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세 번째로 찾아온 활동가 인터뷰! 지난 4월에는 환갑을 맞은 활동가 지리산과 사자를, 6월에는 2030 활동가인 주리-유랑-낙타를 인터뷰했습니다. (4월 활동가 인터뷰) (6월 활동가 인터뷰)
이번에는 2000년대 초반, 상담소 자원활동을 시작으로 상근활동가가 된 두 사람을 인터뷰해 보았습니다. 상담소 부소장인 오매와 여성주의상담팀의 감이가 그 주인공인데요, 어떻게 상담소까지 오게 되었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두 사람이 직접 그린 <인생곡선>과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알아보았습니다. 함께 보시죠!
인터뷰어: 세린(셀), 승은(승), 닻별(닻)
인터뷰이: 오매(옴), Y.감이(감)
3. 활동가로서의 감이와 오매, 그리고 상담소
셀: 사람들이 활동가하면 멋있는 일, 대단한 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있잖아요. 두 분은 목표 지향적으로, 해야할 일이나 성취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면서 이 곳에 온 건지 궁금합니다.
감: 제가 상담소에서 자원활동을 하던 시절에는 대학에서 활동하는 페미니스트라면 누구나 상담소에 와서 자원활동을 했어요. 개인으로 온 게 아니라 총여학생회 같은 곳에서 연대사업처럼 오는 거였죠. 다른 여성단체에서 활동하거나 관련된 일을 하는 분들 중에는 그 시절에 상담소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이 되게 많이 퍼져 있어요.
그 때 자원활동가 입장에서 봤던 상근활동가들은 진짜 멋있었던 것 같아요. “활동가가 되어야지!”라는 생각보다는, “나중에 상담소에서 활동하면 진짜 좋겠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한국성폭력상담소라는 공간에 멤버쉽이 있었죠.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면서 내 경험치도 쌓고, 페미니스트 친구들도 만나고. 그런 게 좋았어요.
대학원에 간 것도 총여학생회를 하면서 힘들었던 게 컸어요. 제가 다니던 학교에는 여성학 관련 커리큘럼이 없기도 했고, 도와주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같이 총여학생회 하는 사람들끼리 세미나를 했었는데, 그걸로는 채워지지 않아서 대학원에 갔어요. 대학원 졸업 이후의 계획은 딱히 없었어요. 여성학을 공부한다는 게 좋았고. 그런데 상담소 활동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계속 했던 것 같아요. 마침 자리가 있다고 해서 왔죠. 저는 특별히 하고 싶은 게 있거나 반드시 성취하고 싶은 걸 가지고 사는 사람은 아니에요.
옴: 저는 시민단체나 NGO에서 활동하고 싶어서 인권운동사랑방이랑 한국성폭력상담소 두 군데에 자원활동을 하고 싶다고 연락했는데, 상담소에서 연락이 더 먼저 왔어요. 1-2년 동안은 상담소 활동을 눈팅하면서 보냈어요.
그 당시 활동가들은 각자 맡고 있는 분야가 있고, 담당 분야에 대한 고민을 하는 거점 역할을 했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떤 활동가가 (대)학내지원팀을 맡았다면,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과 상담소가 협력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거예요. 학내 페미니스트 운동, 학내 성폭력 사건을 지원하기도 하고, 대학 내 성폭력상담소 정책에도 개입하고. 그걸 지원하기 위해 활동가 한 사람을 투입하면 그 사람이 대학 내 페미니즘, 반성폭력이라는 주제를 놓고 고민하는 영역이 되게 종합적이라고 해야 하나. 모 활동가의 경우에는 특정 법안에 대한 의견서를 쓸 때 해당 이슈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 넣을 만큼 방대한 정보를 갖고 있기도 했어요. 해당 법안과 관련해서 개념은 이렇고, 관련 연구는 이런 게 있고, 지금까지 제안된 지점, 최근의 중요 판례와 비교해서 외국의 사례는 무엇이 있는지. 거의 8~10장을 쭉 써내는 거죠.
감: 정성이 대단하네요.
닻: 어우, 저라면 못할 것 같아요.
