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지체 장애인 성폭력-왜 자꾸 무죄라고 하나.]
2005년 4월 20일 부산고등법원 제2형사부는 정신지체장애를 지닌 피해자가 항거불능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성폭력범죄를 일삼아온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번 판례는 성폭력범죄가 성립하려면 '반항이 현저히 곤란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이 있어야 하고, 반항이 현저히 곤란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강도높은 저항'이 있어야 한다는 기존 판례의 문제적이고 모순적인 입장을 답습한 것이다.
판례의 이와같은 입장은 어느 정도의 폭력을 사용하여 피해자를 강간하여도 형법상 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며, 반항이 현저히 곤란하지도 않았는데 이를 모면하지 못한 여성은 법적으로 보호할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으로, 다수의 실제 강간들을 화간으로 치부하며 처벌하지 않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본 상담소는 모든 성폭력피해에 있어 이러한 가해자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범죄 구성요건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성폭력범죄 구성요건과 이에 대한 판단은 성폭력피해실태와 특성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체계안에서도 상황판단과 위기대처에 있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여성장애인, 아동, 노인, 이주여성 등의 경우, 그 특성이 인정되고 반영되어 함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현 재판부는 피해자 특성에 따른 취약함을 인정하기는커녕, 아래의 판례들에서 보듯, 취약한 피해자일 경우 더욱 ‘피해자 자격(수동적이고 한없이 약하며 동시에 사력을 다해 반항하되, 그 반항이 결코 가해자의 힘을 능가해서는 안되는)’을 갖기 어렵다고 말하는 어이없는 판결들을 내놓고 있다.
아래에서는 피해자가 1, 2급 정신지체 장애인임에도 취약한 특성을 인정하지 않고,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한 최근 일련의 판결들을 살피고, 이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 2004년 9월 15일. 부산고등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윤재윤 판사)
- [정신지체1급 장애청소녀(17세)를 성폭력한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69세)에 대해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 선고]
: "피해자는 이 사건 당시 저능이기는 하나 7-8세 정도의 지능은 있었고, 평소 마을 어귀에 있는 요트경기장 등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등 자기의 신체를 조절할 능력도 충분히 있으며, (중략) 피고인이 피해자를 데리고 가 옷을 벗으라고 한 후 벗지 않으려는 피해자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때려 겁을 주는 방법으로 피해자의 옷을 벗게 하여 피해자를 1회 간음하였으나 성적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고, 달리 이를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으므로"
* 2004년 4월 23일. 울산지방법원 형사1부(재판장 고규정 부장판사)
- [정신지체2급 장애청소녀(14~18세)를 5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폭력한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51세)에 대해 1심에서 무죄 선고]
: "0양의 경우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글을 읽고 쓸 줄 알며 걸어서 등하교를 하는 등 거동에 불편함이 없고 낙태의 의미도 아는 등 성교육에 대해 이해 능력도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0씨가 0양을 때리거나 협박한 사실이 없는 점으로 미뤄 성폭력 범죄의 처벌 조건인 `자기방어를 할 수 없는 항거불능의 상태'에 이른 것으로 판단되지 않고 이를 인정할 만한 증거도 없다"
* 2005년 4월 20일. 부산고등법원 제2형사부(재판장 지대운 부장판사)
- [위 사건과 같은 사건의 항소심에서 무죄선고]
: "피해자가 항거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여지지 않고, 형법상 강간죄의 처벌대상도 아니다"
: "성폭력특별법으로 처벌하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항거불능상태였다는 것이 입증돼야 하는데, 피해자는 정신지체 장애인이지만 초등학교 3~4학년의 지능이 있고 사회적 성숙도는 다른 학생과 비슷하기 때문에 항거불능 상태에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성폭력특별법 제8조에서는 ‘신체장애 또는 정신상의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있음을 이용하여 여자를 간음하거나 사람에 대하여 추행한’ 경우 형법에서 정한 강간, 강제추행의 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 조항은 94년 제정당시 신체장애인에 대한 ‘준강간’ 이었다가 97년 정신장애인을 포함한 ‘간음등’으로 바뀐 것이다.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성폭력에 대해서는 ‘준강간, 준강제추행(형법 299조)’으로 이미 규정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성폭력특별법이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 조항을 특별히 규정한 것은, 성폭력 범죄에 대해 더욱 취약한 상황에 있는 장애인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장애여성에 대한 성폭력 범죄를 제대로 처벌하기 위한 취지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특별 규정은 형법보다 형량을 가중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 조항이 갖는 핵심적인 의미는, 장애인에 대한 성폭력의 경우 형법상 준강간 요건에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지니는 취약한 특수성 고려하여 관련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판례들에서는 이 조항의 ‘항거불능’이라는 부분을 장애에 대한 이해없이 적용함으로써 현재로서는 오히려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위의 판례들은, ‘장애로 항거불능인 상태’에 대한 해석에 있어, 장애자체를 피해자가 지닌 취약한 특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와 ‘항거불능’을 별도의 요건으로 보고 이 요소를 모두 충족시킬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한 항거불능의 정도에 대해서도 비장애인의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장애’와 ‘항거불능’을 별개의 구성요건으로 본다면, 기존 형법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한 준강간, 준강제추행죄’와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되는 것으로, 애초 장애인 피해자에 대한 규정을 따로 두었던 것이 무의미해지게 된다.
여성장애인 성폭력피해사건을 주되게 지원하는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 등에서는 이 조항에 대해 ‘재판관에 따라 다른 판결을 내릴 수 있는 빌미를 주는 불합리한 독소조항’으로 보며, ‘장애자체가 항거불능으로 인정되어야 하므로 법조문에서 항거불능이라는 단서를 삭제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 장애를 지닌 성폭력 피해자의 특성이 제대로 고려되고 반영되기 위해서는, 잘못 적용될 우려가 높은 장애인에 대한 특별법 조항이 개정되어야 한다. 또한 미흡한 법조문의 문제뿐 아니라 법을 해석하고 집행하는 권한과 지위를 가지는 사람들의 다수가, 비장애 남성중심의 시각을 갖고 있으며 성폭력피해에 대한 이해가 없다는 점 역시 큰 문제이다. 해당조문의 개정과 함께 수사.공판담당자에 대한 관련 교육 역시 제도화되어야 한다.
* 위 입장글은 본 상담소 소식지에 1차로 부분 게재되었던 것을, 4월 20일 관련 판결내용과 함께 재구성하여 다시 게재하는 것입니다.
* 아래는 위의 판례중 2005년 4월 20일 판결에 대한 한국여성장애인연합과 장애여성공감 성폭력상담소의 성명입니다.*
오늘 4월 20일 장애차별철폐를 위한 가열찬 투쟁의 한복판에서 부산고등법원제2형사부(재판장 지대운 부장판사)는 정신지체2 장애청소녀 이양을 14세때부터 5년동안 지속적으로 성폭력(성폭력범죄 처벌 및 피해자보호에 관한 법률위반)한 혐의로 기소된 가해자 김모씨(51세)에 대해 1심에서와 마찬가지로 무죄를 선고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