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2017년 말을 경유하며, 헐리우드발 ‘미투운동’이 연일 이슈로 터져나왔고, 많은 기자들이 “왜 한국에는 미투가 일어나지 않는지”를 물어왔습니다. 사실 2015년경부터 SNS상에서는 데이트 폭력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었고, 2016년에는 문단내, 영화계 내 성폭력이, 2017년에는 대기업 상사에 의한 성폭력들이 폭로되어 왔습니다. 연일 살얼음 같던 반성폭력운동단체들의 체감과 다르게 언론과 대중들에게 그 사건들은 그다지 ‘크게’ 인식되지 못한 것 같아 보였습니다. 아쉬운 마음도 잠시, 2018년 1월 29일, 서지현 검사의 검찰계 내 성폭력 폭로와 더불어 기존의 ‘성폭력피해경험 말하기 운동’은 ‘미투운동’이라는 언어와 상징을 획득하며, 본격적으로 가속화되었습니다.
그 시기, 한국성폭력상담소의 전화상담부스는 전화기를 내려놓기 무섭게 벨소리가 울릴 정도로 많은 상담들이 쏟아졌고, 다수의 피해자들이 ‘미투운동’을 언급하며 피해경험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빠르게 법과 제도적인 변화들이 제안되고, 계획되고 있었지만, 그 내용에는 언론에 기사 한 줄 나지 않는 성폭력들이, 그리고 너무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 이제야 말하기를 시작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경험이 얼마나 반영되고 있는가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왜 그동안 말하지 못했는가? 무엇이 ‘미투’라고 표현되는가? 말하기를 막고 있는 주류 남성중심적인 가치들의 전략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응답되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응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성폭력 상담일지에 주목하게 되었고, 생생한 현장들을 드러내기 위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부설연구소 울림 연구활동가들은 천주교성폭력상담소 김미순 소장님과 국회입법조사처의 허민숙 선생님을 공동연구원으로 모시고,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의 도움을 얻어 전국 4개소의 1년간 상담일지 약 15,000장 정도를 일일이 살펴보았습니다. 그 내용들 중에서 ‘미투’를 언급한 성폭력, 폭행·협박 없는 성폭력, 성폭력역고소 우려 및 피해에 관한 상담, 장애인성폭력을 핵심키워드로 뽑아내어 총 3,484회의 상담에 대한 분석을 진행했습니다. 그동안 ‘해결’되지 못한 사건들이 ‘미투’라는 이름으로 발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최협의설을 위시로 폭행·협박이 없는 성폭력들, 즉 ‘피해자다운 피해자’의 조건에 충족되지 않다고 여겨져 온 성폭력들이 그만큼 오랫동안 묵혀져있었다는 반증이었으며, 설사 문제제기한다고 해도 법과 현실의 불일치로 인해 가해자가 정당한 처벌을 받지 못한 것과 연결됩니다. 또한 이러한 편견들로 망설이다가 시간이 지난 후 사건을 폭로하거나 문제제기를 결심할 때, 역고소를 함께 고려해야 하는 현실은 이제야 말하기 시작한 피해자들에게 가해지는 또 다른 ‘보복성 피해’임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장애인성폭력은 ‘성폭력 피해자다움’과 ‘장애인성폭력 피해자다움’이 동시에 충족되어야 하며, 지적장애가 있을 경우 공론화 등이 어려워 ‘미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내담자가 피해자로 ‘추정’되는 상황 속에서 내담자가 말한 것 뿐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의 의미를 찾아 사건화해가는 과정을 거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미투운동’이 비장애인, 자국민, 자민족, 이성애적 관계에서의 성폭력을 중심으로 사고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였습니다.
더불어 그간 연구자료로 활용되지 못했던 전국성폭력상담소(170개)의 운영실적을 통해 그간 변화되어왔던 피해유형, 가해자와의 관계, 지원현황 등을 살펴보았고 이를 통해 형사·사법 기관의 통계에는 드러나지 않는 반성폭력운동 현장의 흐름과 개선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더불어 전국의 성폭력상담소 활동가 23명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사건지원에서의 문제점, ‘미투운동’에 대한 정부의 대응과정과 향후 개선방안들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2018년 초부터 각종 부처들에서 많은 개선방안들을 발표하였으나, 그 정책들이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들과 얼마나 다른지, 어떻게 개선되고 있는지를 비판적인 눈으로 지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서울외 지역의 상담소들을 방문하면서 연구자들은 우리도 모르게 내재되어있는 ‘서울중심성’에 대해 끊임없이 성찰하는 시간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지역과 상담소들에서 반성폭력운동가들이 펼쳐온 뜨거운 투쟁기들과 연대의 현장은 그야말로 감동의 연속이었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따뜻하고 꼼꼼하게, 또 어떤 지역에서는 당차고 강하게, 그리고 다른 지역에서는 계획적이고 치밀하게 피해자를 지원하고 계셨고, 각 지역별 차이와 역량, 특성에 맞는 지원과정들은 그간 반성폭력운동 30년의 역사들을 압축하여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기회로 다가왔습니다.
‘미투운동’을 언급한 많은 피해자들이 “다 잊고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미투 때문에 괴롭다”고 했고, “죽고 싶다”고 했고, “고통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이게 다 미투운동 때문이니 상담소가 책임지라”며 원망섞인 이야기들도 하셨습니다. 53년 전의 피해를 호소한 어떤 피해자는 “미투운동을 비롯해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하고 싶다”고 말했고, 또 한 피해자는 “나는 이제 살고싶어서 미투해야겠다”도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사실 ‘미투’는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으며, 우리는 이제 이러한 고백들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할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통해서 배워야 할 시간인 듯도 합니다.
다양한 지역, 다양한 양식과 내용의 수많은 일지들을 보면서, 저 깊은 어딘가에서, 아니면 저 높은 어딘가에서 무겁게, 간절하게, 뜨겁게 울리는 피해자들의 성난 함성이, 처절한 고백이, 늠름한 의지가 아직도 가슴 속에 생생합니다. ‘미투운동’은 정권을 바꿔낸 것보다 더 치열한 성폭력피해생존자들의 투쟁의 현장이고, 혁명적 발걸음의 시작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미투’는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운동이 아니고, 이제 시작되고 있는 운동입니다. 기존의 전형적인 피해자 상을 바꾸어내고 있는 피해자들이 있기에, 그리고 우리에게 축적된 운동의 전략과 연대의 힘이 있기에 계속 새로이 시작되는 운동입니다.
연구에 협조해주신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와 김미순, 허민숙 공동연구자님들, 그리고 일지열람을 깊은 고민 끝에 수락해주신 4개의 상담소 활동가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더불어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일지를 통해 만난 수많은 성폭력피해생존자들에게, 그리고 앞으로 또 만나게 될 더 많은 생존자들에게 마음 깊이, 온 힘을 담아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당신의 선택은 언제나 정당하고, 당신은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입니다.
* 본 보고서는 한국성폭력상담소 홈페이지에서 다운로드 받으실 수 있습니다. (PDF 보러가기)
<이 글은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 김보화(파이)가 작성하였습니다>