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소식지
나눔터 82호 <생존자의 목소리 ②>
행동할 권리
- 만두
<생존자의 목소리>는 연 2회(1월, 7월) 발간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회원소식지 [나눔터]를 통해서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기 위해 마련된 코너입니다. 투고를 원하시는 분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대표메일 (ksvrc@sisters.or.kr)로 보내주세요. ☞자세한 안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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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2회 연재됩니다.)
2017년 1월. 최순실 국정농단, 박근혜 탄핵, 광화문 광장의 촛불집회. 일련의 뒤숭숭한 뉴스들을 보며 나도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나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옆에 앉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엄마는 5.18 민주화 운동 때 참여했었어?” 무심하게 TV를 보며 엄마는 대답했다. “아니, 엄마 고등학교 친구가 시위에 나갔다가 끌려가서 물고문 당해서는 몇 달 후에 바보가 되어서 왔더라. 엄마는 무서워서 못 했어. 그 친구 정말 똑똑했었는데..” 엄마는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어지는 장면으로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상규명 시위 장면이 등장했다. 엄마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자식 죽은 거 그만 좀 우려먹지, 지겨워 죽겠어. 왜 아직도 난리니?” 그 말에 발끈한 나는 엄마에게 내가 저렇게 죽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냐고 반문했다.
다음날, 이어지는 엉망진창의 뉴스를 보며 나는 박근혜와 최순실 욕을 했다. 옆에서 밥을 먹고 있던 아빠는 저런 뉴스가 “지겹다”고 말했다. 사건이 해결되건 말건 관계없이 왜 아직도 저걸로 시끄럽게 뉴스에서 떠들어대고 시위를 나가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하며 들고 있던 깍두기를 마저 씹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말없이 뉴스를 봤다.
주말. 토익 스피킹 준비하랴 공모전 준비하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취업준비를 하던 난 제출할 PPT 제작을 빠르게 끝내고 같은 과 동기와 함께 학교 후문 편의점에서 마스크를 샀다.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환승해 광화문에 도착했다. 끝없이 이어진 행렬. 차 하나 없는 8차선 도로. 전동 휠체어를 탄 아저씨들도 손에 촛불을 들고 사람으로 가득 찬 도로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다리 쭉 펴고 앉을 자리 하나 없는 광장이지만, 그 누구도 화내거나 소리치지 않았다. 난 친구 손을 잡고 광화문 중심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광화문 광장 중심에는 노란 천막이 있었다. 사람들이 도란도란 앉아 노란 리본을 만들고 있었다. 아직 찾지 못한 아이들의 사진도 문구와 함께 걸려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가 울컥, 하고 뜨겁게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친구와 나는 오래도록 그 곳에 있었다. 구호도 함께 외치고, 촛불 하나 흔들며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그 수많은 사람들과 공통된 마음 하나로 그 자리에서 꿋꿋이 버텼다.
막차를 타고 여차여차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이 TV앞에 모여 뉴스를 보고 있었다. 광화문 앞에 집결된 인원이 100만명이 넘어갔다는 뉴스 속보. 빛나는 촛불의 물결. 평화로운 시위. 일련의 단어들이 지나갔다. 나는 가족 누구에게도 그 시위에 다녀왔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세월호 사건을 이야기 하듯이 내 상처에 대해 지겹다고 말했다. 내 부모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엄마가 미워요, 오빠가 싫어요, 아빠가 불편해요.”
몇 달 전 대학 졸업을 앞두고, 나는 무언가에 이끌려 난생 처음으로 내 이야기를 어딘가에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교 상담센터를 찾았고, 희망하는 상담 주제를 기재하는 칸에 이렇게 적었다. 가장 간결하지만 가장 적절한 표현이었다. 상담 선생님은 나를 처음 만날 날, 내게 생존자라고 했다. 그리고 하루빨리 그 집에서 독립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당시 나는 집에서 항상 방 문을 잠그고 있어야만 마음이 놓였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거렸다. 때때로 살인 충동이 들었고, 자주 공격적으로 행동했다. 나는 사랑 받고 싶지만 상처에 둘러싸여 가시로 한껏 방어하는, 고슴도치였다. 엄마와 오빠는 가해자였고, 아빠는 방관자였다. 엄마는 오빠를 편애하며 나를 학대했고, 오빠는 엄마의 편애에 힘입어 나를 성폭행하고 폭행을 휘둘렀다. 아빠는 가정에 무관심하고 자기자신이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너 같은 애가 태어나지 않았으면 자기가 더 행복했을 거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생일마다 세상에 다시는 나 같은 아이가 태어나지 않기를 바랬다. 얼마나 외로울지 알기 때문이다.
