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지금은 살인죄 여부가 아닌 ‘36주가 되기 이전에 무엇이 필요했는지’를 물을 때다.
보건복지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공식적인 보건의료 체계와 가이드를 마련하라.
지난 7월, 유튜브에 업로드된 임신 36주 차 임신중지 수술 브이로그 영상의 파장이 커지자 보건복지부가 ‘살인죄’ 적용 여부에 대해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그리고 8월 12일, 경찰은 기자간담회에서 영상을 올린 여성과 수술을 진행한 병원장 등 두 명의 신원을 파악하여 입건하고 살인죄 증거 확보를 위한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 대부분의 언론에서 이 사건이 ’낙태죄‘ 폐지 이후 입법공백으로 인해 처벌할 법이 없어 발생한 문제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낙태죄‘가 존재하던 때에도 ’낙태죄‘와 ’살인죄‘는 구분되었으며, 임신중지에는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입법 공백으로 인해 살인죄가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어떻게든 여성들을 처벌하는 방식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부의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가 보다 중요하게 질문해야 할 것은 살인죄의 성립 여부가 아니라, 왜 ‘낙태죄’의 폐지 이후에도 이전과 다름 없이 이처럼 늦은 시기에 임신중지가 진행되었는지, 임신 36주차가 되어서야 임신중지 결정을 내리기 이전에 이 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번 사례와 같은 후기 임신중지는 '낙태죄'가 존재하거나, 처벌 기준을 아무리 엄격하게 해도 일어나는 일로써, 해당 여성과 병원을 처벌한다고 해서 다시 벌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임신중지에 관한 결정은 결국 양육 여건에 달려 있다는 것이며, 양육 여건은 여성 개인의 책임과 의지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사실이다. 때문에 처벌은 이 결정을 중단시키는 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결정을 지연시키고 더욱 비공식적이고 위험한 임신중지를 만들 뿐이며, 출산 후 영아사망률을 높이게 된다. 따라서 처벌이 아니라 되도록 빠른 시기에 임신중지 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하며, 공식 의료 체계 안에서 의료적 가이드를 통해 진행되어야 하고, 상담과 관련 지원이 연계되어야 한다.
비범죄화 이후 우리는 계속하여 보건복지부에 임신중지 접근성 보장을 위한 보건의료 가이드와 상담 및 연계 체계 구축 등 공식 의료체계에서 임신중지를 다룰 것을 요구해왔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이후에도 여전히 ‘낙태죄’가 존재하던 때의 비공식적 의료 관행만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보건의료 접근성이 낮고 사회경제적 여건이 취약한 경우에는 초기에 임신중지를 하지 못하고 시기만 지연되는 상황을 더 많이 겪게 된다. 의료기관의 거부, 과도한 비용 청구, 제3자의 개입, 폭력적 상황 등 다양한 요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다. 또한, 임신 사실을 뒤늦게 인지하거나 초기에는 출산을 계획했다가 상황이 변화하여 부득이하게 후기 임신중지를 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에 임신 중 어느 시기에라도 당사자가 필요한 정보와 상담, 의료 기관 및 지원 체계에 빠르게 접근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보건복지부는 이러한 요구를 묵살하고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아 의료비는 병원마다 부르는 게 값이고 유산유도제는 여전히 온라인 암시장을 떠돌고 있음에도 실질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임신중지가 비범죄화된 지 3년이 지났으나 임신중지 보건의료 서비스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있다. 그 결과 ‘낙태죄’가 살아있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문제가 똑같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이 모든 책임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 체계 구축을 방기한 보건복지부에 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이제와서 여성과 의료인에 대한 임신중지 수사와 처벌을 운운하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자신들의 역할과 책임이 무엇인지 스스로 되물어야 한다. 이 여성에게 임신 36주차가 되기 이전에 무엇이 필요했는지 돌아보며 임신중지를 위한 보건의료체계 마련을 당장 시작해야 한다. 임신중지를 결정하였다면 임신 후기까지 지연되지 않고 초기에 안전하게 임신 중지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건의료서비스 및 정보제공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임신 기간과 당사자의 상황, 사회경제적 여건에 따른 명확한 보건의료 지침과 가이드를 마련해야 한다. 보건의료기관의 임신중지 서비스 제공 현황을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약물이나 수술을 통한 임신중지가 제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의료기관 간 연계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보건복지부가 지금처럼 여전히 손을 놓고 있는다면, 이와 비슷한 일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이번 보도된 사안은 생명권과 선택권을 법적 처벌 기준으로 저울질할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인 여건을 바꿔나가야 할 국가의 책임 문제다. ‘낙태죄’ 폐지라는 커다란 역사적 성취에 부응하는 후속대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지금까지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책임을 방기해왔던 보건복지부가 이제라도 그 책임을 다하는 데 전력을 다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 우리는 이제 ‘낙태죄’가 존재하던 시대와는 다른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정부 또한 이를 전제로 새로운 틀의 정책을 수립하고 구축해 나갈 것을 촉구한다.
2024년 8월 13일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 보장 네트워크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권실현을위한행동하는간호사회,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건강권실현을위한행동하는간호사회,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노동당, 녹색당, 변화된미래를만드는미혼모협회 인트리,반성매매인권행동 이룸,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 서울여성회, 성노동자해방행동 주홍빛연대 차차, 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시민건강연구소, 여성환경연대, 인권운동네트워크 바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장애여성공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전국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 탁틴내일, 트랜스젠더인권단체 조각보, 플랫폼C, 한국여성단체연합, 한국여성민우회, 한국여성의전화, 한국성폭력상담소, 홈리스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