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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활동가 인터뷰] 활동가 인생곡선 1: 감이 편
  • 2020-09-01
  • 1228

벌써 세 번째로 찾아온 활동가 인터뷰! 지난 4월에는 환갑을 맞은 활동가 지리산과 사자를, 6월에는 2030 활동가인 주리-유랑-낙타를 인터뷰했습니다. (4월 활동가 인터뷰) (6월 활동가 인터뷰)
이번에는 2000년대 초반, 상담소 자원활동을 시작으로 상근활동가가 된 두 사람을 인터뷰해 보았습니다. 상담소 부소장인 오매와 여성주의상담팀의 감이가 그 주인공인데요, 어떻게 상담소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두 사람이 직접 그린 <인생곡선>과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인터뷰어: 세린(), 승은(), 닻별()

인터뷰이: 오매(), Y.감이()


Intro. 활동명에는 무슨 뜻이 있나요?



: 용감한 페미니스트로 살기 위해서 지은 이름이에요. 용감에서 감만 떼가지고 감이.

: 그래서 항상 앞에 Y 가 붙는군요.

: 풀네임을 쓸 때는 ‘용’의 Y를 써요. Y.감이 이렇게요.

: 저는 오매불망 할 때 오매구요, 잔다 깬다 그런 뜻입니다. 빛과 그림자 두 세계를 다 이름에 넣었습니다.

: 회의할 때도 자다깨다, 운전할 때도 자다깨다. (일동 웃음)

: 생명과 비생명의 경계에서 이렇게...

: 되게 있어보이게 설명하잖아?

: 자연재해를 너무 좋아하는데, 이재민들에게 말하기 그렇지만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 자연재해가 있기 때문에, 태풍 속에서 죽고 싶어요.



1. 용감한 감이의 인생곡선

감이가 그린 인생곡선.


: 간단하게 먼저 얘기를 하면, 어렸을 때는 기억이 잘 안 나요. 기억이 나는 데는 이렇게 굴곡이 심하고, 평탄한 데는 사실 굴곡이 없었다기보다는 기억이 안 나는 거예요.

: 미화된 건가요? (웃음)

: 예, 그렇죠. 어릴 때 기억이 별로 없어서…. 근데 막 고민이 많거나 그런 아이는 아니었어요.

: 텐션이 기본.

: 네. 긍정적인 아이였어요. 그래서 예전에는 평탄하게 살았던 거 같고, 2001년에 대학교에 입학했어요. 그 앞에 있는 표시는 고등학교 때 풍물패를 해서 좀 더 재밌게 살았다는 표시구요.

: 노란 엑스가요?




당시 풍물패는 온갖 집회 및 행사의 클라이막스를 담당했다. 사진은 여성폭력추방공동행동 당시. (2006)

: 네. 그러다가 대학교에 갔는데, 풍물패 같이 하던 언니를 만나서 그 언니가 있는 동아리에 들어갔어요. 그 언니가 동아리 사회과학부장을 하다가 학생회로, 그 다음에는 총여학생회로 옮겨 가서 저도 2002년인가 2003년부터 그 언니를 따라 총여학생회 활동을 시작했죠.

: 굴곡이 심해지는데요?

: 재미있었던 거 같긴 한데 남아있는 이미지가 그렇게 좋지는 않아요. 총여 활동하면서 싸우기도 하고, 고생도 많이 하고, 저한테 많이 실망하는 기간이었어요. 그래서 굴곡이 좀 있구요. 또, 저희 엄마가 신장 이식 수술을 받으셨거든요. 제가 학교 졸업하고 대학원 진학하기 전이라 엄마랑 있는 시간이 많았어요. 그래서 이 때가 좀 기억이 나고.

2008년에는 대학원에 입학하고 7월에 결혼을 했죠. 돌아보니 이 때가 되게 좋았던 거 같아요. 당시엔 힘들었던 거 같긴 한데. 집에 있을 때 통제받으면서 살진 않았지만 막 자유롭게 살지도 않았던 거 같아요.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독립을 하면서 자유로워지는 시기였고, 파트너랑 싸우기도 했지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많이 하는 시기였어요. 

2008년에서 2010년 사이도 굴곡이 있었는데, 지금은 정말 잘 기억이 안 나요. 대학원생이어서 풀 타임으로 공부만 하니까 힘들 건 별로 없었던 거 같아요. 관계 측면에서 좀 힘들었던 거 말고는 전반적으로 괜찮았던 거 같고. 원래는 다들 논문 쓸 때 바닥을 치거든요? 근데 저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제 논문 주제가 대안 여행, 공정 여행이라 여행을 되게 많이 다녔어요.

: 논문 쓰는 과정에서요?