옴: (웃음) 당연히 모든 활동가들이 그렇게 할 수 없고, 저도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근데 그 선배님은 논의를 하려면 ‘이 정도’ 사회적 논의는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거거든요. 활동가와 상담소가 담론과 지형, 운동을 만들어가는 거점-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가 마지막 보루가 되는 때가 있잖아요. “우리가 이 정도만 하면 누군가 하겠지”가 아니라, “이걸 누가 하겠어.” 하는 생각이 들 때. 그걸 보면서 우리가 책임지는 일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상담소에서 회의를 하면, 한 가지를 두고도 “이게 여성주의적으로 어떤 의미냐?”로 많은 논의를 했어요. 회의 하나 하나가 무게감 있는 논의까지 가는 거죠.
감: 오매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상담소 활동가들이 멋있었을까 생각해 봤는데, 자칫 사소해보일 수 있는 것도 진지하게 들어주고, 함께 토론했던 게 기억나요.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이하 말하기대회) 자체도 사회에 던지는 메세지가 컸거든요.
옴: 그때는 기획단 체제로 운영하기도 했고, ‘당대의 페미니스트들이 함께 일한다!’는 느낌이 있었잖아요.
감: 그렇죠. 말하기대회 기획단이 열 명 정도였어요. 각자 학교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왔는데, 자기 학교에서 축제 만들고 집회 기획하던 사람들이 상담소에 모인 거죠. 그런 중요한 일을 자원활동가에게 맡기면서 “충분히 이만큼 할 수 있다”고 믿어주고, 방향성도 잘 잡았어요. 상근활동가들이 보여주는 신뢰가 자원활동가인 제게는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어요.
제가 배웠던 걸 다른 자원활동가들한테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상담소에 들어와서 자원활동가 모임을 제일 처음으로 만들었어요. 상담소 활동이 자원활동가 개인에게는 큰 자산이 된다는 걸 저 역시 경험했기 때문에, 말하기대회처럼 큰 일을 턱 맡기지는 못하더라도 얘기를 듣고 경험을 나누고 싶었어요. 모임이 그렇게 잘 되진 않았지만 격월에 한 번씩은 모여서 상담소 소식을 듣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왜 상담소에 왔는지를 서로 나누는 자리를 만들었죠.
돌이켜보면 제가 대학 때 활동했던 상담소랑 상근활동가가 되면서 만난 상담소가 많이 달라져서, 그 간극에 적응이 잘 안됐던 것 같기도 해요. 사회적인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고, 수업에도 잘 안 들어가고 활동만 하던 사람들이랑 온갖 스펙을 다 쌓아둬야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들이 투여할 수 있는 무게감에도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하기대회를 준비할 때 기획단을 모으려고 시도해 봤는데, 신청해주신 분이 2-3명밖에 안 되니까 힘이 빠지기도 하고 예전처럼 큰 규모의 기획을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되기도 하더라고요.
옴: 지금은 페미니즘 스터디나 강의를 이미 많은 곳에서 하고 있고, 다양한 액션이 여러 주체들에 의해 기획되는 시대라서, 상담소에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이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타이밍이 왔다고 생각해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에 다수의 성폭력 사건이 공론화되고 피해자를 조력하는 사건 지원자들도 점점 늘어나는데, 그분들이 어떤 체계가 갖춰져 있는 상황에서 지원하는 게 아니다보니까 개별 지원자가 감당 가능한 역량 이상의 활동력을 쏟아야 하고, 사건에 대한 평가를 하기도 어렵고, 무력감이나 백래쉬 때문에 빠르게 소진되고. 그런 소진된 감각을 안고, 상담소처럼 사건 지원을 오래 한 곳은 어떤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하는지 알고 싶어서 오시는 분들도 많아진 것 같아요.
승: 맞아요. 여성운동 전반보다는 성폭력 사건을, 주변인이든 당사자든 궁금해서 오는 마음이 있는 것 같아요.
닻: 저도 그런 케이스죠. 학내에서 반성폭력 운동을 했고, 피해자를 지원하다 소진된 경험도 있고. 그 때 자문을 받으면서 상담소를 처음 만났구요.
셀: 소진되지 않는 게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각자의 노하우가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감: 그런 노하우가 있었다면 이 상태가 아닐텐데. (웃음) 소진되지 않기 위해서는 서로 얘기를 많이 해야하는 거 같아요. 아까 4월까지 힘들었다고 했잖아요.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었던 건 활동가들한테 제 상태를 얘기하면서부터였어요. 그 전에는 말할 여유가 없었는데 내가 느끼는 어려움, 힘든 부분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니까 좀 나아졌어요.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고 나 혼자 묻어두는 것보다는 훨씬 낫고 회복되는 것도 더 빠른 거 같아요.
