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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소식지

나는 '열림터 활동가' 백목련입니다 - 나눔터 83호 <열림터 다이어리>
  • 2019-04-19
  • 563

나는 열림터 활동가백목련입니다.

백목련

 

  누가 자신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하겠느냐만은 여성단체 그중에서도 쉼터 활동가가 되는 것은 전혀 계산에 없던 일이었다. 아직 학생일 때 학교 선배이자 상담소 전 활동가인 토리가 내게 열림터 활동을 제안하면서 앞으로 십대와 만나는 활동에서 열림터 경험이 매우 소중한 자산이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때 아주 몸서리를 치며 거절했다. 열림터 생활인과 개별 성교육을 하고 있긴 했지만 열림터 생활인들에게 혹시나 상처를 줄까봐 무리한 부탁도 잘 거절 못했었고 까칠하고 다른 사람과의 경계가 아주 분명한 나로서는 생활인들을 대하기가 부담스러웠다.

  열림터에서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마음을 고쳐 먹은 건 그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십대 성교육을 한지 5년차쯤 되었을 때, 교육의 대부분이 일회기여서인지 십대들도 나를 대화는 좀 통하지만 스쳐지나가는 그저 그런 사람쯤으로 여긴다고 느껴졌다. 나도 내가 떠난 이후로 이 사람들이 어떤 고민과 변화의 과정을 거치는지 알 길이 없어 교육에 대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나에게 인공호흡을 해준 건 청소년쉼터와 대안학교에서 반 년 정도 십대들과 보낸 성교육 시간이었다. ‘어디 한 번 해봐혹은 나는 별로 관심 없는데라고 나를 기선제압하려는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가 들리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나에게 나름 궁금한 걸 물어보고 내 사생활도 캐고 싶어할 만큼 관계가 개선되었다.

   수업 전후로 담당교사와 사례관리자들과 ‘00이는 이래서 아마 저랬을 거★★이와 ◎◎이 사이를 고려하면 이렇게 하면 어떨지같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수업만으로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나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격무에 시달리는 담당교사와 사례관리자가 부러웠다. 앞으로 계속 이 현장에 있어야 하나 고민을 언뜻 하고 있을 때 열림터 채용공고가 났다. ‘내가 잘 할 수 있을까?’ 지레 겁도 먹었지만 예전에 누가 ‘(오래 보는 관계는) 지지고 볶는 재미가 있답니다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채용도 되기 전에 퇴사를 질렀고(?) 초조한 시간 끝에 나는 열림터 활동가가 되었다.

 

VR 체험 하러가서 생활인보다 더 신난 나.  벼랑에서 케이크 줍기 게임이었는데 생활인이 자꾸 놀래켜서 눈물이 찔끔났다.

  처음에는 엔돌핀이 마구 마구 솟아 올랐다. ‘생활인들은 내 진심을 알아줄거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지’, ‘지금의 내 수고와 노력이 생활인들에게 분명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거야같은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쓰고 보니 내가 그 당시 왜 그렇게 일희일비하고 내가 열림터 활동가로서 적합한 사람인지를 왜 매일 괴로워했는지 알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나의 상상 속의 열림터는 입사 한 달 만에 와장창 깨졌다. 생활인이 안 될 일을 자꾸 벌여서 이래저래 자르고 방향을 틀다보니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했고, 내가 애써 공들여서 뭘 해놓아도 그걸 발로 차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때 처음으로 생활인들이 밉고 야속했다. 사고치고 돌아온 생활인과 면담 전에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냐며 길길이 날뛰기도 했다.

  생활인도 나도 야생동물일 때 나를 붙들어 놓고, 당시 함께 활동했던 미헌쌤이 그건 네 욕심이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건 내가 나중에 후회할 여지를 줄이기 위해서이지 생활인이 그 노력까지 알아주길 바라는 건 결국 내 욕심에 상처받고 화풀이를 생활인에게 하는 것과 똑같다고 말이다. 그렇다, 과잉은 늘 문제다. 내 과도한 기대와 애정은 나와 생활인 모두에게 불행이었다. 이제는 투입이 있을지라도 결과는 미미하거나 아예 더 못해질 수도 있다는 걸 안다. 그리고 그럼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도 말이다. 난 정말 열림터 생활인들 덕분에 많이 큰데다 점점 사람이 되고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생활인들과 티키타카하며 잘 지내도 사람들의 시선이 나를 외롭게 할 때도 있다. 내가 열림터에서 일한다고 하면 너무 힘들겠다며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도 있고 열림터 활동가를 밥 주고 재워주는, 아무나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을 하는 여자들쯤으로 하대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생활인들이 피해 경험을 했다 뿐이지 다른 십대나 또래 성인들과 비슷하게, 좋을 땐 좋고 싫을 땐 싫고 심심할 땐 또 심심하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트라우마를 호소한다면 병원에서 안정하고 있겠지. 아니, 성폭력 피해는 무조건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만 떠올리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생활인들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대부분 사람들의 악의 없는 편견이다. 그리고 돌봄 노동은 왜 이렇게 맨날 무시를 당하는지 모르겠다. 늘 누군가에게 돌봄을 받았던 사람들은 돌봄 이면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노력이 스며있는지 모르는 것 같다. 어느 드라마 주인공이 했던 것처럼 도무지 돌봄 노동자를 존중할 줄 모르니 이 일이 얼마나 수고로운지 알게 컵라면만 주구장창 먹일까보다!

생활인들이 만든 손가락별 ! 3 월에 선유도 소풍가서 쌈박한 인증샷 건진다고 오돌오돌 떨었다 .

  곧 있으면 만 2년차 활동가가 된다. 아직도 종종 생활인들은 왜 그래?’ 같은 하등 쓸모없는 질문을 할 때도 있고 내 의사가 너무 분명한 바람에 생활인들이 눈치를 보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 자리가, 이 공간이 좋다. 너무 피곤한 일들이 많아 골이 울리다가도 생활인들과 수다 떨며 꺄르륵 웃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진다. 굳이 침대 옆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나랑 놀아달라고 약 올리는 것도 재밌다. 아프다고 징징대면 기꺼이 숙직방으로 밀어 넣어준다. 생활인들과 너무 가깝게 지내서 그런지 나도 생활인하고 비슷하게 생각하고 비슷하게 움직이는 것 같다. 앞으로 일희일비하지 않고 담담하게, 그리고 우아한(생활인들이 벌써부터 비웃는 소리가 들린다) 열림터 활동가 백목련이 되고 싶다. 여러분, 제가 오래 열림터 생활인들과 지낼 수 있게 함께 고민하고 함께 후원배가해요! (으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