: 네. 논문 쓰기 전에 현장 연구를 한다고 태국이랑 네팔 이런 데 가서 혼자 여행하는 여성들의 경험을 들어야겠다고, 저 혼자 알리바이를 만들어서 한 70일 정도 여행을 갔었거든요. 그 때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립기도 하고, 자유롭게 살았던 거 같아요. 그렇게 논문을 쓰고 2011년에 졸업하고 2012년에 출산을 했죠. 그 이후에 수많은 균열 산산조각이 나서 (인생곡선이) 이어지지 않아요. 육아 때문에 힘들었던 시기인데, 최근에 읽은 글로 대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행복하지만 불행한 것 같은 시간이고, 온전한 거 같으면서도 불안한 시간이고, 우울하다가도 힘나는 시간이고, 몸은 번잡한데 외로운 시간이고.”

 

정말 이 말이 맞더라고요. 극단적이지만, 우울감과 행복감이 늘 공존하는 시기여서 표현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9개월 정도는 제가 완전히 아이를 혼자 봤고, 그 후에는 파트타임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어요.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 주시고. 2012년에서 2015년 사이에는 둘째를 낳기도 했는데 이대 아시아여성센터에서 일하는 등 파트타임으로라도 일을 계속 하려고 했죠. 2015년에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입사하고 나서는 자존감도 높아지고 되게 좋았어요.

: 입사하게 된 계기는요?

: 2003년 즈음에 상담소에서 제1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 기획단을 한 것을 시작으로 계속 자원활동을 했어요. 2006년에는 상담원 교육(* 성폭력상담원기본교육. 교육을 이수하면 성폭력상담소에서 상담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생긴다.)을 받고 나서 전화상담을 했는데 전화 받는 게 무섭고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활동을 잠시 쉬다가 우연히 자리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지원하게 됐어요. 둘째가 세 살이 될 때까지는 제가 키우려고 일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자리가 났다는 얘기를 듣고 그냥 왔죠.


제3회 말하기대회 안내데스크에서 '치유를 위한 다이어리'를 판매하고 있는 감이. (2005, 제일 왼쪽.)

아이를 키우면서 활동을 하는게 생각만큼 그렇게 쉽지는 않아서 부침이 많이 있었는데, 2016년 강남역 여성살해사건 있었을 때 가장 바닥을 쳤어요. 그 때는 성문화운동팀에 저랑 앎 둘밖에 없어서 일이 진짜 많았거든요. 평소에는 아이들이 어린이집 가기 전에 시부모님이 집으로 오시면 저는 먼저 출근하고, 부모님이 아이들을 챙겨서 등원을 시켜주신 다음에 하원도 해 주시고, 저는 야근하고 들어가고. 그렇게 계속 살다가 어머님이 갑자기 어깨 수술을 하시면서 아무도 아이들을 봐줄 수가 없게 됐거든요. 그것만으로도 힘들었는데 강남역 사건으로 해야 할 일도 되게 많고, 다른 활동가들은 우리가 적극적으로 새로운 판을 짤 수 있겠다는 말을 하는데 나는 그럴 여력이 없는 거예요. 정말 아등바등 겨우겨우 버텼던 시기였어요.


누구보다 치열했던 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집회 현장. (2016)

 

그러다가 2018년에 미투시민행동(* 미투 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상황실 구성을 위해 각 단체에서 활동가가 한 명씩 차출되었는데, 제가 상담소 대표로 자원해서 가게 됐어요. 재미도 있었고 활동가로서 내가 어떤 역할을 하면 되는지, 상담소 바깥의 다른 활동가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좀 보게 되고. 자존감도 높아지고 활동에 동기부여도 되는 경험이었어요. 상담소에 돌아온 뒤, 성문화운동팀에 신아가 합류해서 좋은 팀워크로 1년 바짝 재밌게 활동했죠. 


미투시민행동이 주최한 <미투, 세상을 부수는 말들> 퍼포먼스를 리드하는 감이. (2018, 왼) / 감이의 리드로 완성된 퍼포먼스. (2018)

2019년에는 첫째가 학교를 갈 때가 돼서 육아휴직을 했어요. 6개월 간의 육아휴직 기간도 되게 좋았는데, 돌아오고 나서가 되게 힘들었어요. 휴직 기간 동안 잘 쉬고 와서 다시 일하면 되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오니까 제가 겉도는 느낌이었어요. 육아휴직 이후에는 제가 거의 전담으로 아이들을 보고 정말 필요할 때만 시부모님한테 도움을 요청하는 식으로 육아 방식이 달라져서, 제가 6시 땡 하면 퇴근해서 애들을 데리러 가야 하는 상황이 된 거예요. 

거기다 5년 동안 몸담고 있던 성문화운동팀에서 여성주의상담팀으로 팀 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활동가들 간에 갈등도 있었고 해서 2020년 4월 정도까지는 상태가 정말 안 좋았어요. 코로나도 그렇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친 기분이었는데 요즘은 그나마 상승세를 타고 있습니다.

일동: 와아∼ (박수)

: 되게 우울하네요. (웃음)


2. 인터뷰이 질문 타임!



Q. 감이가 2002-2003년 즈음에 총여학생회 활동을 시작했다고 했잖아요. 이 때가 대학가에서 총여가 운신할 수 있는 범위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던 시기였는데, 총여 활동할 때는 어땠나요?