셀: 60대 활동가 인터뷰를 했잖아요.(* 4월 활동가 인터뷰 Q.10 참고) 그 중 “파트너의 경제활동이 생활비가 해결될 만큼 충분했기 때문에 직업적 관점보다는 사명이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데, 오매랑 감이는 두 분(지리산과 사자)보다는 직업으로서 '활동가'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아요. 지속가능한 활동을 하려면 어떤 부분이 가장 중요할까요?
감: 저는 결혼을 한 사람이기도 해서 60대의 경험과 연결되는 지점도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제 급여로 생활하지만, 가정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요. 언제든 일을 그만두고 아이를 볼 수 있는 사람?
“애 엄만데 왜 야근을 시키고 숙직을 시키냐, 네가 업무를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배려하지 않는 그 직장 좀 이상하다.”
정확하게 이런 워딩은 아니었지만, 저에게는 이렇게 느껴졌어요. 저를 직업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처럼요. 제 파트너는 직업 특성상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은데, 파트너가 일 때문에 돌봄노동이 어려운 것은 누구도 뭐라하지 않고 파트너 스스로도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늘 미안함을 느껴야 하는 위치인 것 같아요. 책임감도 크고요. 제 일을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주변인을 보는 것도 어렵긴 하죠. 돈을 많이 받으면 좀 달라지려나.
닻: 그러려면 상담소 후원 회원이 만 명이 넘어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옴: 제가 2010년에 상담소를 그만 뒀을 때, 상태가 안 좋은 거 같아서 점을 보러 갔더니 소진 비슷한 단어를 쓰시더라구요. 더 이상 배우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상태라고 하면서요. 배우지 못하면 자기가 가진 기본 능력치를 긁어서 쓰게 되고, 그게 언젠가는 동이 나는 거잖아요. 그런 상태라고 말하더라구요. 어쨌든 소진이 그런 상태라면, 배운다는 느낌이 선순환될 수 있는 조직이 되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여러 가지가 배움일 수 있는데, 이제는 내가 어디서 뭘 배우느냐를 넘어 우리 상담소에서 어떻게 배움을 경험할 수 있을지를 같이 만드는 게 필요하잖아요. 여성단체 하나가 운영될 때, 이 곳에서 되게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실제 배움을 바탕으로 세상을 움직이기도 하는 중요한 기능-역할을 하죠. 아마추어리즘과 프로페셔널리즘 모두 중요하고, 우리에게도 두 가지가 다 있을 텐데 그걸 상담소가 어떻게 꾸려왔고 또 앞으로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가끔은 “내가 나이주의자인가?”를 반문하는데, 저는 생애주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20대나 30대 초반에 상담소에서 일을 시작하면 3년 안에는 주거 문제에 길이 보였으면 좋겠고, 30대 중반을 넘어서서는 '지X'의 시기, 자기 성격의 바닥까지 보는 그런 시기를 겪었으면 좋겠고, 어떤 파트너쉽을 맺을 것인지에 대해 자기 스타일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내가 이 일을 장기 커리어로 할 수 있을까를 돌아보는 시간이 30대 중반에서 40대쯤 있잖아요. 또 그때부터는 양육을 하는 활동가와 하지 않는 활동가가 나뉠 거고. 상담소에서 4, 5, 60대를 보낼 건지, 아니라면 학위 과정으로 갈 건지, 아니면 활동가로 살아왔던 근성으로 장사를 할 건지. 선택지가 다양하게 느껴지지 않는 면이 있어서, 그런 부분까지 선순환되게 만드는 장기 프로젝트라고 생각해요. 저 자신도 그 대상자라고 생각하고.
상담소에 일정 기간을 근무하면 안식년을 쓸 수 있는 제도가 올 초에 생겼어요. 근데 안식년 제도를 운영하려면 또 다른 조율이 필요해요. 매년 안식년이 돌아가야 되거든요. 한 사람이 썼는데 다음 해에 쓰는 사람이 없고, 텀이 생겼다가 누군가 동시에 쓰게 되면 업무 공백이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어요. 톱니바퀴처럼 안식년이 잘 맞물려야 하는데, 그럼 또 연차를 신경써야 하죠. 이 사이클이 잘 돌아가려면 다양한 고려가 필요해요.