사실 난 오빠의 성폭행 사실들로 열림터에 입소했지만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사람은 성범죄 가해자가 아닌, 엄마였다. 오빠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괴롭혔다. 가장 인정하기 싫지만 슬픈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의 동조자는 엄마라는 사실이다. 한창 2차 성징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13살, 욕조에 물을 받아 목욕을 할 때마다 오빠는 대변이 마렵다는 이유로 문을 열게 했다. 그리고 나가지 않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내 알몸을 쳐다봤다. 한번은 그게 너무 싫어서 문을 열지 않겠다고 소리를 질렀는데 엄마의 폭언이 날라왔다. 미친년아 문 당장 열어, 지금 너 오빠가 용변이 급하다잖아. 나는 문을 열었다. 오빠가 집에서 내 엉덩이에 자기 성기를 가져다 대고 비비며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발뺌하던 날, 집에 돌아온 엄마에게 이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며 엉엉 울었다. 엄마는 나를 안아주지도 달래주지도 않았다. 대신 나란히 오빠와 무릎 꿇고 앉아 매를 맞았다. 엄마는 나도 잘못했다고 말했다. 엄마 내가 뭘 잘못했어? 마음의 소리가 웅웅댔다. 집을 나오기 전,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오빠의 가해사실에 대해 이야기한적이 있었다. 엄마는 오빠를 두둔하며 자기는 살인을 저지른 자식을 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다. 그리고 나에게 왜 지나간 일을 가지고 아직도 유난이냐며 윽박질렀다. 이미 오빠가 한번 사과하지 않았냐고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억지로 받은 사과는 나에게 아무 위로도 되지 않는다. 단 한번의 사과로 수십 년의 모든 상처가 없었던 일이 되지 않는다. 엄마는 그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놀랍겠지만 엄마의 만행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자신을 시집살이 시킨 큰 고모를 내가 닮았다는 이유로 명절 때마다 이유 없이 나를 때리고 괴롭혔으며, 고모가 자살한 후에도 그 이야기를 꺼내면서 내가 큰고모를 닮아서 끔찍하다고 했다. 울며 떼를 쓰던 3살무렵의 기억이 있는데, 내 입과 코를 틀어막고 죽으라고 소리쳤다. 나는 숨을 쉬지 못해서 울음을 삼켜냈다. 애정결핍으로 배게를 빠는 버릇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걸 보더니 내가 애착을 가지는 배게에 바퀴벌레 스프레이 한 통을 다 뿌리고 그래도 좋으면 끌어안고 자라고 했다. 좀 더 자라서는 공부를 못하면 죽도록 맞았다. 너는 악마 같은 아이니까, 인성이 더러우니 공부라도 잘 해야 한다며 엄마는 나를 모질게 대했다. 상을 받아도 칭찬을 받아본 기억이 없다. 항상 나보다 더 좋은 점수를 받은 아이와 비교당하며 나를 윽박질렀다. 엄마는 공부를 못해도 괜찮은, 나를 때리고 성추행하는 오빠를 가장 먼저 챙겨줬다. 나는 항상 뒷전이었다. 너무 외로워서 아빠에게라도 사랑 받고 싶었다. 하지만 아빠는 한 달에 한번 집에 와도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빠를 찾자 엄마는 그걸 못 견디고 또다시 나를 고립시켰다. 립스틱 자국이 묻은 아빠의 하얀 와이셔츠와, 알 수 없는 커플링을 건네면서 너희 아빠는 바람을 피우는 나쁜 사람이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엄마는 바람을 피웠다. 남자에게 선물 받은 금 목걸이를 보여주면서 이번 아저씨는 어떤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나를 그 아저씨에게 소개시켜주면서 같이 밥을 먹게 했다. 이 모든 건 오빠에겐 비밀이었다. 엄마는 오롯이 내가 엄마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동일시되기를 바랬다. 나는 그렇게라도 사랑 받을 수 있다면 괜찮다고 생각해서 집에 남아있었다. 엄마의 모든 사랑에는 성적, 집안일, 비밀 유지 등의 조건이 있었다. 그 조건은 내가 아무리 채우고 채워도 부족했다.
생존자 만두 님의 <행복할 권리>는 83호에 이어집니다.
출처: https://ksvrc.tistory.com/832 [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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