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일하고 쉬며 보낸 일주일, 지리산 워크스테이 (상편)
대통령 선거가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평소처럼 이메일을 확인하다 몹시 흥미로운 지원사업을 발견했습니다. 지리산에서 일을 할 수 있다고? 지원금도 주고 숙소도 연결해준다고?? 여성가족부 폐지 같은 얼토당토 않은 증오선동이 판을 치던 시기에 머리 아프고 복잡한 일들은 뒤로 한 채 떠나고 싶은 제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소식이었어요. 한 팀당 최대 2명이 신청할 수 있다길래 냉큼 산을 꼬셨습니다. 푸릇푸릇한 자연을 보는 걸 좋아하는 산과 금세 의기투합해 지원서를 써보기로 했어요.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에서 올린 2022 지리산 워크스테이(봄) 홍보포스터
사실 일주일이나 사무실을 비워야 한다는 점이 계속 마음에 걸렸는데요, 잘 놀고 잘 쉬다 오라는 동료들의 격려에 힘입어 과감하게 지리산행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지원서 마감을 앞두고 실시간 수정을 거듭해 제출한 지원서에 합격 메일이 날아왔을 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어요. 이왕 간 김에 일도 잘 하고 쉼도 잘 하자! 는 패기로운 목표도 자체적으로 세워서 종일 회의라는 말도 안 되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워크스테이를 하러 산내에 내려갈 때에만 해도 “계획한 일을 다 끝내고 오겠어!” 라는 원대한 야망이 있었습니다. 스마트워크 시스템도 갖춰 두었으니, 익숙한 사무실을 떠나 새로운 공간에서 일을 한다면 지친 마음도 가다듬을 수 있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이 늘 그렇듯 계획대로 되지만은 않았습니다. 신청서를 쓸 때에는 일에 초점을 잡고 계획을 세웠는데 후기를 쓰며 돌아보니 일과 쉼을 반반 정도로 했던 것 같아요. 6월 13일부터 17일까지, 회원홍보팀이 만난 초여름의 지리산을 여러분께도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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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출발하던 6월 13일에는 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기가 무섭게 비가 내렸습니다. 빗소리를 자장가삼아 자다깨다를 반복해가며 도착한 지리산 산내면은 구름으로 가득했습니다. 높이 솟은 천왕봉 위로 잔뜩 드리운 비구름이 산내의 첫 인상이었어요. 낯설고도 익숙한 풀 냄새, 비 냄새를 헤치고 일주일간 일할 공간, 지리산 작은변화지원센터 들썩의 공유오피스에 도착했습니다.
점심 즈음에 사무실에 도착했는데, 저희보다 훨씬 먼저 도착한 분들이 계셨어요. 첫 차를 타고 내려온 사람, 아예 이틀 먼저 내려온 사람… 나름대로 부지런을 떨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찍 도착해 일에 집중한 사람들을 보니 저도 절로 집중하게 되었어요. 간단히 점심을 먹자마자 일하다 오후 4시쯤 OT에 참석했습니다.
(왼) 5일간 일의 베이스캠프가 되어줄 작은변화베이스캠프 들썩 / (오) 공유오피스의 업무환경.
OT에서는 함께 일주일을 보내게 될 활동가들의 자기소개와, 들썩과 산내면 귀농-귀촌마을을 소개를 들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리 자는 바람에 몰랐는데, 산내가 생각보다 해발고도가 높더라고요. 산이 품은 마을, 산내면은 무려 해발고도 300m가 넘는 고원지형이라고 합니다. 첫번째 선종 사찰 실상사와 귀농/귀촌자들이 마을공동체를 이룬 곳이 산내였어요. 실상사 귀농학교로부터 시작된 지리산 산내 마을공동체에는 저마다의 관심사와 취미에 입각한 다양한 모임과 공간이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마을을 소개해주신 대로, 마을 주민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유대감과 친밀함, 낯선 이에게도 선뜻 다가서는 이 동네가 첫눈에 마음에 들었어요. (산내면의 분위기가 궁금하시다면 이 후기 참조!)
(왼) 숙소에서 밥 주는 치즈고양이 / (중) 숙소 여여재 평상에 누워 올려다본 하늘 / (오) 이웃집에 놀러온 강아지
산내마을공동체의 탄생과 산내의 다양한 모임과 공간 소개를 듣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동물친구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숙소에는 매일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고양이들이 있었고, 숙소가 있는 마을을 걷다 보니 강아지들도 만났어요. 저와 산과 함께 숙소를 쓰는 충북지역 활동가 울림은 고양이를 엄청 좋아해서, 울림이 미리 챙겨온 고양이 밥 덕분에 동네 고양이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습니다.