60대 활동가들이 퇴임하시면 '영페미' 세대가 조직 운영을 하게 되니까,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만드는 것도 큰 숙제입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소진감이 느껴져요. 생각하면 바로 소진돼. (일동 웃음) 가까운 꿈이 있다면 우리가 주 4일 일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네요.
감: 조만간 실현되나요? 주 4일 업무!
옴: 그러려면 정부랑 싸워야죠. 정부 보조를 받고 있기 때문에 투쟁이 필요해요.
승: 투쟁의 역사네요.
닻: 제가 투쟁이라는 단어를 참 사랑하는데요. (웃음) 어쨌든 상담소가 내 인생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잖아요. 두 사람의 인생에서 상담소가 어떻게 존재했는가를 듣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셀: 5자 토크, 내게 상담소란?
옴: 이제 토크 마무리인가요? 마무리하기엔 아직 토크가 모자란데. (웃음) 어제도 출근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 인생에 상담소는 어떤 의미일까. 제가 일-생활 균형을 잘 못 맞추는 편이에요. 놀면 완전 놀아야 해서 휴직이 아니라 아무 자리도 직함도 없어야 해요. 근데 일을 하면 또 일에 몰빵하게 되거든요. 예전에는 사무실에서 피켓 깔고 자면서 바닥의 먼지들이랑 맨날 눈높이를 같이 하곤 했었어요. 돌봐야 할 자식이 있는 활동가한테 “자식이 상담소보다 좋아?”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기도 하고요. (일동 웃음) 지금도 균형이 안 맞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나에게 상담소란, 다섯 자로….
닻: 제가 하고 싶어요. ‘워라밸시급’.
옴: 인생곡선 중 빗금친 시기, 엄청 즐겁고 흥분되고 행복하지는 않지만 차분하게 ‘나는 누굴까’를 생각하던 때에 경매 같은 행사를 갔었어요. 한 분이 내놓은 족자에 쓰인 한자의 뜻이 “언젠가 할 거면 지금부터”. 이런 말이더라구요. 언젠가 채식을 할거면 그냥 오늘부터 하지, 뭐 이런 식의. (* 실제로 오매는 비건입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상적이라 생각하는 것, 언젠가 되겠지란 희망을 주는 말이 떠오르면 지금부터 하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거든요. 상담소가 그런 희망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터전, 플랫폼, 거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감이도 다섯 글자 빨리 얘기해.
감: 다섯 글자는 너무 어려운 거 같아.
옴: 저는 상담소는 ‘베이스캠프’라고 하겠습니다.
닻: 그새 또 생각해냈어.
감: 그러네, 배신자다 배신자. 음. 제가 살면서 욕심을 갖거나 승부욕을 불태운 적이 별로 없거든요. 먹고 싶은 것도 그리 없어요. 그런 스타일인데 상담소에서는 열심히 일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있지만, 그것보다는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이 크게 들어요.
상담소 활동가들은 저한테 되게 큰 사람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상담소에 있으면 훨씬 더 잘할텐데,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해서 상담소가 할 수 있는 걸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거든요. 특히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을 때는요.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자꾸만 욕심이 나서인 것 같아요. 잘하고싶어서. 다른 데서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별로 없어요. 상담소에서 우리가 해야할 말을 하고 해야할 활동을 잘, 성실히 하고 싶습니다. 다섯 자로는 못 말하겠네요. (웃음)
마음 맞는 동료들을 만나 교류-연대하는 장을 열어준 '가능성'의 공간으로서 상담소를 만난 두 사람의 인터뷰, 즐겁게 보셨나요? <8월 활동가 인터뷰: 활동가 인생곡선> 편은 오늘로 마무리됩니다. 아래에는 기획과 편집을 함께 한 자원활동가 세린/승은님의 후기가 이어지니, 후기도 놓치지 마세요!
기획/편집 : 세린, 승은, 닻별
녹취록 작성 : 세린, 승은
승은
두 분이 직접 들려주시는 삶의 궤적과 디테일들을 알 수 있어서 무척 즐거웠습니다. 활동가로서 갖고 계시는 열정과 욕망, 여러 결의 고민을 보면서 가깝고 먼 미래에 일이라는 것이 내게는 어떤 의미일까를 많이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세린
활동가 개인의 삶을 넘어서 상담소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인터뷰였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느낀 점은, 어차피 고민은 평생 하는 거니까 미리 너무 많이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