: 맞아요. 90년대 말이 제일 활발해서 각 캠퍼스에 총여가 있었고 여러 소모임도 있었죠.

: 학회나 교지 모임 같은?

: 네. 교지 편집 이런 것도 되게 많았고. 학교 간 연대 활동이나 학내 동아리 모임도 활발했고. 저희는 그 때 학교 안에서 페미니즘 페스티벌도 하고 페미니즘 캠프도 했어요. ‘여성연대 한판’이라고 2000년대 초반에 전국 대학 내 여성주의자들이 다 모여서 1박 2일, 2박 3일 정도 함께하는 장이 마련됐어요. 여학생 휴게실에서 담배도 피고 잠도 자고 술도 먹고… 다같이 세미나 하고 친해지는 시간도 갖고 그랬었어요. 엊그제 상담팀에 법률상담 해주시는 변호사님 한 분이랑 식사 자리가 있었는데, 그 변호사님도 그 때 당시에 학교 안에서 여성운동을 했던 분인 거예요. 그 전에는 전화로만 소통하다가 거의 처음으로 같이 식사하는 자리였는데, "얼굴이 낯이 익은데 혹시…" 이러면서 서로를 알아본 일이 있었어요.

: 17년 전 일인데 어떻게 알아봤나요?

: 그때는 학교 간 교류가 많아서 서로 잘 알 수 있었고, 또 구심점이 되는 친구들을 통해 연결되어 있었던 거 같아요.

: 연대 한마당 이런게 되게 많았어요. 교지 연합회 한마당, 학내 신문기자 한마당, 학교 내 생협 운동하는 사람들 한마당, 대안교육운동 하는 사범대생 한마당.

: 그리고 메이데이 있잖아요. 노동절. 각 학교의 운동권들 다 총집합하는 날이잖아요. 그럴 때 메이데이 행동 같은 것도 페미니스트끼리 따로 하고. 

: 전날. 밤새.

: 너무 재밌었겠다.

: 그런 판을 아예 따로 만들고 그래서 되게 재밌었던 기억이에요. 다채로운 사람들이 모이기도 했고.



'2003 여성연대한판' 행사를 홍보하는 여성주의저널 일다의 기사 캡쳐. 원문은 >> http://ildaro.com/470

: 근데 왜 인생곡선이 내려갔나요?

: 너무 힘들어가지고.(웃음) 그 전에 되게 해맑게 살다가.

: 인생 첫 힘듦인가.

: 여성주의를 알게 되면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잖아요. 싸워야 할 것들이 너무 많고 그러려면 공부도 많이 해야 되고. 내가 아는 거 쟤는 왜 몰라 하면서 설명해주는데 못 알아들으면 싸우고, 나는 왜 쟤를 설득하지 못할까 술먹고 막…(웃음) 그런 날들의 연속. 일주일에 6일 술 먹고 그랬어요.

: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일동 웃음)

: 맞아맞아.

: 인생곡선의 하락세와 상승세에서 공통되게 활동가로서의 정체성이 나타나요. 어떨 때는 잘 해보고 싶은 마음들이 좌절돼서 힘들었고, 또 어떨 때는 나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하신 것이 와닿았어요.

 

Q. 다른 활동가들 중에서도 임신, 출산, 육아를 경험하신 분들이 있을 텐데, 그분들은 다들 어떻게 꾸려나가고 계신가요?

: 현재 상담소 상근 활동가 중에는 저희 아이들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분은 없어요. 지금 육아휴직을 하고 있는 활동가가 곧 복귀를 앞두고 있는데, 그 분은 아이들이 저희 아이들보다 더 어려요. 그래서 저는 복귀하면 정말 죽을만큼 힘들 거라고 하죠. 너무 큰 기대 하지 말라고.

책에서 봤는데, 육아를 하면 온전히 1인분의 일을 할 수 없는 상태래요. 그런데 이 사람이 실제로 일과 삶에서 요구받는 역할은 2-3인분이니까 늘 과부하되어 있는 상태? 특히 활동가라는 직업은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하고 여러 뉴스들이 업데이트 돼야 하는데 처음엔 그게 너무 힘들었어요. 집에 들어가면 핸드폰을 보거나 전화를 받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다음날 기자들이 전화해서 "어제 그 사건" 얘기하면 막 못 알아듣기도 하고.

: '사건'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일동 웃음)

: 그리고 활동가들은 밤새 있었던 사건 이야기를 하는데, 못 따라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새벽 두세 시에 깨서 신문기사를 엄청 읽었어요. 지금 상황이 어떤지 보려고 애를 썼죠.

: 활동가라는 직업 특성상 힘든 부분이 있었네요.



두 사람의 파란만장 페미니스트 라이프와 상담소와의 접점이 궁금하신 분들은 오늘부터 연재될 8월 활동가 인터뷰를 기다려 주세요. 내일은 오매의 인생곡선과 질문타임으로 돌아옵니다.

화요일 오후 6시에 또 만나요!

 

기획/편집 : 세린, 승은, 닻별

녹취록 작성 : 세린, 승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