 위한 토론회 – 여전히 안전한 임신중지를 가로막고 있는 장벽들, 현장에서 말한다>를 열었습니다.
토론회는 유지연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캠페이너의 사회로 기조발제 후, 5개의 현장단체 패널들이 현장의 고민과 쟁점을 덧붙이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김정혜님은 “성폭력 피해자 임신중단 지원 현황과 개선방안 연구”보고서를 바탕으로 기조발제를 진행했습니다. 통계, 인터뷰 등 여러 조사를 병행한 보고서에는 ‘낙태죄’가 폐지되었지만,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중지 지원은 여전히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선, 성폭력 피해자의 임신 중지 의료지원에 대한 여성가족부 운영지침이 여전히 변경되지 않아 「모자보건법」에 따라 “강간, 준강간에 의한 임신”인 경우에만 의료비를 지원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있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낙태죄’가 살아있던 시절, 임신중지의 허용 범위를 명시한 모자보건법 제14조는 ‘낙태죄’ 헌법불합치와 함께 법적 효력을 잃었는데 말이죠. 성폭력이 아니라 법적인 용어인 ‘강간, 준강간’으로 명시된 지침은 해바라기센터와 같은 현장에서 경찰 신고나 DNA 등 여러 추가 요건을 만들어내고 피해자의 임신중지 접근성을 떨어뜨렸습니다. 이외에도 해바라기센터에 따라 임신중지 지원을 위해 외부 자문위원이 참여하는 사례회의를 해야 하거나 피해자가 청소년일 경우, 부모의 동의를 요구했습니다. 이는 피해자가 임신중지를 더 늦추거나 지원 요청을 포기하도록 하게 만드는 요인이었습니다.
또한, 임신중지 지원 과정에서 임신중지 의료 제공이 가능한 병원을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고, 낙태죄 비범죄화에 대한 의료인의 인식 부족, 그로 인한 성폭력 증빙 요구도 걸림돌로 작용했습니다. 본래 성폭력으로 인한 임신중지는 이전부터 건강보험 적용이 가능했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건강보험을 적용한 사례는 적었습니다. 임신중단 이후에 재피해 예방을 위한 피임지원이나 사후 상담도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성폭력 중 일부(법적인 강간, 준강간)에 한해서만 임신중지 지원을 잘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제는 임신중지 의료의 정상화, 임신중지 의료 접근성 강화, 여성가족부 지침 개정, 아동청소년 및 장애인 피해자의 자기결정권 보장, 의료인 및 지원자의 역량 강화 등을 제안하며 끝맺습니다.
이어 김세은 탁틴내일 활동가가 청소년 임신중단 사례를 공유하며 청소년에게 요구되는 ‘보호자 동의’가 임신중단 시기를 지연시키고 청소년을 위험한 임신중단으로 내몬다는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진희 장애여성공감 대표는 장애여성이 제도적 지원을 받기 위해서 원치 않는 임신이 성폭력 피해로 인한 것이거나 피해자의 장애를 취약성으로 설명하며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 현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장애여성은 임신중지 과정에서 스스로의 의사와 결정이 존중되지 않았습니다. 유들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 활동가는 임신, 출산 관련 지원체계와 법이 모두 “여성”만을 대상으로 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한국에서도 생식능력을 제거하지 않고 법적 성별 정정 허가를 받는 트랜스젠더가 점점 증가하는 상황에서 트랜스젠더의 의료접근성에 대한 고민을 던졌습니다. 유랑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는 스텔싱, 재생산 통제 사례들을 소개하며 임신 초기에 성폭력 인지와 대응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것을 전제하는 성폭력 임신중지 지원체계가 얼마나 많은 실제 성폭력을 배제하는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말했습니다. 나나 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활동가는 성매매 여성에게 임신중지가 각자 알아서 잘 처리해야 하는 ‘자기관리’의 영역으로 남겨져 있지만, 성매매 여성의 자기관리는 쉽게 침범당하고 업소는 여성의 건강권을 전혀 고려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했습니다. 한편, 성매매피해지원체계 운영지침에는 임신중지 관련 내용이 아예 존재하지 않아 임신중지 지원여부가 개별 상담소의 몫이 되고 이 과정에서 성매매여성은 온전한 지원 대상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날 현장단체가 나눈 쟁점과 문제의식은 임신중지를 생애주기에 따른 성과 재생산권리 전반의 영역으로 위치시키며 양질의 임신중지 지원체계 마련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한편, “낙태죄”라는 형법만 법적 효력을 잃었을 뿐, 임신중지 권리 보장을 위해 여전히 살아있는 제도와 관습에 어떻게 개입할 수 있을지,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낡은 인식과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도 남겼습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앞으로도 현장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앞으로도 임신중지 권리보장을 위한 활동을 계속 해 나갈 것입니다.
이 글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유랑 활동가가 작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