산마을의 밤은 도시보다 훨씬 빨리 찾아오더라고요. 산과 피톤치드 냄새를 온몸으로 맞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습니다. 밤새 비가 왔는데요, 빗소리를 배경음 삼아 푹 잘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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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스테이에 신청할 때 하기로 계획한 일이 여러가지 있었는데요, 그 중 우선순위가 가장 높은 일은 상담소 모금/홍보 전략 설정이었어요. 회원분들과 만나고 상담소의 소식들을 알리며 함께 호흡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담소 내부의 판단이 있었어요. 더 잘 만나고 연결되려면 명확한 청사진을 가지고 움직여야 겠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회원홍보팀이 ‘팀’으로 일하기 이전, 활동가들과 나누고 정했던 논의의 연장선에서 수월하게 논의를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점심으로는 두루치기를 먹고 마저 회의를 진행했는데요, 오후에는 자원활동가분들과 어떻게 하면 접점을 넓힐 수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이 날 고민의 결과로 콘텐츠 기자단 ‘틈’이 7월달부터 활동을 시작했으니, 틈에서 발행하는 소식에도 많은 관심 가져주세요!
(왼) 점심: 두루치기 / (중) 장보러 가다 만난 닭 / (오) 저녁: 버섯과 파를 듬뿍 넣은 우동
치열한 회의를 마치고, 생각보다 밥값이 만만치 않아 숙소에서 밥을 해먹으려고 장을 보러 갔어요. 동네 하나로마트에서 장을 봤는데요, 영업마감이 6시인줄 모르고 6시에 도착했다가 후다닥 장을 봤답니다. 직원 분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희를 받아주셔서 다행이었어요.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 드립니다!) 밀키트 반, 재료 반으로 장을 봐와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치킨모임을 제안받았어요. 8시에 시작한다길래 잽싸게 야채우동을 끓여먹었답니다.
같은 숙소에 묵은 차있는 멋진 활동가 울림의 차를 얻어타고, 8시부터 치킨과 맥주를 뜯으며 친해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자 자기 영역에서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친구들과 모이면 늘 하는 것처럼 소소한 일상을 나누며 웃고 떠드는 시간이었습니다. 그중 ‘의로운 분노’시간은 정말 웃기고 재미있었어요. 활동가들끼리 모이면 꼭 개인적으로 분노할 일 뿐만아니라 사회문제 중 화가 나는 일들을 공유하며 같이 분노한다고 해서 ‘의분’이라고 하는데요, 시민단체 활동가들의 특성을 드러내는 말인 것 같아서 재미있었습니다.
밤, 지리산 작은변화베이스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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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즐겁게 논 덕분일까요? 간신히 평소와 비슷한 시간에 눈을 떴습니다. 산과 저 둘 다요. 호다닥 준비하고 줌으로 아침나눔에 참여했습니다. 산내면은 거짓말처럼 날이 맑게 개어서 비온 뒤 깨끗한 하늘이 반짝였는데요, 사무실에 출근한 활동가들은 비가 너무 많이 온다며 울상이었어요. 아마 저희가 있던 남부지방에 있던 비구름이 사무실이 있는 중부지방으로 올라간 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사무실에 있는 활동가들을 위한 출근길 사진을 몇 장 보내고, 저와 산도 들썩에서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전날의 여파인지 공유오피스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어요. 각자 원하는 자리에 앉아 업무를 하다 보니 빠르게 점심시간이 왔습니다. 저와 산은 마트에서 장봐온 재료로 점심을 해먹기로 했어요. 컨퍼런스 홀에 주방이 있어서 주방을 빌려쓰기로 한 거였죠.
재료를 많이 가져오기 어려운 만큼, 최대한 간단하게 할 수 있는 요리를 하기로 했어요. 수요일 점심 메뉴는 바로바로, 새우볶음밥과 상추겉절이, 간장버섯조림이었습니다!
(왼) 산과 함께 준비한 점심식사 / (오) 들썩에서 키우는 텃밭상자. 상추를 얻어먹었다.
산이 볶음밥과 반숙 계란후라이를, 제가 상추겉절이와 간장버섯조림을 준비했는데요, 지리산이음에서 가꾸는 텃밭에 자라는 상추를 뜯어먹어도 괜찮다고 해주셔서 특별히 텃밭에서 공수한 겉절이를 했답니다. 양 조절에 실패해서 버섯간장조림은 조금 짰고 겉절이는 고춧가루가 없어서 너무 아쉬웠지만, 상담소에서 다같이 해먹는 점심시간이 생각나는 식사였어요.
다음부터는 함께 워크스테이에 다녀온 활동가 산이 이어줄 예정입니다. 수요일 오후부터 금요일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시다면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