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대/연구
세계여성쉼터대회 마지막 날
폐막식
성폭력 가해를 사과한다는 것의 의미
백목련 : 폐막식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책 <버자이너 모놀로그>로 유명한 작가 이브 앤슬러를 재발견한 그 순간이었다.
백목련 : 이전 플레너리 중 콩고 민주 공화국의 씨티 오브 조이라는 쉼터 설립기금을 이브가 모아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그냥 '뭐, 유명한 사람이라 그런가?' 하고 넘어갔다. 난 정말 이브에 대해서 몰랐다. 사회자가 이브가 성폭력 피해생존자를 지원하는 여러 일을 했다고 소개하면서 무엇이 당신을 이런 사람으로 만들었는지를 물었다. 이브는 멋쩍게 혹은 자조하며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이브의 아버지는 이브에게 성폭력을 가해한 가해자였다.
수수 : 이브 앤슬러의 고백은 담담하지만 힘이 있었다. 자신이 경험한 폭력과 마주하고, 그것을 소화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설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이 있었을까 싶었다.
백목련 : 이어서 이브는 "이 자리에 있는 쉼터 활동가 여러분들 중에서도 나와 같은 성폭력 피해생존자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가해자들처럼 어린 시절의 학대 경험이나 피해 경험을 핑계대며 누군가를 때리거나 죽이거나 총질하지 않는다. 가해자들이 말하는 권력 따위가 진짜가 아니라 피해의 경험을 통해 다른 피해생존자를 지원하고 헌신하는 그 힘이야 말로 진정한 권력이다"고 덧붙였다. 이 말을 듣는 순간 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기도 했다.
수수 : 상담소에서 피해생존자들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때 우리가 말하는 힘은 가해자들이 이용하던 힘과는 분명 다르다. 힘과 권력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은 꼭 필요한 것 같다.
백목련 : 이번 신간인 Apology는 가해자가 어떻게 제대로 사과할 수 있게 하느냐에 대해 쓴 소설이라고 했다. 나는 사과 이론서 같은 책일 줄 알았는데 이브가 죽은 아버지, 즉 가해자가 되어 그의 입을 통해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가해에 대한 정확한 묘사와 사과를 하게 하는 소설이었다. 이 고통스러운 과정 속에서 가해자이자 아버지이자 한 때 친구였던 사람에 대한 양가감정도 드러난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지 못했다. 이 책을 쓰면서 이브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안 되지 않아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다.
수수 : 나도 Apology란 제목만 보고 처음엔 오해를 했다. 의미없는 사과를 너무 많이 만나서 그런 거 같다. 열림터 생활인들이 가족으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어떻게 가족을 고소하니', 즉, '용서해라'이다. 성폭력을 아예 부인하는 경우도 많지만, 성폭력 가해를 인정하더라도 피해자한테 용서를 강요하는 경우가 정말 많다. 고소를 취하시키기 위해 어쭙잖은 '사과'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경우 가해자들은 더 뻔뻔해진다. '내가 사과했는데, 네가 어떻게 나를 고소하니? 가족인데?' 자신의 가해와 잘못을 처절하게 인정하고, 피해자에게 사과하는 것이 꼭 필요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사과는 잘 일어나지 않는다.
백목련 : 이브가 가해자 입장에 서 본 것은 사람들이 피해생존자에게 너무 쉽게 말하는 용서를 위해서가 아니라-가해자가 온전히 사과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은 이제 실제로는 불가능한 일이 되었음에도, 피해를 직면하며 가해자가 가진 위력을 하나씩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그 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나도 어서 Apology를 읽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수 : 나도 읽어보고 싶다. 그런데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으면 더 좋겠다!
백목련 : 그래서 연구소 활동가들과 함께 번역하려고 했지만 전문성이 떨어진다며 상근자들이 말렸지… 유능한 출판사 중에 한 곳에서 어서 한국어로 출판해 주면 좋겠다. 감동의 도가니 이후에는 One Bilion Rising을 같이 추면서 열기를 달구었던 거 기억나는지? 작년에 우리 상담소에서도 여성의 날 기념 퍼포먼스로 한국 버전의 OBR을 기획하고 각지에서 같이 추었는데 개인적으로 원래 OBR 안무보다 한국 버전의 OBR이 더 좋은 것 같다! 물론 안무를 다 외우지 못해 원래 안무에 따라 허우적, 허우적 춤을 추었다. OBR도 이브가 함께 한 작업이라고 하니 정말 이브의 재발견!
이쯤에서 싸우는 여자가 춤춘다 영상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가시죠
우리가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어요
수수 : 아참, 마지막 날에는 폭력피해 여성청소년 일시쉼터에 관한 전시도 봤다. 한국에는 가정폭력피해자보호시설과 성폭력피해자보호시설, 성매매피해자보호시설이 나뉘어 있다. 세 시설에 국가가 보조하는 금액도 다르고, 시설마다의 지원 내용도 다르다. 물론 가정폭력, 성폭력, 성매매 피해에 차이가 존재하지만 어떤 면에서 세 폭력은 공통점을 가지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다른 나라의 쉼터들은 가정폭력과 성폭력 피해 쉼터를 구분하는 것 같진 않았다. 열림터의 경우에는 성폭력 피해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래서인지 원가정에 머물기 어려운 친족성폭력피해 청소년들이 많이 입소한다. 폭력피해 여성청소년 일시쉼터 전시는 많은 면에서 열리터를 떠오르게 했다. 전시의 내용은 한 청소년이 쉼터에 들어와서, 퇴소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수수 : 전시품 중에 너무 귀여워서 눈길을 끈 것이 있었다. 이 쉼터에서는 퇴소하는 사람에게는 Meow Meow Wonderful (<야옹야옹멋져/멋진야옹야옹>)이라는 그림책을 선물한다고 했다. 퇴소를 기념하고, 앞으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내용이 담긴 책이라고 한다. 작년 열림터에서 퇴소생활인을 위해 자립축하파티를 연 적이 있다. 하지만 모든 퇴소생활인과 자립축하파티를 열기는 힘들다. 차근차근 잘 준비해서 자립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갑자기 뛰쳐나가는 사람들도 많고, 활동가들의 만류 속에서 가해자가 있는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일도 잦다. Meow Meow Wonderful 을 보면서 그렇게 갑작스레 열림터를 떠나는 이들에게도 안녕을 바라는 작은 선물을 줄 수 있다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당신이 퇴소한 이후에도 언제든지 열림터에 연락할 수 있고, 열림터가 당신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다는 토큰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수수 : 열림터 생활인, 퇴소한 또우리,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여러분들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번 후기는 여기서 마친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다음 번엔 대만 여성 청소년 쉼터 방문 후기가 올라올 예정입니다. 다른 나라의 쉼터는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궁금한 분은 다음 편을 기다리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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