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도 변화
안녕하세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국회토론회 기획단으로 참여한 ‘명’입니다. 저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에 관심을 가진 페미니스트으로서 기획단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두 차례의 모임을 통해 생존자분들과 활동가분들을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고 공부하였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여러 의견을 접하며 제 시각을 확장하고 생각을 다듬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사진 : 네모나게 둘러앉아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 나누고 있는 모습)
2회차 모임은 ‘정상 가족’, ‘법적 의의’, ‘일상의 회복’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각자가 작성한 글을 공유하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이 중 ‘정상 가족’을 선택해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와 관련된 글을 작성했습니다.
한국 사회는 가족의 구성 형태와 경제력, 거주지, 연락 빈도, 애정표현 방법까지 세세한 기준을 통해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을 규정합니다. 그러나 정상 가족의 틀에 맞지 않는 가족들조차도 가정 내 문제를 외면하기 위해 정상가족이라는 허울에 속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예를 들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이 행해졌을지라도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는 단란한 가족이다.”라거나 “하나의 지원조차 받지 못했을 아이들보다는 풍족하게 살게 해주었으니 충분하지 않느냐.”와 같이 ‘비정상성’을 타자화하는 것을 통해 가정 내의 문제는 정당화됩니다. 결국, 한국의 ‘정상 가족’은 그 자체로 이상적인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닌 단지 ‘비정상’에 속하지 않은 상태, 즉 ‘비정상 가족’의 여집합일 뿐입니다.
특히, 폭력과 관련해 가족이라는 이름은 가장 허울 좋은 면죄부로 작용합니다. 친족 성폭력의 경우 피해자가 스스로 피해 사실을 인지하지조차 못하게 하거나 신고를 꺼리게 만듭니다. 다른 가족 구성원들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으로 침묵하기를 강요하며, 국가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터무니없는 솜방망이 처벌을 내립니다. 피해자가 독립된 개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우리는 모호하게 정의되어 온 ‘비정상성’에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정상 가족’에 대한 규정을 해체하는 것은 곧 우리가 보편적인 비정상성을 제대로 마주하게 하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사회적 인식 변화는 물론 강력한 처벌과 공소시효 폐지와 같은 법적인 제도 개선이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개정법률안을 검토하며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폐지를 가로막는 논리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사전에 관련 논문을 읽으며 스스로 공부했을 때도 느꼈지만 법적 논리가 현실과 크게 괴리되어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법적 안정성과 형평성이 과연 피해자 구제에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친족 성폭력이 가족 구성원 간 위계에서 발생한 권력에 의한 폭력이라는 점에 주목하여 이러한 권력의 격차에 의해 피해 시점 이후 신고가 이루어지기까지의 시간적 격차가 크게 벌어진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효과적으로 펼칠 방법을 논의하며 더 나아가 최종 목표는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데 그치지 않고 범죄 자체를 근절하는 데 있음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있을 국회토론회에서 더욱 심도 있는 논의가 이어질 것이라는 점이 기대되었습니다.
2회차의 모임을 끝으로 국회토론회 사전 모임이 종료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 토론회에 모인 것일까요? 공폐단단 활동, 시위, 인터뷰 등 다양한 방법으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발화’의 또 다른 방식으로 국회토론회를 선택한 것입니다.
사실,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권력을 필요로 합니다. 목소리 내는 법을 배우는 것부터 발화할 공간을 얻는 것, 귀담아 들어줄 청중을 찾는 것까지—말하는 것은 여태 주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었습니다. 특히 전문적인 용어로 기술된 법의 언어를 이해하는 게 어렵고 힘든 것처럼 듣는 것은 때로 엄중한 노력을 요구하기에 수많은 이야기에 대해 선택적인 대답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획단 활동을 통해 의제를 처음 접한 제가 공부할 기회를 얻은 것은 뜻깊었던 경험이지만, 동시에 친족 공소시효 폐지 운동이 보편적으로 이해되기까지 사람들의 듣기 위한 의지가 얼마나 많이 필요할지에 대해 씁쓸한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번 경험을 통해 ‘듣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말하기와 달리 듣기는 어떤 자격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소외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만으로도 연대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게 제가 ‘감히’ 발언해도 될지 몰라 말하지 못하고 듣기에 집중하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야기에 경청하는 것은 그의 발화가 나의 세계에도 들어왔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즉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적 영역에 갇혀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서사를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첫발이 될 수 있습니다. 투명한 가족이 실현되고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가 폐지될 때까지, 나아가 모두가 각자 원하는 가족을 향유할 수 있을 때까지 소외된 목소리와 이를 향한 경청이 우리가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후기는 친족성폭력 공소시효 폐지 국회 토론회 기획단 명님이 작성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